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종려주일 히브리어 설교말씀 중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이미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기로 작정된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려고 예정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대속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이 땅에 성육신 하신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나의 무거운 죄 때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평소에도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지만 이번 주일을 통해서 더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영원히 살아났다는 것을 기억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사 53:1-6)
오늘은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왜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없었다면 지금 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죽었던 내가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전혀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고 찔림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가 살아났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나를 위해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분만을 높이고 찬송하며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고난당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여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절은 미 헤에민 리쉐무아테누 우제로아 아도나이 알 미 니겔라타입니다.
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사야 선지자는 500년 후에 나타나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도 받으시는 만왕의 왕이지만 함께 고난당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없이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살아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었느냐’이라는 단어는 (아만 539 동사 히필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확실하게 하다, 지지하다, 충실하다, 믿다, 라는 뜻입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믿는 사람은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주신 사람만 믿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히필 사역 능동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히필형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절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믿음은 마음에 확실하게 하시고 믿게 하셔서 하나님께 충성되게 신앙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마음에 확신을 주고 외부의 환경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이 믿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바로 믿음은 내가 행위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나도 주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절은 바야알 카요네크 레파나이브 베카쑈레쉬 메에레츠 치야 로 토아르 로 베로 하다르 베니르에후 베로 마르에 베네흐메데후입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미래에 오실 예수님을 예언하면서 예수님이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뿌리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나도 이렇게 예수님을 보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세전에 선택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셨기 때문에 이 땅에서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라는 단어는 (라아 7200 동사 칼 미완료 공성 1인칭 복수. 남성 3인칭 단수) 보다, 바라보다, 주목하다, 라는 뜻입니다. 바로 내가 예수님을 볼 때에 아무 흠모할 만한 것도 없이 바라보며 주목했지만 구원받을 만할 정도로 의로운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복음을 무시할 때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이런 삶을 세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칼 동사는 능동태를 말합니다. 바로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아무것도 흠모할 것이 없는 육체의 모습만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완료 시제를 쓰고 있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구원받을 때까지 이런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공성 1인칭 복수는 바로 내가 이렇게 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남성 3인칭 단수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이곳에서 주님을 위해 예배드리는 생명의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죄에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인생을 새롭게 바꾸어 놓게 되었습니다. 나는 죄악에서 살아날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영원히 죽었던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이시고 나를 살리셨습니다.
3절은 니브제 바하달 이쉼 이쉬 마케오보트 비두아 홀리 우케마세테르 파님 미메누 니브제 베로 하샤베누후입니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셨는데 엄청난 고통을 당하시고 간고를 많이 겪었습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고통과 고난을 아시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멸시를 받아’라는 단어는 (바자 959 동사 니팔 분사수동) 멸시하다, 싫어하다, 경멸하다, 업신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당하시고 경멸당하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바로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의 군병이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리고 침을 뱉어 멸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니팔 동사는 수동태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 멸시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분사 수동은 예수님이 멸시당하기 위해서 채찍으로 맞고 수치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멸시를 받았는데도 예수님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으시고 그 경멸을 모두 받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나를 위한 경멸입니다. 내가 죄 때문에 경멸당하고 무시당해야 될 것을 예수님이 대신 받아주신 것입니다. 또한 나도 이렇게 예수님을 무시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또한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까? 오늘 이 시간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자녀가 되었으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질고를’이라는 단어는 (홀리 2483 명사 남성 단수) 병들다, 약하여지다, 쇠약하다, 슬퍼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질고를 아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내가 육체적으로 병들고 영적으로 힘들어 슬퍼할 때에도 주님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 마음에 근심하고 쇠약해져 죽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에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셔서 나의 질고를 모두 거두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먼저 질고를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무거운 육체적인 질고와 영적인 고통을 모두 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나의 모든 쇠약한 것들을 알고 슬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주십니다. 오늘 이 시간 나의 모든 질고를 주님께서 알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께 맡기며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든 질고를 당하시고 버림받으시고 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하셨는데도 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님을 버리고 모욕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을 때도 많았고 주님을 배반하여 돌아갈 때도 있었으며 나의 구주로 고백하지 않고 세상에서 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를 아시고 나의 모든 질병과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위로를 받으려고 하면 마음에 시험이 올 때가 있습니다. 나는 이제 주님께 위로받고 나의 고통과 고난을 주님께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4절은 아켄 홀라예누 후 나사 우마케오베누 세발람 바아나흐누 하샤베누후 나구아 무케 엘로힘 우메우네입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주님은 나의 질고와 나의 슬픔을 모두 당하신 분인데 나는 생각하기를 예수님 자체가 죄가 있어서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대로 판단을 합니다. 주님의 고난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은 죄가 없고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당하였거늘’이라는 단어는 (사발 5445 동사 칼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담당하다, 메다, 싣다, 들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모든 육체의 질병과 영적인 고통을 주님이 직접 담당하시고 자신의 육체에 실어서 나의 질병을 멀리 떠나게 하시고 메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완전하게 치료해 주신 분입니다. 칼 동사인 능동태를 사용한 것은 예수님이 직접 홀로 십자가에 모든 죄악의 짐을 싣고 골고다에 올라간 것을 의미합니다. 완료 시제는 더 이상 누군가가 대속하지 않아도 될 만큼 완벽하게 모든 슬픔과 죄악의 짐을 짊어지셨음을 의미합니다.
나의 슬픔을 주님이 직접 담당하셨는데 고작 나는 생각한다는 것이 주님이 징벌을 받은 이유는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입니까? 이런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종려주일을 통해서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고통을 당하셨어도 완전하고 완벽하게 십자가에 당하시고 바로 나를 개인적으로 구원해 주신 분입니다.
‘맞으며’라는 단어는 (나카 5221 동사 호팔 분사수동 남성 단수) 맞아 죽다, 찔러 넣다, 채찍질하다, 죽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맞으셨는데 로마 군병들에 의해 채찍으로 맞으셨습니다. 이 채찍은 끝에 쇠와 뾰쪽한 동물의 뼈를 달아 만들었는데 이 채찍에 맞으면 살이 떨어져 나가는 엄청난 고통이 있습니다. 호팔형은 사역 수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고 채찍에 맞고 손과 발에 대 못에 찔리도록 지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이 사역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분사 수동은 주님의 죄 때문에 맞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백성들 때문에 맞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인정하시 싫어서 예수님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채찍을 맞으시므로 온 몸은 살이 찢겨나가고 피가 범벅이 되어 맞아서 죽도록 때린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군병들에 의해 옆구리에 창을 찔리시기까지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나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주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채찍을 맞는 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예정하시고 지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고난을 당한다’라는 단어는 (아나 6031 동사 푸알 분사수동) 괴로워하다, 욕보이다, 학대받다, 벌 받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는데 육체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고통을 당하십니다.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고통입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너무나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고통입니다. 푸알 동사는 강조 수동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피할 수도 없는 고난이며 엄청난 고통의 고난이었다는 것을 푸알형을 통해서 말씀합니다. 인간은 이런 고통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이러한 고통을 이겨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통이 얼만큼인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에게 침 뱉고 십자가에서 실오라기 하나 입지 않으시고 수치를 당하신 것이 너무나 큰 고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명예와 수치가 가장 큰 가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이 모든 고통을 생각할 때에 내가 받은 고통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나 참기 힘든 고통입니다. 욕보임을 당하고 고통당하는 것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고통을 모두 참아내셨습니다. 바로 나 때문에 참으신 것입니다.
5절은 베후 메홀랄 미페솨에누 메두카 메아오노테누 무사르 쉘로메누 알라이브 우바하부라토 니르파 라누입니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의 찔림은 나의 허물 때문이고 예수님이 상함은 나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므로 나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을 맞으므로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찔림은 어떤 찔림일까요?
‘찔림은’이라는 단어는 (할랄 2490 동사 푸알 분사수동) 구멍을 내다, 꿰뚫다, 관통하다, 더럽힘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찔림은 어느 누구나 찔리는 그런 찔림이 아닙니다. 나의 손에 전동드릴을 가지고 구멍을 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끔찍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면서 손과 발에 30Cm 대못을 박힘으로 구멍이 나셨고 완전히 관통하여 꿰뚫리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렇게 더럽힘을 당하시고 나에게 깨끗한 의로움을 주신 것입니다. 푸알 동사를 사용한 것은 강조 수동이기 때문에 엄청난 고통이 예수님에게 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대 못에 찔리고 채찍에 맞은 고통은 사람이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정도의 고통으로 예수님이 찔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셨는데 온 몸에 여러 개의 큰 드릴이 뚫고 있다고 상상해 보시면 나 때문에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나는 손톱 밑에 가시만 박혀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그 가시를 빼야만 되는데 예수님은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이 찔림은 바로 나의 원죄 때문이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분사 수동은 이러한 고통을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말합니다. 엄청난 고통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찌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상함은’ (다카 1792 동사 푸알 분사수동) 잘게 부수다, 분쇄하다, 깨어지다, 꺾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육체의 상함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상함입니다. 고기를 잘게 부수는 기계에 들어가서 고기가 분쇄되어 나오듯이 예수님의 육체의 상함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마어마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육체는 완전히 깨어지고 분쇄되어 모든 뼈마디가 꺾일 정도로 고통을 당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상함은 바로 나의 자범죄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하신 것이며 예수님의 육체가 갈기갈기 찢어진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예수님 때문에 원죄와 자범죄에서 해방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내가 어떻게 죄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까? 그 누구도 나 대신 목숨을 바쳐 사망에서 생명으로 구원시켜 줄자는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 외에는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상하는 것도 푸알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분쇄되듯이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려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까지 엄청난 심적 압박과 육체의 고통이 임했음을 말합니다. 주님은 운명하시고 나서 로마 병사들이 주님의 옆구리에 창으로 찔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몸이 완전히 상함을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 분 때문에 내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의 징계 때문에 내가 바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영원히 생명을 얻게 되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다시는 죄악 가운데 살지 않으며 죄를 생각하지도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절은 쿨라누 카촌 타이누 이쉬 레다르코 파니누 바아도나이 히페기아 보 에트 아온 쿨라누입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런데 나는 이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삶이 아닌 죽음의 삶을 살면서 예수님을 비난하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외아들 예수님께 나의 모든 죄를 담당시키셨습니다.
‘담당시키셨도다’라는 단어는 (파가 6293 동사 히필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만나다, 구하다, 죽이다, 강권하다, 중재자,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죽음의 길로 갔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나를 강권적으로 세상에서 빼내 주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히필 사역 능동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모든 짐을 담당시켰다는 것을 말합니다. 완료 시제는 예수님께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셔서 죽음으로 나의 모든 죄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의로 구원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는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를 믿음으로만이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완료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원죄와 자범죄를 담당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으며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가 되어 주셔서 죄인이었던 내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시는 중재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일을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직접 십자가에 죽이시기로 작정하시고 나를 위해 죽이셨는데 바로 완전하게 죽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완전하게 죽이지 않으면 선택된 백성들을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개인적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피 흘림이 없이는 절대 죄에서 해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절은 카이 아포 이에수 크리스투 호 마르튀스 호 피스토스 호 프로토토코스 에크 톤 네크론 카이 호 아르콘 톤 바실레온 테스 게스 토 아가페산티 헤마스 카이 루산티 헤마스 아포 톤 하마르티온 헤몬 엔 토 하이마티 아우투입니다.
계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예수님의 피가 나의 죄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나의 원죄와 자범죄를 모두 해방시켜 주시고 천국을 바라보는 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나는 당당하게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제 나는 죄인의 신분이 아니라 의인의 신분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이 시간 종려 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고통이 얼마나 크셨는지를 깨닫고 나의 죄가 이 정도로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을 인생인데 내가 죽는다고 해서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나 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이 시간 확실히 알고 신앙생활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르호봇 원문 설교강해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 22장 히브리어 설교말씀] “천국의 혼인잔치비유”(마 22:1-14) (0) | 2021.03.28 |
---|---|
[로마서 2장 헬라어 주석강해] 유대인 할례 이방인 무할례(롬 2:17-25) (0) | 2021.03.27 |
[말라기 3장 히브리어 설교말씀] “십일조 봉헌물 규례”(말3:7-12) (0) | 2021.03.26 |
[마태복음 13장 헬라어 설교말씀] “천국을 찾은 진주 장사”(마 13:45-46) (0) | 2021.03.25 |
[누가복음 15장 헬라어 설교말씀] “탕자의 비유 큰 아들의 반란”(눅 15:25-32) (0) | 2021.03.23 |
[누가복음 15장 헬라어 설교말씀] “탕자의 비유 둘째 아들이 회개하여 돌아옴”(눅 15:17-24) (0) | 2021.03.23 |
[누가복음 15장 헬라어 설교말씀] “탕자의 비유 둘째 아들의 반란”(눅 15:11-16) (0) | 2021.03.23 |
[부활절 헬라어 설교말씀]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마 27:51-53) (0) | 2021.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