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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 헬라어 설교말씀] “탕자의 비유 큰 아들의 반란”(눅 15:25-32)

르호봇 2021. 3. 23.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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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5장 헬라어 설교말씀 중에서 탕자의 비유 큰 아들의 반란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동생이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동생을 위해서 가락지도 끼워주시고 살진 송아지도 잡아서 잔치를 배설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 주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마음에 서운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고 화가 날 뿐입니다. 이런 신앙이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큰 아들의 신앙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큰 아들은 편안하게 아버지와 살았습니다. 자신의 분깃을 이미 다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둘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큰 아들은 아버지 밑에서 마음 편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누릴 것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율법주의 신앙을 하는 자들은 나보다 못한 자들이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우리는 먼저 예수님을 알고 믿어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서 죄악 가운데 고통당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둘째 아들처럼 영적으로 고통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신경을 더 쓰고 은혜를 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큰 아들처럼 율법주의 신앙을 하지 않는 진정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탕자의 비유 큰 아들의 반란”(눅 15:25-32)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먼 타국에서 재산을 탕진하고 난 후에 돌아왔을 때에 종들을 시켜 옷을 갈아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집을 나가버렸지만 아버지는 계속해서 둘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이 그리워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재산도 챙기고 자신의 일에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둘째 아들과 큰 아들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 아들은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는다는 것은 그 당시의 풍습으로는 죄가 됩니다. 그렇다면 큰 아들도 죄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아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는 것이 싫어서 화를 냈습니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큰 아들은 아버지께 반란을 일으켜 화를 내게 됩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의 반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들은 자신들도 죄인이면서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면 하나님께 화를 내어 반란합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주의자들처럼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큰 아들의 반란을 통해서 우리가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고 주님이 말씀하시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25절은 엔 데 호 휘오스 아우투 호 프레스뷔테로스 엔 아그로 카이 호스 엘코메노스 엥기센 테 오이키아 에쿠센 쉼포니아스 카이 코론입니다.

눅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큰 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지금까지 풍악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풍악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리니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풍악과’라는 단어는 (쉼포니아 4858 명사, 소유격, 여성, 단수) 음악, 교향악, 이라는 뜻입니다. 큰 아들이 밭에서 일하고 난 후에 집에 돌아오는데 갑자가 오케스트라의 반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큰 아들은 자신의 집에서 음악소리가 지금까지 나지 않았는데 왜 나는지 궁금했습니다. 이 풍악 소리는 아버지가 기뻐서 작은 아들에게 베풀어주는 은혜의 소리입니다. 이 풍악 속에는 무엇이 소유되어 있을까요? 아버지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소유격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교회는 어떻습니까? 찬양을 할 때에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여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드리고 찬양대를 통해서 성도와 함께 기쁨과 영광의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이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원죄에서 죽었던 영혼들이 살아 돌아온 기쁨이 녹아져 있습니다.

춤추는’이라는 단어는 (코로스 5525 명사, 소유격, 남성, 복수) 춤추기, 합창, 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는 풍악과 춤추는 소리들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집에 몰려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춤추는 사람들은 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춤을 추었다는 것은 아버지가 베풀어 놓은 오케스트라에 맞추어 함께 한 목소리로 합창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가 풍악은 단수를 사용했고 춤추는 것은 복수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기쁨에 함께 동참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기쁨의 잔치에 동참하라고 했습니다. 이 잔치에 동참한 사람들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아버지가 왜 기뻐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큰 아들은 이 잔치에 동참하지 못하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예배에 나와도 아버지의 뜻에 합하여 합창을 하지 못하고 춤을 추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이 춤추고 합창하는 꼴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26절은 카이 프로스칼레사메노스 헤나 톤 파이돈 아우투 에퓐다네토 티 에이에 타우타입니다.

27절은 호 데 에이펜 아우토 호티 호 아델포스 수 헤케이 카이 에뒤센 호 파테르 수 톤 모스콘 톤 시튜톤 호티 휘기아이논타 아우톤 아펠라벤입니다.

눅 15:26-27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큰 아들은 한 종을 불러 묻고 있습니다. 종은 큰 아들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동생이 살아와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말합니다. 큰 아들은 왜 자신의 집에서 풍악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들렸는지 알았습니다. 궁금증이 해소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큰 아들은 빨리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큰 아들의 마음은 기쁨이 아니라 화가 치밀어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런 자들은 어떻습니까? 주일 예배에 참석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예배의 순서에 맞추어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드리면서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과 같은 자들은 예배에 제대로 참석하지도 않습니다. 참석을 했어도 찬양에 함께 동참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지 나보다 못한 저들은 저렇게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나는 왜 은혜가 없는지만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분노를 내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큰 아들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동생이 집을 나갔을 때에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이 상심했는지를 큰 아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런 아들이 살아 돌아왔으니 아버지는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빨리 알아야 합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편에 서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편에 서서 생각했기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큰 아들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28절은 오르기스데 데 카이 우크 에델렌 에이셀데인 호 운 파테르 아우투 엑셀돈 파레칼레이 아우톤입니다.

눅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큰 아들은 밭에서 돌아와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화를 냅니다. 이런 모습을 아버지가 보시고 나와서 큰 아들에게 권면하게 됩니다.

 

그가 노하여’라는 단어는 (오르기조 3710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디포, 단수, 3인칭) 노하게 하다, 노하게 되다, 라는 뜻입니다. 큰 아들은 종의 말을 듣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이 분노는 동생에 대한 분노가 아닙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입니다. 직설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실제로 큰 아들이 화가 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분노를 풍악소리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고 일시적으로 내는 분노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평상시에 살면서 마음속에 억누르고 있었던 분노가 동생이 돌아오면서 폭발한 것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과거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분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계속해서 분노가 쌓여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상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위해 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수동디포는 큰 아들이 지금까지 억눌렀던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표출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의 일을 위해 열심히 일해 놓고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과 같은 자들이 회개하여 돌아와 잔치를 베풀어 주면 분노를 일으킵니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권한대’라는 단어는 (파라칼레오 3870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단수, 3인칭) 초청하다, 격려하다, 애원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παρα(파라 3844) ~곁에, 따라서, 라는 뜻과 καλεω(칼레오 2564) 부르다, 청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큰 아들이 집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집을 나와 직접 큰 아들에게 달려왔습니다. 작은 아들을 맞이했던 것과 같이 맨발로 나와 반기듯이 큰 아들에게 내가 베풀어 놓은 잔치에 참여하자고 초청하여 격려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의 마음을 다 알고 있으니 제발 내가 베풀어 놓은 잔치에 들어가자고 애원합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의 곁에 서서 이끌어주려고 합니다. 나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 동생도 만나고 함께 먹고 즐기면서 춤을 추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것도 계속해서 큰 아들을 설득하면서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가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큰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잔치 자리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회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큰 아들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내가 베풀어 놓은 잔치에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시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자고 말씀하시는데 싫다고 말하지는 않습니까? 잔치의 초청이 무엇입니까? 예배입니다. 예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잔치를 베풀어 놓고 함께 은혜를 받자고 말씀하는데 자신은 싫다고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 아들과 같은 자들이 원죄에서 돌아와 기뻐하는 것이 싫지는 않습니까? 만약에 이런 생각들이 있다면 나는 율법주의자가 확실합니다. 빨리 회개하고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큰 아들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들과 같은 원죄의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아버지가 베풀어 놓은 잔치에 기꺼이 동참하여 함께 춤을 추어 기뻐해야 합니다.

29절은 호 데 아포크리데이스 에이펜 토 파트리 이두 토사우타 에테 둘류오 소이 카이 우데포테 엔톨렌 수 파렐돈 카이 에모이 우데포테 에도카스 에리폰 히나 메타 톤 필론 무 유프란도입니다.

눅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큰 아들은 아버지께 대답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는데 나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아 내 벗으로 즐기게 하지 않았습니까?라는 항변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께 반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비수(匕首)를 찌르고 있습니다.

 

내가 섬겨’라는 단어는 (둘류오 1398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단수, 1인칭) 종이 되다, 종의 의무를 수행하다, 섬기다, 라는 뜻입니다. 큰 아들은 지금까지 아버지를 섬겼다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종이 주인을 섬길 때에 쓰는 단어입니다. 직설법은 실제로 큰 아들이 아버지를 주인으로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종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아버지 집에 살고 있으니 기쁨과 즐거움이 없습니다. 문제는 큰 아들은 이미 자신의 재산을 받았습니다. 밭에 나가 일하는 것은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선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 놓고 지금 와서는 아버지의 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큰 아들은 지금까지 열심히 아버지를 섬겼는데 이렇게 나를 배신할 수는 없다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이유가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3절은 아그노운테스 가르 텐 투 데우 디카이오쉬넨 카이 텐 이디안 디카이오쉬넨 제툰테스 스테사이 테 디카이오쉬네 투 데우 우크 휘페타게산입니다.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큰 아들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열심히 일을 했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도 않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잔치에 들어가자고 말하지만 들어가지 않고 분노만 냅니다. 자신의 소유를 모두 받아서 자신의 영광만을 살아놓고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하나님께 따지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께 진노를 받게 됩니다. 큰 아들의 신앙은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율법주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종의 관계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아들의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께 회개하지 않습니다.

 

복종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휘포탓소 5293입니다. 문법은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복수 3인칭입니다. 직설법을 사용한 것은 율법의 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에 실제로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 시제는 이 사람들이 현재 지금 복종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과거부터 계속해서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선택받지 못한 신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동태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자신들이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복종하지 않게 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복종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성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복종할 수 있는 믿음과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30절은 호테 데 호 휘오스 수 후토스 호 카타파곤 수 톤 비온 메타 포르논 엘덴 에뒤사스 아우토 톤 모스콘 톤 시튜톤입니다.

눅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큰 아들은 아버지께 자신이 화를 내는 이유에 대하여 말합니다. 자신의 동생이 돌아왔는데도 형으로서 동생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이 아들이 돌아왔다고 말하는데 원문에서는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아들이지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원죄에서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과 형제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세리와, 창녀와, 어부들과는 격이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아들에게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고 나에게는 아무것도 잡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큰 아들은 생각했습니다.

 

혹시 우리 중에도 이런 신앙을 하지는 않습니까? 자신은 이미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과 같은 자들이 모든 것을 탕진하여 어려움과 고통 중에 살다가 아버지 품에 돌아오게 되어 기쁨의 잔치를 베풀어 주었더니 왜 이런 자들을 교회에서 받아 주냐고 분노를 내지는 않습니까? 이런 마음이 내 속에 있다면 나는 확실히 율법주의자며 큰 아들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는 회개하고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31절은 호 데 에이펜 아우토 테크논 쉬 판토테 메트 에무 에이 카이 판타 타 에마 사 에스틴입니다.

눅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말합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었지 않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큰 아들에게는 상속을 줄 때에 두 배를 주라고 했습니다. 큰 아들은 이미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며 동생보다 더 많은 재산의 몫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화를 내고 있습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왜 잔치를 베풀어 주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큰 아들의 행동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똑같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성경이 해석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해석할 때에 성경이 열리고 풀어지게 됩니다. 율법주의자의 입장에서 성경을 보면 둘째 아들과 같은 자들을 구원시켜 주면 안 됩니다. 더럽고 추악하며 도덕적으로 결여된 자들인데 이런 자들을 어떻게 구원시킬 수 있습니까? 자신처럼 깨끗하고 윤리나 도덕적으로 경건한 사람을 구원시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은 다릅니다. 둘 다 아들이기 때문에 둘째 아들과 같은 자들에게 더 마음이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큰 아들과 같은 자들은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32절은 유프란데나이 데 카이 카레나이 에데이 호티 호 아델포스 수 후토스 네크로스 엔 카이 아네제센 카이 아폴롤로스 엔 카이 휴레데입니다.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말합니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큰 아들에게 아버지는 책망 섞인 말을 합니다. 너는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으면서 누리고 살았는데 네 동생은 가산을 탕진하고 고통 중에 살다가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잔치를 베푼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기뻐서 잔치를 베푸는데 큰 아들이 말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둘째 아들은 완전히 잃었다가 얻었는데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큰 아들에게 명확하게 아버지는 말합니다.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작은 아들은 아버지께 회개를 했고 큰 아들은 절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두 아들이 똑같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큰 아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원죄에 대한 회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 아들은 율법주의자를 상징하고 작은 아들은 복음주의 자를 상징합니다. 그럼 우리들은 어떠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큰 아들처럼 현재 내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행위주의 삶을 산다면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지옥의 불 못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반면에 작은 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아프게 했지만 시간이 흘러 회개하고 돌아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큰 아들의 반란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의는 모르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으면 안 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을 얻고 그다음에 감사함으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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