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세운 나라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역대 왕들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했고 거짓 선지자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따랐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 북이스라엘 왕은 여로보암 2세 때입니다. 나라가 부강했지만 영적으로는 쇠퇴기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제사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제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도 허공만 치는 제사는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여호와 알기를 원하지 않는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야 하고 예수님을 알기를 원해야 합니다.
제사보다 여호와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4-6)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것에서 돌아서서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완전한 회개를 하지 않고 불성실하게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우러나오는 회개를 하지 않고 형식적인 회개를 하면서 온전한 회개를 하나님께 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회개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면 절대 회개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깨닫지 못하면서 율법의 형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회개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겉으로는 화려하다고 할지라도 속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4절 마 에에세 레카 에프라임 마 에에세 레카 예후다 베하세드켐 카아난 보케르 베카탈 마쉐킴 홀레크
호6: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의 인애가’라는 단어는 (헤세드 2617) 친절, 인자, 은혜, 라는 뜻이며 חסד(하사드 2616) 사랑하다, 연모하다, 책망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은혜와 친절이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고대 근동의 이스라엘 지역은 아침이면 태양이 떠서 엄청나게 뜨겁습니다. 이때에 구름이 떠주면 시원한 것입니다. 습도가 없기 때문에 그늘에 앉아있으면 시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쉬 없어지는 이슬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우상에서 돌아섰는데 아침 구름처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뜨거운 태양을 잠시 가려주는 구름처럼 온전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없는 불성실한 회개를 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연모하는 척만 한 것입니다. 마음은 우상에게 쏠려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책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데 마음은 세상의 우상에게 가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뜨거운 태양 아래에 있는 것과 같은데 회개하여 시원하게 해 드리는 것 같지만 이런 시원함은 잠시 있는 것이며 태양이 비치면 이슬이 순간에 사라지는 것과 같이 마음을 우상에게로 순간 돌려버리는 신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 이런 신앙이 쉽게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신앙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하겠다고 고백하면서 마음에는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6절 호 데 아포크리데이스 에이펜 아우토이스 호티 칼로스 프로에페튜센 헤사이아스 페리 휘몬 톤 휘포크리톤 호스 게그랍타이 후토스 호 라오스 케일레신 메 티마 헤 데 카르디아 아우톤 포르로 아페케이 아프 에무
막7: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신 것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도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입술로는 공경하지만 마음은 이미 세상의 물질과 권력과 우상 앞에 있다면 불성실한 회개를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회개를 통해서 마음과 입술의 고백이 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5절 알 켄 하차브티 바네비임 하라게팀 베이므레 피 우미쉐파테이카 오르 예체
호6: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으며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온전한 회개가 일어나지 않으니 말씀으로 치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들을 치고’라는 단어는 (하차브 2672 VQACXS 동사, 칼(능동태), 완료, 공성, 1인칭, 단수) 돌을 떠내다, 벌목하다, 찍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쳤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심령에서 돌을 떠낸 것입니다. 성경에서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 떠내서 황폐한 심령을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산에 무성한 나무가 있지만 벌목꾼들을 통해서 나무를 모두 찍어 버리면 황폐하여 민둥산이 됩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치가 돌아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치를 주고 은혜를 거두었는데 자신들 스스로는 회복할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수치를 주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수치를 회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온전한 회개를 하지 않고 계속해서 우상을 섬기게 되면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돌을 의지하지 않고 연합되어 있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33절 카도스 게그랍타이 이두 피데미 엔 시온 리돈 프로스콤마토스 카이 페트란 스칸달루 카이 파스 호 피스튜온 에프 아우토 우 카타이스퀸데세타이
롬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둔다고 하셨습니다. 이 돌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십자가에서 모두 가져가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믿지 않으면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6절 키 헤세드 하파츠티 베로 자바흐 베다아트 엘로힘 메올로트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번제를 드리니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원하고’라는 단어는 (하페츠 2654 VQACXS 동사, 칼(능동태), 완료, 공성, 1인칭, 단수) 사랑하다, 기뻐하다, 사모하다, 즐거워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재물을 드리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전혀 하나님의 마음이 기쁘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칼 단순 능동과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내가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음에도 없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호 데 이에수스 에이펜 아우토 아가페세이스 퀴리온 톤 데온 수 엔 홀레 테 카르디아 수 카이 엔 홀레 테 프쉬케 수 카이 엔 홀레 테 디아노이아 수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형식적인 기도와 형식적인 예배는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시간만 때우는 기도와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24절 프뉴마 호 데오스 카이 투스 프로스퀸타스 아우톤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데이 프로스퀴네인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이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영과 진리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는 예배, 십자가 복음의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가 될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애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말씀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는 단어는 (다아트 1847) 지식, 이해, 지혜, 라는 뜻이며 ידע(야다 3045) 동침하다, 가까이하다, 기억하다, 교훈을 받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사와 번제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를 더 원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랑과 신부가 동침하여 알 듯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혼인관계가 이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하나님의 교훈의 말씀을 배우고 기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형식적인 예배와 헌물에 하나님은 진저리가 나셨습니다. 온전한 회개도 없이 마음은 이미 세상으로 돌아가 우상을 섬기는 예배는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10절 테힐라트 호크마 이르아트 아도나이 베다아트 케토쉼 빈나
잠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의 근본이 되고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명철입니다. 여기에서 ‘아는 것이’라는 단어가 (다아트 1847)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분의 지혜와 지식을 아는 것이 명철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알고 복음을 깨닫고 난 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배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방황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살았습니까?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항상 마음에는 우상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시고 진리 안에 임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32절 카이 그노세스데 텐 알레데이안 카이 헤 알레데이아 엘류데로세이 휘마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나에게 진리를 알게 하여 주시고 이 진리를 통하여 자유 함을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버러지와 같은 인생이었는데 영원히 진노받을 인생을 이렇게 은혜를 허락하여 주셔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형식적인 예배 생활을 버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 헬라어 설교] 첫 장막 성소와 둘째 장막 지성소의 기능(히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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