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바치는 속전세의 영적 비밀(출 30:11-16)
하나님이 속전세를 바치라고 한 것은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의 속전을 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속전세를 내는 것은 구원의 확신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속전세를 내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위로 속전세를 내려고 하면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의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만이 구원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확실히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원죄가 사라졌습니다. 원죄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예수님을 믿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속전세는 죄인을 구원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구약에서는 속전세를 내라고 했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30: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것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12절 키 티사 에트 로쉬 베네 이스라엘 리피키데헴 비나티누 이쉬 코페르 나피쇼 라아도나이 비피코드 오탐 비로 이흐예 바헴 네게프 비피코드 오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 조사 받은 각 사람은 자기의 생명의 속전세를 여호와께 드리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스라엘 자손에게 질병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속전세를 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질병은 원죄의 죄를 상징합니다. 속전세를 내게 됨으로 질병이 걸리지 않는 것처럼 원죄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죄가 사라지게 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함으로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을 때 원죄에서 해방됩니다.
‘자기의 생명의’ (네페쉬 5315) 숨 쉬는 존재, 영혼,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속전을 하라고 했습니다. 구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체의 생명을 위하여 속전을 하라고 했지만 이것은 현재 우리에게는 영혼을 위하여 속전할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육체의 생명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영혼에 관련하여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시116: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4절 우비셈 아도나이 에키라 아나 아도나이 말리타 나피쉬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자신의 영혼을 건져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내 영혼을’이라는 단어가 (네페쉬)입니다. 원죄의 죄인은 각자의 영혼을 위하여 속전세를 내야 합니다. 속전세를 내지 않으면 영혼이 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마지막 날에는 지옥의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위하여 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믿으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도 각자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이 있습니다. 이단들은 나의 기도로 다른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각자 믿음으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속전을’ (코페르 3724) 몸값, 속전, 역청이라는 뜻이며 (카파르 3722) 덮다, 진정시키다, 화해하다, 속죄하다, 역청으로 위에 칠하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속전을 여호와께 바치라는 것은 죽을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인을 덮어주고 하나님과 화해되어 진노받지 않고 속죄함을 받아 하나님의 분노가 진정된 것을 말합니다. 이 속전은 역청으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시고 역청으로 안과 밖을 바르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창6: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4절 아세 리카 테바트 고페르 키님 타아세 에트 하테바 비카파리타 오타흐 미바이트 우미후츠 바코페르
하나님은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안과 밖에 칠하라고 했습니다. 고페르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합니다. (고페르 1613) 나무의 일종인데 유숙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나무도 있었지만 고페르 나무만을 지정했습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가면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구원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와 역청을 바르라고 한 것처럼 피를 바를 때에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아를 위해서 방주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속전세를 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내라고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질병에 걸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질병이’ (네게프 5063) 타격, 재앙이라는 뜻이며 (나가프 5062) 치다, 때리다, 강타하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고 속전세를 내라고 했습니다. 육체에 질병의 타격을 받으면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됩니다. 우리의 속 사람인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죄에 강타당하면 결국 고통스럽게 살다가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져 둘째 사망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원죄로 인하여 속 사람이 타격을 입지 않고 재앙을 받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속전세를 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하면 결국 심판받게 됩니다.
이것을 어기고 자신의 행위로 원죄의 죄를 해결해 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원죄에 계속해서 속사람이 타격을 받아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자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속사람이 재앙을 받아 죽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의 말을 들으면 결국 나도 죽게 됩니다. 나는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선포하는 복음을 통해서 나의 속사람이 살아나 원죄의 질병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출30:13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13절 제 이티누 콜 하오베르 알 하피키딤 마하치트 하세켈 비세켈 하코데쉬 에시림 게라 하세켈 마하치트 하세켈 티루마 라아도나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계수하여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내라고 합니다. 한 세겔은 이십게라이며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소의 세겔로 드리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에 나오는 세겔의 단위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왕실에서 쓰는 세겔과, 성소 세겔과, 일반 세겔이 있습니다. 일반 세겔의 중량은 약 114g이나 성소의 세겔은 이보다 가벼운 9.7g 정도입니다. 그리고 왕실 세겔은 대개 일반 세겔의 두 배 무게입니다. 하나님은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도 속전세를 내야 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돈이 없어서 속전세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없어야 함을 말합니다.
구원은 돈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을 믿으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기 때문에 누구든지 속전세를 낼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성소 세겔을 내라고 하셨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만이 구원을 받게 했습니다. 왕의 세겔이나 일반 세겔로 속전세를 바치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의를 나타내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성소 세겔보다 더 많이 드렸는데 왜 속전이 안 되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의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속전이 안 됩니다.
출30:14 계수 중에 드는 모든 자 곧 스무 살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14절 콜 하오베르 알 하피키딤 미벤 에시림 샤나 바마일라 이텐 티루마트 아도나이
하나님은 계수 중에 드는 모든 자 중에 스무 살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럼 스무 살 이상 된 자만 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스무 살 이상이 되었다는 것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구원의 확신이 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에 확신을 얻은 자는 속전세를 내야 합니다. 교회에 들어왔다고 해서 모두가 속전세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고 구원의 확신이 없이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자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시민권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스무 살이 될 때에 이스라엘 자손으로서 시민권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속전세를 내게 됨으로 천국 시민권을 갖게 됩니다. 또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탄과 맞서 싸우는 군사가 됩니다.
고후13:5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5절 헤아우투스 페이라제테 에이 에스테 엔 테 피스테이 헤아우투스 도키마제테 에 우크 에피기노스케테 헤아우투스 호티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엔 휘민 에스틴 에이 메 티 아도키모이 에스테
스무 살 이상 된 사람은 속전세를 냈는데 영적으로 보면 믿음 안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전세를 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확실히 알고 깨달은 자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내가 교회에 들어왔지만 아직도 속전세를 내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예수님이 내 안에 있는가 없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출30:15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15절 헤아쉬리 로 야르베 비하달 로 야미이트 미마하치트 하샤켈 라테트 에트 티루마트 아도나이 리카페르 알 나피쇼테켐
하나님은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해서 여호와께 속전세를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속전세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빈부격차를 따지지 않습니다. 출신성분을 따지지도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 대속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을 믿는 것을 보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믿음은 동일합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8절 호스페르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우크 엘덴 디아코네데나이 알라 디아코네사이 카이 두나이 텐 프쉬켄 아우투 뤼트론 안티 폴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왔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속전의 대속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대속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속전세를 내면 됩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스무 살 이상 된 자는 속전세만 내면 됩니다. 현재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속전세를 내고 있습니까? 천국의 시민권자라면 우리는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계속해서 속전세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속전세는 구약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17: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4절 엘돈톤 데 아우톤 에이스 카페르나움 프로셀돈 호이 타 디드라크마 람바논테스 토 페트로 카이 에이판 호 디다스칼로스 휘몬 우 텔레이 타 디드라크마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에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하는 말이 너의 선생은 왜 반 세겔을 내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속전세를 받는 자들이 예수님께 속전세를 내지 않느냐고 말했을까요?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에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카페르나움 2564) 가버나움이라는 뜻이며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는 (코페르 3724) 속전, 몸값, 마을이라는 단어와 (나훔 5151) 위로자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가버나움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받은 자를 위해서 몸값을 지불하고 속전해 주실 것을 나타내는 도시입니다. 속전세를 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위로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원죄에서 속죄를 받았을 때에 위로를 받고 평강이 오게 됩니다. 속죄의 평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속전세를 여호와 앞에 내주셨습니다. 나는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출30:16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
16절 비라카히타 에트 케세프 하키피림 메에트 베네 이스라엘 비나타타 오토 알 아보다트 오헬 모에드 비하야 리베네 이스라엘 리지카론 리피네 아도나이 리카페르 알 나피쇼테켐
이스라엘 자손들이 낸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념이 되어 너희의 생명을 대속한다고 했습니다.
‘기념이’ (지크론 2146) 기념(물), 생각나게 하는 것, 기억, 회상이라는 뜻이며 이 단어는 (자카르 2142) 기억하다, 상기하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 앞에서 생명이 대속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기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념은 속전세를 낸 사람들을 기억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세를 낸 사람들은 하나님이 한 명 한 명 기억하여 생각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추억이 담긴 물건을 보면 그때의 일이 생각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대속된 것을 확신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은 나의 행위가 아닙니다. 내가 거룩하게 살았다고 해서 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주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믿고 주님이 나의 대속물이 되어 속전세를 내주었다는 것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나는 원죄의 죄인입니다. 죄인이 여호와 하나님께 기억되는 방법은 단 하나 속전세를 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이스라엘 백성이 스무 살 이상이 되었을 때에 속전세를 낸 것처럼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시민권을 취득했으니 이제는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무 살 이상은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하여 전쟁에 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천국을 지키기 위하여 사탄의 무리와 싸우는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나라가 위험에 빠졌는데도 싸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 나라의 사람이 아닙니다. 복음이 무너지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복음의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율법주의자들과 싸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세 만을 내는 크리스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20장 설교말씀] 토단과 돌로 만든 제단의 영적 의미(출 20: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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