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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히브리어 설교말씀] 공의로운 하나님 여호와 치두케누(렘 23:6)

르호봇 2021. 11. 1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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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입니다. 오늘은 여호와의 이름 중에서 여호아 치두케누라는 공의로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공의로운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공의롭게 되기를 여호와 하나님은 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판단은 불공평하지만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공의로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도 공의로운 하나님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 여호와 치두케누(렘 23:6)

 

하나님의 관심사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습니다. 세상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백성들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모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영광을 받을 때에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밖에 나가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내 자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그와 같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왕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만 섬기는 왕들이 나타나 하나님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우상의 신랑을 섬겼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패악만 저지르다가 이들은 나라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럼 남 유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북이스라엘의 상황을 똑같이 모방하면서 살게 됩니다. 하지만 남 유다는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와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악한 왕들이 나오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백성들은 세상의 왕들을 의지하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타락한 남 유다를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라는 단어는 (이르므야 3414) 예레미야이며, (아도나이 3068) 여호와라는 뜻과 (7311) 교만하다, 높아지다, 자랑하다, 양육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예레미야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를 향해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선택하여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이며 베냐민 지파의 안에 있는 아나돗에서 출생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요시야 왕 13년 때부터 40년간 하나님의 사역을 하게 됩니다. 이때에 요시야,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때까지 사역을 하며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포위되어 멸망당하게 되는 것을 목격하는 사람입니다. 사역 내내 고통스럽게 사역하게 됨으로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택하여 남 유다에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레미야의 이름을 통해서 영적으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남 유다는 하나님께서 교만하지 말라고 북이스라엘과 나누셨던 것입니다. 따로 구분하여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왕들이 나올 때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의를 주장하면서 자랑하고 자신을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선한 왕이 나오면 우상을 파괴하고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선한 왕인 요시야가 죽은 후로 남 유다는 급격하게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남 유다가 멸망당하는 B.C. 586년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고 우상을 섬기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인 두루마리를 면도칼로 잘라서 화로에 던졌던 여호야김 왕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에 결국 나라는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강단에는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고 인본주의 사상들이 강단을 채우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고 하는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자신의 행위를 높이고 교만해져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과 교회가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실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바로 예레미야 때의 시대가 아닌지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죄에서 해방시켜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원죄에서 해방시켜주셨는데 이렇게 영육으로 양육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잊어버리고 세상의 우상을 따라가는 이 시대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같은 복음의 선지자를 선택하여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를 인본주의의 말씀으로 선포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마음은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주장하여 율법을 강요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부인하게 만들고 또한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는 이런 교회의 강단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높이고 겸손하게 주님만을 따르는 거룩한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느부갓네살 왕과 같은 세상의 세력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거룩한 신부를 구별하기 위해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타락한 남 유다를 향해 앞으로 오실 공의의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 유다의 왕들에게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복음을 버리고 자신의 행위에 치우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들은 남 유다의 왕들을 놔둘 수가 없습니다. 심판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남 유다에 남은 거룩한 하나님의 복음의 신부들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현재의 상태로는 절대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왕들이 우상을 따르고 백성들마저도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 미혹되어 따라가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현재의 상황과 똑같을지 모릅니다. 지금 나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버리고 자신의 사리사욕에 빠져 있는 나라의 왕들과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을 향해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 힌네 야밈 바임 니임 아도나이 바하키모티 리다비드 체마흐 차디크 우말라크 멜렉크 비히시킬 비아사 미쉬파트 우치다카 바아레츠

렘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며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고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 유다에 소망도 없이 사는 자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현재 남 유다는 세상이 공의롭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소견대로 판단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악한 행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은 복음의 말씀대로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들도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니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영광을 높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고 세상의 정욕에 빠져 돈이 우상이 되어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된다는 이런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허락하셔서 공의가 넘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던 남 유다에 다윗의 후손으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의로운’이라는 단어는 (차디크 6662) 의로운, 공정한, 올바른, 이며 (차다크 6663) 정결하다, 의롭다, 의롭게 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현재 남 유다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별로 없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복음을 전파해도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때에 예레미야는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가지를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함부로 생각하지 않고 의롭고 공정한 분으로서 아무 죄가 없는 정결한 분이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선택받은 백성들을 정결케 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분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원죄가 없습니다.

5절 카이 오이다테 호티 에케이노스 에파네로데 히나 타스 하마르티아스 헤몬 아레 카이 하마르티아 엔 아우토 우크 에스틴

6절 파스 호 엔 아우토 메논 우크 하마르타네이 파스 호 하마르타논 우크 헤오라켄 아우톤 우데 에그노켄 아우톤

요일3:5-6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의로운 분으로서 우리 죄를 없애려고 이 땅에 나타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시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선택받은 자들은 범죄 하지 않으며 범죄 하는 자들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나타나신 것을’이라는 단어는 (갈라 1540 VNAMZS 동사, 닢알(수동태),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알게 하다, 듣게 하다, 봉인하지 아니하다, 드러내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셔서 선택받은 자들에게 보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셔서 드러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은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니며 아무나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택받은 자들에게는 봉인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율법주의자들에게는 봉인이 되어 이 봉인을 떼어내려고 해도 절대 떼어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봉인을 해제하여 주시지 않으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 절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로운 가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께서 나타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닢알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동태는 내가 나타나게 해달라고 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에 의하여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며 이것을 인간이 피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자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되며 이렇게 나타난 주님의 십자가 복음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구원받고 나면 자신의 행위에 주관을 받아 구원이 취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주님이 자신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행동에 따라서 구원이 좌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좌우가 됩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시면 됩니다.

 

죄가 없느니라’라는 단어는 (아인 369) 결코 ~않다, 전혀 ~없는, 아무데도 ~없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죄를 찾아보려고 노력을 해도 결코 찾을 수가 없고 예수님은 인간과 전혀 다르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죄와는 상관없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느 곳에 계시든지 죄를 지금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받은 백성들은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원죄와 자 범죄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은 범죄 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보지 못했고 복음을 가르쳐 주어도 복음을 전혀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아무나 이렇게 깨달아지고 보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으킬 것이라’라는 단어는 (6965 CW.VHACXS 와우접속사, 동사, 히필(사역능동), 완료, 공성, 1인칭, 단수) 일어나다, 확정되다, 정하다, 성취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남 유다에 공의롭지 못한 왕들을 보면서 앞으로 공의로우신 왕이 이 땅에 오실 것이 확실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시기로 확정을 하셨습니다. 남 유다에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미리 메시아를 보내시기로 마음에 확정하셨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다가 때가 되매 즉시 이 땅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와우접속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계획은 인간의 주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준비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켜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계속해서 우리들에게도 말씀이 함께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히필 사역능동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9절 호스 데 에텔레산 하판타 타 페리 아우투 게그람메나 카델론테스 아포 투 크쉴루 에데칸 에이스 므네메이온

30절 호 데 데오스 에게이렌 아우톤 에크 네크론

행13:29-30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기록한 말씀을 모두 응하게 한 것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장사 지냈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주님을 살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를 살리신지라’라는 단어는 (6965 VHAMZS.MZS 동사, 히필(사역능동),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남성, 3인칭, 단수)로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말씀대로 성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죽으신 후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여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남 유다의 선택받은 자들을 위하여 부활의 소망을 주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들도 이 땅에서 남 유다의 상황과 환경에 노출되어 아무런 소망이 없이 세상의 악한 것들만 보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고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신 후에 부활의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예수님을 부활시켜 주시고 세워주셨습니다. 히필 사역능동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다시 죽으시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시켜주셨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부활되지만 우리들은 생명의 부활로 부활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활된 우리들은 반드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6절 비야민 티바샤 이후다 비이스라엘 이쉬콘 라베타흐 비제 쉐모 아셰르 이키리오 아도나이 치디케누

렘23:6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유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도 평안을 얻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의 날은 언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날입니다. 이 날에는 선택받은 모든 자들의 원죄가 사라지게 됩니다. 원죄에 빠졌던 자들의 죄를 모두 예수님께서 단 번에 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겠고’라는 단어는 (야샤 3467 VNIFZS 동사, 닢알(수동태), 미완료, 여성, 3인칭, 단수) 해방하다, 석방하다, 건져내다, 보복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면 모든 원죄에서 고통당하고 있던 자들을 해방시켜 주시고 사탄은 선택받은 자들을 석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탄의 머리를 박살 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나의 고엘이 되어주셔서 지금까지 사탄이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모든 것들을 복수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원죄에서 해방된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며 나의 힘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이며 주님의 힘입니다. 그 이유가 닢알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원죄에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지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동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으로 내가 원죄에서 해방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번 해방된 백성들은 다시 원죄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자가 다시 구원이 취소되어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들은 온전하게 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라는 단어는 (예호와 치드케누 3072) hwhy(아도나이 3068) 여호와, 라는 뜻과 (체데크 6664) 공의, 공정, 의로움, 이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우리의 의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의 의가 됩니다.

31절 디오티 에스테센 헤메란 엔 헤 멜레이 크리네인 텐 오이쿠메넨 엔 디카이오쉬네 엔 안드리 호 호리센 피스틴 파라스콘 파신 아나스테사스 아우톤 에크 네크론

행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바울은 아덴에서 전도하면서 이성에 빠진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이성과 지식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의 뜻에 합당하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폐기해버리는 자들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아덴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의 지식과 이성에 빠져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과감하게 예수님과 부활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에 정하신 사람을 통해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다시 살리셔서 이 땅을 재림의 날에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셨다고 했는데 공의라는 단어가 (체데크)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심판하시는데 인간의 생각으로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공정하고 의롭게 심판하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공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원죄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전혀 의롭지 못했던 인생인데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주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해주시고 마지막 날에 의로우신 재판장이 오실 때에 나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시게 됩니다.

8절 로이폰 아포오케이타이 모이 호 테스 디카이오쉬네스 스테파노스 혼 아포도세이 모이 호 퀴리오스 엔 에케이네 테 헤메라 호 디카이오스 크리테스 우 모논 데 에모이 알라 카이 파신 토이스 에가페코시 텐 에피파네이안 아우투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의롭게 되었고 구원을 받아 자신의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로우신 재판장이 마지막 날에 자신에게 주시지만 자신뿐만 아니라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주신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지금까지 여호와는 나의 의가 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의가 되어주신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원죄 가운데 전혀 의롭게 살지 못한 인생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의로운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의와 하나님이 생각하는 의는 다릅니다. 인간은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구제 잘하고 선행을 베풀면 이것이 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이것이 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세상에서 구제도하고 선행을 베풀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도 받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행으로 의롭게 되려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진노받을 행위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믿음으로 고백하고 하늘로부터 거듭난 후에 이 땅에서 열심히 주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고 선행하시고 말씀대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히브리어 설교말씀] 여호와를 앙망하는 성도의 삶(사 40:27-31)

 

[이사야 히브리어 설교말씀] 여호와를 앙망하는 성도의 삶(사 40:27-31)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새 힘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여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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