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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 헬라어 설교말씀] “탕자의 비유 둘째 아들이 회개하여 돌아옴”(눅 15:17-24)

르호봇 2021. 3. 2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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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5장 헬라어 설교말씀 중에서 탕자의 비유 중에서 둘째 아들이 회개하여 돌아오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의 분깃을 모두 청산하여 타지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허랑방탕하게 인생을 살면서 가지고 간 재산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이방인과 함께 살면서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교만하게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겠다고 아버지를 떠났지만 결과는 참패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생하면서 인생을 살게 되니 자신의 집이 그리워졌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이 너무나 힘들고 고달프니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 너무나 기뻤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면서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입니다. 원죄 가운데 죽었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니 하나님은 기뻐서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이 회개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직도 고생하면서 인생을 살고 있다면 이 시간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탕자의 비유 둘째 아들이 회개하여 돌아옴”(눅 15:17-24)

 

아버지 품에 있었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 먼 나라로 갔습니다. 이곳에서 술을 마시면서 허랑방탕하게 인생을 살다가 자신이 가지고 간 재산을 모두 탕진하였습니다. 업 친데 덮친 격으로 재산도 없는데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먹을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둘째 아들은 먹고살기 위해 돼지를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지만 이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현재 둘째 아들의 환경과 상황이 너무나 열악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우리들도 창세전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아담의 후손으로 내려오니 원죄의 죄인이 되어 고통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쥐엄 열매를 먹어야 하고 돼지를 쳐야만 하는 죄인의 상태로 떨어져 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아들의 상황이 이 시간 나의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때를 기억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바닥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 시간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내가 만세전에 선택받은 상태의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씀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직도 세상에서 둘째 아들처럼 방황하고 있다면 빨리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둘째 아들은 고통이 오니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됩니다.

17절은 에이스 헤아우톤 데 엘돈 에이펜 포소이 미스디오이 투 파트로스 무 페릿슈우신 아르톤 에고 데 리몬 아폴뤼마이입니다.

눅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둘째 아들은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돌이켜 말하기를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생겼다고 말합니다. 이 시점이 회개의 시점입니다. 육적인 것이 바닥이 나니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육적인 것이 많을 때는 하나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물이 바닥이 나면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생각나고 회개하여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풍족한’이라는 단어는 (페릿슈오 4052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복수, 3인칭) 넘치다, 풍성하다, 넉넉하다, 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나니 아버지의 집이 그리워집니다. 그전에는 생각하지도 않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비참해지니 아버지의 품꾼들도 부러워 보입니다. 이들은 아버지 밑에서 양식을 풍족하게 먹고도 남았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품꾼들에게도 양식을 넉넉하게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지금 깨닫고 있습니다. 현재 시제를 사용한 것은 전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 자신의 처지를 보니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때가 좋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같이 있을 때는 깨닫지 못하다가 아버지를 떠나고 고통을 당하니 그제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둘째 아들은 품꾼들도 양식을 넉넉하게 먹고 있다는 것을 지금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몰랐다가 자신이 먹을 양식이 떨어지니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현재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떡을 하나님 안에서 마음껏 먹고 있을 때는 이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모르고 살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먹지 못하고 굶주린 상태에서 내가 먹었던 생명의 떡인 복음이 귀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지는 않습니까? 현재 나는 십자가 복음을 먹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먹고 있는 것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둘째 아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서 굶주려 죽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려 죽는구나’라는 단어는 (아폴뤼미 622 동사, 직설법, 현재, 중간태, 단수, 1인칭) 멸망하다, 망하다, 죽임을 당하다, 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 먹을 양식을 주지 않아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한탄합니다. 현재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여 망했습니다. 육적으로 죽을 상황이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실제로 지금 자신에게 음식을 주는 자가 없어서 자신은 죽어야 하는 상태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가 현재 시제와 중간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둘째 아들을 쳐다보는 사람이 없으며 누구 하나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없어서 죽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와 같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떠나면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없습니다. 영혼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이 생명의 떡인 복음을 먹지 못하니 굶주리게 되고 세상에서 율법의 떡만 먹다 보니 마지막은 정죄이며 심판을 받아 영혼은 고통 가운데 처해지게 됩니다. 율법의 말씀은 계속해서 영혼이 굶주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혼이 풍족하게 채워지게 됩니다. 이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18절은 아나스타스 포류소마이 프로스 톤 파테라 무 카이 에로 아우토 파테르 헤마르톤 에이스 톤 우라논 카이 에노피온 수입니다.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둘째 아들은 회개합니다. 자신이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기를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려고 작정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작정해야 합니다. 마음을 먹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먼저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죄를 지었사오니’라는 단어는 (하마르타노 264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단수, 1인칭) 죄를 짓다, 빗맞추다, 실수하다, 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보니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직설법을 사용한 것은 자신이 실제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했던 것이 자신의 실수이며 이것이 아버지께는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화살이 과녁에 제대로 꽂지 못하고 빗나간 것처럼 아버지의 뜻에 제대로 행동하지 못한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과거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둘째 아들이 과거를 추억하면서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던 상황을 회개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받을 자가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만이 구원이 있다고 말씀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로 함께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없습니까?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둘째 아들과 같은 원죄의 죄인은 행위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갈 수 있습니다.

19절은 카이 우케티 에이미 악시오스 클레데나이 휘오스 수 포이에손 메 호스 헤나 톤 미스디온 수입니다.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둘째 아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현재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죄가 너무나 커서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부름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보라고 아버지에게 말하겠다고 작정합니다.

 

일컬음을’이라는 단어는 (칼레오 2564 동사, 부정사, 과거, 수동태) 부르다, 이름을 짓다, 일컬음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 스스로 온갖 상상을 합니다. 아버지에게 가서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름을 받을 자격이 안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의 이름을 지어주시고 불러 주신 것을 잊어주십시오.라고 마음속으로 말하면서 상상합니다. 이것은 둘째 아들의 착각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둘째 아들은 끝까지 아들입니다. 인간은 자신 스스로 착각 속에 빠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들로 삼아 주시지 않을 거야! 이런 상상은 금물입니다. 우리는 만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수동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이 세상에 와서 원죄 가운데 죽어 고통을 당하고 회개하여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아버지를 배신하고 떠나온 죄가 너무나 커서 아들로 부르지 말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체가 아버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한 번 아들은 영원한 아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취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아들이 되었으면 영원한 아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20절은 카이 아나스타스 엘덴 프로스 톤 파테라 헤아우투 에티 데 아우투 마크란 아페콘토스 에이덴 아우톤 호 파테르 아우투 카이 에스플랑크니스데 카이 드라몬 에페페센 에피 톤 트라켈론 아우투 카이 카테필레센 아우톤입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둘째 아들은 마음을 먹고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이것은 회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고도 험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둘째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입맞춤은 유대인의 인사법입니다.

 

측은히 여겨’라는 단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 4697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디포, 단수, 3인칭) 불쌍히 여기다, 동정하다, 측은히 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먼 나라로 떠난 이후에 아버지는 계속해서 둘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아들이 돌아올 때에 아버지는 먼저 아들을 보고 기뻐서 아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둘째 아들이 고생한 것을 아시고 불쌍히 여겨주시게 됩니다.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아버지는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세리와, 병자와, 창녀와, 어부를 측은히 보시고 동정의 손길로 보듬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현재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아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는 것은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갈 때부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만세전에 선택받은 자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여 이 땅에서 원죄의 삶을 살면서 고통을 당할 것을 하나님은 이미 아시고 나를 측은히 여기시며 불쌍히 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가니 아버지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시고 목을 안고 입을 맞추어 주셨습니다. 수동디포 문법을 쓰고 있는 것은 측은히 여김을 받는 것은 아버지께서 해 주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을 본 아버지는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21절은 에이펜 데 아우토 호 휘오스 파테르 헤마르톤 에이스 톤 우라논 카이 에노피온 수 카이 우케티 에이미 악시오스 클레데나이 휘오스 수입니다.

눅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서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주는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자신은 아버지 앞에서 엄청난 큰 죄를 저지르고 먼 나라로 떠났는데 자신을 책망하지 않고 반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는데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는 표현입니다. 둘째 아들은 철저한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이때에 구원의 확신이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고생을 하고 보니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이 귀한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먼저 하나님 앞에 내가 원죄의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원죄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내가 인지하지 못하면 구원의 역사는 없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자신의 모든 죄를 떨어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받을 자가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교개혁 당시의 믿음의 선진들이 외쳤던 회개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들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은혜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으로, 오직 성경으로, 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제 우리들도 둘째 아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외쳐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이 없이는 절대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 앞에 나가야 합니다.

22절은 에이펜 데 호 파테르 프로스 투스 둘루스 아우투 엑셀넹카테 텐 스톨렌 텐 프로텐 카이 엔뒤사테 아우톤 카이 도테 다크튈리온 에이스 텐 케이라 아우투 카이 휘포데마타 에이스 투스 포다스입니다.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아들과 아버지의 생각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철저한 회개를 아시고 종들에게 말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둘째 아들에게 입히라고 합니다. 또한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합니다. 온전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옷을 내어다가’라는 단어는 (에크페로 1627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태, 복수, 2인칭) 가지고 가다, 메어내다,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메어다가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입히라고 말합니다. 이 옷은 둘째 아들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옷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과거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위해 이런 날에 입히기 위해서 준비해 두었던 옷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하여 반드시 입힐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원죄에 빠져 죽었던 나를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만세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아버지 품으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십자가 보혈의 의의 옷을 준비해 놓으시고 이 옷을 입혀주시고 있습니다.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준비한 옷을 반드시 입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준비해 놓으시고 입혀 주셨습니다. 

 

가락지를 끼우고’라는 단어는 (디도미 1325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태, 복수, 2인칭) 주다, 하사하다,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하여 둘째 아들에게 가락지를 끼워주라고 말합니다. 이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로 온전한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가락지도 둘째 아들의 몫으로 이미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과거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살 때부터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죄의 죄인이 되기 전부터 하나님은 나에게 끼워줄 가락지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니 하나님은 이미 준비해 두셨던 아들의 권세를 나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발을 신겨 주셨습니다. 신발은 복음을 상징합니다. 구원받은 나는 앞으로 오직 복음의 신을 신고 다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고 나타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23절은 카이 에넹칸테스 톤 모스콘 톤 시튜톤 뒤사테 카이 파곤테스 유프란도멘입니다.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옷과 가락지와 신발을 신겨서 아들의 권세를 회복시켜 주시고 난 후에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서 우리가 먹고 즐기자면서 잔치를 베풀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잔치를 배설했다는 것은 예배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원죄에서 회복된 자들은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원죄에서 회복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함을 말합니다. 교회가 원죄에서 회복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떡을 먹음으로 잔치가 일어나게 되고 아버지와 아들과 종들이 함께 먹고 기뻐하면서 즐기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인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고 구원받은 자들이 기뻐하면서 즐거워하게 됩니다.

즐기자라는 단어가 유프라이노 2165입니다. 기쁘게 하다, 격려하다라는 뜻입니다. 문법은 동사 가정법 과거 수동태 복수 1인칭입니다. 죽었다가 살아온 둘째 아들이 돌아오니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함께 먹고 즐거워하자고 말합니다. 둘째 아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과거 시제는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이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구원받고 나면 하나님 아버지와 즐길 자격이 생깁니다. 수동태는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즐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가 잔치를 배설하니 아들은 그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가 천국 잔치를 배설하니 참여하여 즐겁게 즐기게 됩니다. 

24절은 호티 후토스 호 휘오스 무 네크로스 엔 카이 아네제센 카이 아폴롤로스 엔 카이 휴레데 카이 에륵산토 유프라이네스다이입니다.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버지의 집에 있는 종들은 주인의 이런 행동에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새로운 신발을 신기는 것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때에 주인은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아무나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원죄 가운데 빠져 죽었던 이 아들은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다시 살아서 돌아왔으니 아버지가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종들도 즐거워하게 됩니다.

 

종의 신앙은 주인의 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들의 신앙으로 돌아서면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나도 원죄의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재산을 모두 팔아 내 마음대로 허랑방탕하게 살았던 죄인입니다. 이런 죄인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먹을 양식이 없어 괴로울 때에 하나님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복음의 양식이 많은데 내 영혼은 먹을 양식이 없어서 주려 죽게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다짐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교회로 나가기로 결심한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 막상 나오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없고 목사님도 볼 수 없고 더 나아가 주님을 배신하고 돌아선 일 때문에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많은 성도들과 목사님과 주님이 괜찮다고 말씀해 주고 주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채워주었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를 받아 더 이상 원죄의 상태에서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나의 원죄의 옷을 벗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의 옷으로 갈아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떨어지지 말자고 나의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워주셨습니다. 허름한 신발을 벗기시고 새로운 복음의 신발로 신겨주셨습니다. 이런 자가 바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둘째 아들은 죄인이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반겨주시고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은 원죄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깨져버렸습니다. 전적으로 부패되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원죄에서 회복시켜 주시고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복귀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을 통해서 깨달을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둘째 아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원죄의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영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육체적인 고통과 고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니 아버지의 품인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떠나면 십자가 복음의 양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의 원어 복음을 통해서 날마다 영혼이 살찌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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