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장에서는 이삭이 우물을 파서 복을 받은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그랄 땅에서 농사를 지어 한 해에 백 배의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한 장소에 있을 때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악한 자리에 있으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장소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삭이 우물을 팠는데 에섹과 싯나와 르호봇의 우물을 팠습니다. 르호봇을 통해서 번성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먼저 다투지 말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양보하면 하나님이 더 큰 축복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삭이 판 에섹, 싯나, 르호봇의 우물 사건(창 26:12-22)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가 원하는 데로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주님이 원하는 방향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는 데로 살아가도록 성도들을 인도했다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데로 삶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역행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면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면 주님이 책임을 지는데 자신 뜻대로 주님의 뜻에 역행하면서 살면 내가 인생을 책임져야 합니다. 오늘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 때 첫 흉년이 들었는데 이삭 때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삭이 블레셋 땅인 그랄로 이주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 때 흉년이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남방으로 내려가 애굽까지 들어가서 바로 왕에게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이삭도 그랄을 떠나 애굽으로 가려는 마음이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지 않으니 자신의 소견대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창26: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삭도 흉년의 환경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니 자신의 소견대로 판단하면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이삭에게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 애굽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거주하는 땅에 왜 거주하라고 했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거주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샤칸 7931 정착하다, 거주하다, 머물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 계속해서 이삭과 임재하여 가뭄에 함께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성막에 하나님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신 것처럼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삭에게 머물러 있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가뭄에 거주하라는 곳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이 ‘샤칸’의 은혜를 주셔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하여 영적인 가뭄과 육적인 가뭄에 큰 복을 주십니다. 내가 가뭄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내 안에 임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더니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창26: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이삭이 가뭄에 농사를 했는데 그 해에 백 배를 얻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백 배의 복에만 꽂혀있습니다. 가뭄에 백 배의 복을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임재하여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블레셋 민족에게는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뭄에 소출이 없었던 것이고 이삭은 가뭄에 하나님이 함께했기 때문에 복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가뭄에서 내가 복을 받은 것은 주님이 내 안에 항상 임재하여 계시기 때문에 복을 받았습니다. 가뭄에 100배의 복을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떠나면 블레셋 사람과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복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신 주님을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
창26: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이삭이 가뭄에 창대해지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삭이 거부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삭이 농사를 잘 지어서 소출이 많아졌을까요? 블레셋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짓지 못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을까요? 나는 실력이 좋은데 세상 사람들은 실력이 없어서 소출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나의 실력과 능력과 노력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그런 노력으로는 가뭄에 100배의 소출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거부가 되지 못합니다. 그럼 어떻게 이삭이 거부가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거주하라는 장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장소를 지정해주시는 것은 그곳에서 보호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곳을 버리고 인간의 생각으로 눈에 보이는 좋은 곳에 있다 하더라도 소출은 생기지 않습니다. 나의 노력과 실력이 출중해도 사업이 번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샤칸’으로 임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내가 현재 있는 장소가 하나님이 임재하는 장소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눈으로 볼 때 너무나 초라해 보이고 지하 단칸방과 같은 장소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곳에 머무르라고 하면 그곳이 축복된 장소입니다. 눈에 보기에 화려하고 좋아 보여도 주님이 임재하지 않으면 그곳은 메마른 가뭄의 장소가 됩니다.
이삭이 복을 받으니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게 됩니다. 가뭄에 자신들은 소출이 없고 쪼그라드는데 이삭은 하는 농사마다 소출이 풍성하니 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든든한 지원자가 없기 때문에 가뭄에 삶이 불안합니다. 이삭은 든든한 보호자이며 지원자인 여호와 하나님이 삶에 계속해서 임재하여 계시니 마음과 육신이 든든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마음이 든든하십니까? 돈입니까? 나의 출중한 능력입니까? 나의 끊임없는 노력입니까? 돈 많은 부모입니까? 이런 모든 것은 일시적입니다. 내 안에 항상 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마음이 든든하고 영혼이 든든합니다.
히6: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영혼의 닻과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마지막 날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임재하여 계시니 육신의 삶에서도 닻과 같아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가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디를 가든지 주님이 인도하는 데로 따라가게 됩니다. 가뭄에 거부가 되고 복을 받고 세상 사람들이 시기 나게 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바랍니다.
이삭이 복을 받으니 블레셋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물을 막아버립니다.
창26:15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브라함 때 종들이 팠던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워버렸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우물은 생명입니다. 광야에서 우물을 막아버린다는 것은 저주를 내리는 것과 같고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물을 뺏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우물을 메운다는 것은 자신들도 물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심보가 무엇일까요?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망쳐놓고 보자. 라는 심보입니다. 영적으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물은 생수가 나오는 복음을 상징합니다. 지금도 사탄의 세력들은 생수가 나오는 우물을 막고 있습니다. 흙으로 막아서 성도들이 생수를 마시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여 목말라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우물을 파서 생수를 끌어올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를 성도에게 마시게 해야 합니다.
이삭이 하나님과 함께하여 복을 받으니 블레셋 사람들이 어떤 반응이 나옵니까? 자신들을 떠나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습니다.
창26: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아비멜렉은 블레셋의 왕입니다. 왕이 이삭에게 직접 말하여 우리보다 크고 강성하니 당장 자신들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왜 떠나라고 할까요? 이삭이 힘이 세서 자신들을 해코지할까 하여 떠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떠나라고 하는 것은 자신들이 손해를 볼까 하여 떠나라고 합니다. 만약 내가 그들보다 강하지 못하고 약하면 나를 붙들어 놓고 강압적으로 억누를 것입니다. 이런 세력이 사탄의 세력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영육으로 블레셋과 같은 사탄의 세력과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이런 자들은 언제든지 나의 생명을 노리게 됩니다. 이삭은 블레셋 왕의 말을 듣고 그들을 떠나게 됩니다.
창26:17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이삭이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서 거류하게 됩니다. 이삭이 블레셋 땅에서 약 15년 정도 거주하게 됩니다. 이때 거류했다는 것은 자신의 육체가 정착하여 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삭이 블레셋 왕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생수의 근원을 찾는 일입니다. 우리도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여 생수를 파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하여 계시면 우물을 파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연구하고 성경을 공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이삭은 아버지 때 블레셋 사람들이 막았던 우물들을 다시 파기 시작하여 샘 근원을 찾았습니다.
창26: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광야에서 우물을 팠는데 물이 나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물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시니 우물을 팠는데 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럼 샘 근원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생명의 근원을 찾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이 2416 살아있는, 생존하여 있는) 광야에서 우물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광야에서 샘 근원을 찾아야 하는데 영적 가뭄에 샘 근원이 무엇입니까?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계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예수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생명수 샘물을 주십니다. 영적으로 갈급한 영혼에게 값없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해야 하고 샘물의 근원을 열심히 파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물을 열심히 파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니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창26: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이 파놓은 우물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랄 목자들이 이 우물은 자신의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복음이 없는 자들의 행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자신이 손도 대지 않은 일에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다투고 있습니다. 그랄 목자와 같은 자들입니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이라고 했습니다. (에세크 6230 다툼) 에섹의 우물을 열심히 팠는데 다른 사람이 소유권을 주장하여 다투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삭은 생명과 같은 우물을 그랄 목자들에게 주고 다른 우물을 파게 됩니다. 이삭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과 소유권 분쟁에 휘말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과 다투면 하나님이 싫어합니다. 이삭이 에섹 우물을 양보하고 다시 판 우물이 무엇입니까?
창26: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에섹 우물을 주고 또 팠는데 그 우물을 또 달라고 다투게 됩니다. 이번에는 처음 것보다 더 악의적으로 빼앗으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싯나라고 이삭이 이름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시트나 7856 적대) 싯나 우물의 이름은 적대감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싯나는 사탄이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사탄과 같은 존재들은 복음의 생수의 근원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복음의 생수를 빼앗아 그 물을 더럽힙니다. 우리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삭은 적대적으로 덤비는 그랄 목자들에게 싯나 우물을 양보하게 됩니다. 복음이 없는 자들은 자신이 손을 대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은 일들에 관하여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악의적으로 덤빕니다. 이럴 때 그리스도인인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그들과 함께 싸워서 이겨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기다려야 할까요? 이삭은 두 번째를 선택했습니다. 적대감을 가지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그들과 싸우지 않고 양보했습니다.
광야에서 우물을 발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이삭은 우물 두 개를 모두 양보하게 됩니다. 이렇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삭과 함께 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에섹과 싯나의 우물은 가뭄이 오면 또 다시 말라버리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물에 물이 있지만 때가 되면 물이 말라버려 가뭄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다릅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가뭄에도 목마르지 않습니다.
창26: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이삭이 두 개의 우물을 양보하고 자리를 옮겨 다른 우물을 파게 됩니다. 이 우물을 발견하고 팠을 때는 그랄 목자들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마지막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지었습니다. (레호보트 7344 넓은 지역) 르호봇은 지역이 넓혀졌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여 복을 주셨는데 처음과 두 번째 우물의 복보다 더 큰 축복으로 번성케 하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이삭처럼 열심히 일해서 우물을 팠는데 마지막에 그랄 목자와 같은 자들이 나타나서 자신의 것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하는 억울함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했을까 생각하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에게 더 큰 축복을 허락해 주시려고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에섹과 싯나와 같은 상황이 없으면 어떻게 르호봇과 같은 우물을 팠겠습니까? 마지막 르호봇은 다투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우물의 생수를 이삭이 마시면서 살게 됩니다. 엄청나게 번성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 이삭은 블레셋 지역에서 살면서 많은 훼방과 핍박에서 인내하면서 양보했더니 하나님이 엄청난 복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억울한 일도 당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이 오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열심히 에섹 우물을 팠는데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싯나 우물을 팠는데 악의적으로 덤벼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이 없다면 어떻게 르호봇과 같은 우물을 내가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시간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있으니 르호봇과 같은 복이 임한다는 것을 믿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9장 히브리어 설교말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창 19: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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