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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 히브리어 설교] “다윗의 고백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 23:1-6)

르호봇 2021. 5. 2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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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시편 23편 히브리어 설교 중에서 다윗의 고백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어 주시면 자신은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셔서 양이 쉼을 얻듯이 자신도 양처럼 쉼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은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는 주님의 양이 되어 인생을 살아가는데 목자 되시는 예수님이 나의 인생의 길을 인도하여 주셔서 어렵고 힘들 때마다 지켜 주십니다. 원수가 나타날 때는 목자 되시는 예수님이 처단하여 주시고 목마를 때는 물가로 인도하여 주시고 배가 고플 때는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나의 영혼을 주님이 붙잡아 주셔서 천국까지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목자 되시는 주님을 따라가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항상 나를 좋은 꼴로 인도하여 주셔서 영혼을 살찌게 하십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고백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 23:1-6)

 

시편 23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대표적인 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친숙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깊은 영적인 진리의 보화가 숨어 있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보통 고대근동에서는 양을 치는 목동들은 막내들이 많이 양을 쳤습니다. 형들은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고 막내들은 양들을 치게 된 것입니다. 다윗도 막내였기 때문에 광야에 나가 양을 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양을 치면서 양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목자가 되어 양을 치게 되는데 광야에는 양들이 먹을 꼴을 준비하기 위하여 목자가 고민하게 됩니다. 광야의 기후는 건기와 우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건기 때에는 비가 전혀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기 때 비가 내려 자라난 풀들이 건기 때가 되면 모두 말라 버리게 됩니다. 이런 풀들을 양들이 뜯어먹게 되는 것입니다. 목자는 이런 풀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광야는 마실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물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고민을 다윗이 하게 됩니다. 양들은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고민 속에서 다윗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양들과 같은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고민할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들을 위해 고민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고 있다면 모든 고민은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가 인도하는 데로 가면 됩니다. 고민은 목자가 하는 것이지 양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이 고민할 때가 언제입니까? 목자를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그때는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와 함께 있다면 이제부터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영적으로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목자가 되시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시편 23편의 말씀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영적진리가 무엇입니까? 한 구절 한 구절 깊이 있게 풀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목자가 되어주시면 인생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절 미제모르 레다비드 로이 로 에흐사르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다윗만의 고백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할 찬송인 것입니다.

내가 부족함이’라는 단어는 (하쎄르 2637 VQICXS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 모자라다, 핍절하다, 줄어들다, 주리다, 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시면 나의 인생에 부족한 것이 없으며 어떠한 것도 모자라지 않고 곤핍하여 굶지 않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 다윗이 이와 같이 자신의 양 떼들을 돌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굶을지언정 자신의 양 떼들은 절대 굶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낮에는 뜨거운 광야에서 돌보고 밤에는 추위에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절대 계속해서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나의 인생 가운데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내가 참고 넘쳐서 썩어 없어질 그런 부족함이 없이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도 없는 것을 주는 것은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부족한 것입니다. 내가 꼭 필요한 물건을 받았을 때에 이것이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적재적소에 필요할 때에 상황에 따라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당장 내가 쓸 현물이 없다면 이것은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많은 재산은 없지만 현재 내가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서 원하는 것을 샀다면 이것이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니 욕심을 부리고 필요도 없는 많은 것을 소유했다고 해서 복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족함을 누가 채워주시는 것입니까? 바로 여호와 나의 하나님의 직접 채워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채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리고 사람이 채우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가면 사람들은 포기하게 됩니다. 도와주는 것도 정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미완료를 사용하여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바로 나를 도와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는 신앙만이 부족함이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없으리로다’라는 단어는 (3808)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로라고 하는 단어는 부정 부사로서 강한 부정을 사용할 때 씁니다. 절대 부족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언제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사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영원히 부족함이 없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정 부사는 영원히 함께 하셔서 인생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영적으로도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히브리 상형의 의미를 통하여 풀어보고자 합니다.

 

חסר(하쎄르)의 상형적 의미는 ח(헤트)는 울타리라는 상형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생명, 판별의 장벽, , 잘못, 이라는 상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ס(싸메크)는 버팀목, 지주대, 라는 상형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친교, 상호주의 측정, 진리를 세우고 지탱하는 역할,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ר(레이쉬)는 머리, 라는 상형에서 온 글자입니다. 그래서 잉태, 시작하기, 창조하기, 가난함, 비참함, 파괴, 폐허,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생각하여 본다면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언제 부족한 삶을 살아가는가? 라는 것이며 하나는 언제 부족해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부족해질 때는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악한 자들과 함께 하여 세상을 버팀목 삼아 살아가며 자신의 의를 높이려고 하는 자들은 인생이 가난하게 되고 비참하게 되어 영원히 파괴되고 폐허가 되는 삶을 살게 됨으로 하나님 앞에서 항상 부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저울에 달렸을 때에 항상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25절 우데나 케타바 디 레쉼 메네 메네 테켈 우파르신

5:25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여기에서의 다니엘서는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의 왕 벨사살 왕이 하나님의 저울에 달렸을 때에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하게 되니 하나님은 벨사살 왕을 죽이시고 결국 나라는 고레스 왕에게 넘겨주시고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부족하지 않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지성의 분별력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팀목으로 삼고 의지하여 주님과 친교 하면서 상호 교환적인 관계를 가지고 진리를 높이고 세우며 하늘로부터 새롭게 태어나 주님과 함께 시작하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구원받고 주님을 섬기니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어떠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았더니 부족한 인생들입니까? 육적으로도 부족하고 영적으로도 부족한 자들입니까? 이런 자들은 누구와 하나가 된 사람들입니까? 세상과 하나가 된 사람들이요, 우상과 하나가 된 사람들이요, 욕심에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심령이 부자인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생 자체가 부족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지 못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들은 부족함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주님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부족하다면 영적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저울에 달렸을 때에 부족하지 않는 것은 주님과 항상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여 영원히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도 여호와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주셔서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목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명예와 권력이 목자가 되어준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나의 영혼을 책임지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목자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나를 책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먹을 양식과 마음의 평안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2절 비네오트 데세 야르비체니 알 메 메누호트 예나할레니

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먼저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주시니 더 이상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을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윗이 어떻게 깨달았습니까? 자신이 현재 양 떼들을 이렇게 돌보고 있기 때문에 깨달은 것입니다.

 

풀밭에’라는 단어는 (나아 4999) 초장, 처소, 거처,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נאה(나아 4998) 합당하다, 아름답다, 어울리다, 알맞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럼 푸른 풀밭이 양 떼들에게는 어디입니까?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많은 양 떼들과 마음을 터놓고 먹을 수 있는 곳이며 다른 늑대들과 사자나 맹수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알맞은 공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여 주시는 푸른 풀밭은 어디입니까? 이 세상에서 교회를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많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꼴을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많은 성도들과 어울리며 아름답게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은혜를 나누며 서로 감사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거처를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서는 나의 직장이 이런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쉼이 없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직장에서 동료들과 서로 싸우면서 눈치 보고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인생을 살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하셔서 알맞은 직장을 나에게 맞는 곳으로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풀밭에 누이시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풀밭을 통하여 히브리적 개념의 의미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נ()은 물고기, 라는 상형에서 왔습니다. 구원, 탈출, 생명, 씨앗,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א(알레프)는 황소, 라는 상형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배움, , 지도자, 가르치다, 진리,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ה()는 숨구멍, 이라는 상형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호흡, 계시하다, 예배 자, 기도,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푸른 풀밭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악에서 탈출되어 구원을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생명의 씨앗을 많은 사람들에게 배워서 가르치고 힘의 권능 자이신 하나님을 깨닫게 하여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게 되고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되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세상 적으로 많은 돈을 받고 돈을 많이 벌면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대기업을 다니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곳이기 때문에 좋은 풀밭과 같은 장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푸른 풀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직장을 통하여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호흡을 할 수 있는 곳이 좋은 직장입니다. 직장을 통하여 내가 영적으로 살아나는 곳이 좋은 직장입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는 않지만 직장에서 예배를 드리고 시작하는 곳이 있다면 이곳이 푸른 풀밭입니다. 이곳에서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가도 직장을 바꾸어 들어갔는데 주님과 호흡이 끊어지는 곳으로 들어갔다면 이것은 푸른 풀밭이 아니라 저주의 밭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떨어질 것이고 영적으로 주님과의 호흡이 끊어지기 때문에 얼마 가지 못해서 반드시 지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셔서 이 풀밭에 누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누이시며’라는 단어는 (라바츠 7257 VHIMZS 동사 히필(사역능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눕다, 누워있다, 라는 뜻입니다. 양들의 습성이 마음이 평안하지 않거나 두려움이 있으면 절대 자신의 몸을 눕지 못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푸른 풀밭에 누이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모든 마음이 평안해졌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인생의 고민이 생기면 편안하게 눕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잠도 오지 않고 밤새 고민하다가 새벽에 뜬 눈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2절 솨베 라켐 마쉐키메 쿰 메아하레 쉐베트 오켈레 레헴 하아차빔 켄 이텐 리디도 셰나

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우리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고 수고의 떡을 먹어도 이것은 헛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먹고 마시고 눕는 것은 헛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을 재우지 않으면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양 떼들을 풀밭에 편안하게 눕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누이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양의 힘으로 풀밭에 눕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눕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고백하고 있듯이 여호와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주시니 아무 근심 걱정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은 풀밭에 눕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히필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평안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저와 여러분들의 풀밭은 어디입니까? 아무리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이 불편하고 상사와의 관계가 힘들고 있다면 풀밭에 누워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 들어갔을 때에 아내나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 매일같이 싸우고 있다면 이것은 풀밭에 누워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생활을 할 때에 교회의 식구들과 불편해하고 있고 목자와 불편해 하고 있다면 이것은 누워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을 직접 하나님께서 인도해 나가셔서 마음에 평안함을 주시고 사람들과 관계 개선을 이루어 나가시겠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의 문제를 개선해 주시고 가정의 문제를 풀어주시고 교회의 생활을 완만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풀밭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는 곳이 푸른 풀밭입니다. 현재 내가 은혜받고 있는 이 장소가 푸른 풀밭입니다. 이곳에서 많은 은혜의 꼴을 뜯어먹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쉴만한’이라는 단어는 (메누하 4496) 위로, 평안한 곳, 안식,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푸른 풀밭만이 아니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광야는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광야에서 어디로 가면 물이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뜨거운 태양 아래 있는 양 떼들을 모아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쉴만한 물가가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안식처입니다. 마음에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영적으로 평안함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쉴만한 물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와야 합니다. 신약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고 있습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평안은 눈에 보이는 것이 많으면 평안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구원의 안식의 평안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쉴만한 물가로 항상 인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물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바로 십자가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정신없이 살다 보면 뜨거운 광야에서 목마름과 같이 목이 탈 때가 있습니다. 이때마다 주님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는 것입니다.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단어는 (나할 5095 VPIMZS 동사 피엘(강조능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제공하다, 인도하다, 유지하다, 보호하다, 지도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영원한 안식처를 제공해주시고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유지하게 하시면서 뜨거운 광야와 같은 곳에서 죽지 않도록 물을 제공하여 보호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피엘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미완료는 계속해서 목마를 때마다 인도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을 가만히 바라보면 광야에서 살아가는 양 떼들과 같습니다. 양 떼들은 자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목자의 손길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양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의 보호와 손길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먹을 양식을 공급해 주시고 좋은 영적인 꼴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 주셔서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보호받을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항상 말씀으로 지도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쉴만한 안식처의 물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내가 가기 싫다고 해도 꼭 갈 수밖에 없도록 인도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양이 힘이 빠져 탈진 상태가 되어 도저히 걸어갈 힘이 없어서 못 가면 목자가 직접 양을 등에 업고 서라도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피엘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잠시 한눈을 팔다가 세상에서 안식처를 잃어버려 방황하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절대 잊지 않으시고 나를 찾아오셔서 생명의 안식처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생활을 하다가 시험에 걸려 넘어져서 세상으로 떨어져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방황하면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직접 나에게 주님을 보내주셔서 바로 영원한 안식처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오기 싫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강제적으로 나를 인도하셔서 물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며 물을 먹을 힘이 없으면 먹을 수 있도록 물을 떠서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인도하셔서 내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님의 은혜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내가 시험에 걸려 있으면 누구 하나 관심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계속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으며 주님의 자녀로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영원한 안식처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도 바로 나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은 육신의 것뿐만 아니라 영혼을 소생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절 나페쉬 예쇼베브 야네헤니 베마에겔레 체데크 레마안 쉐모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럼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소생시키시고’라는 단어는 (슈브 7725 VPIMZS 동사 피엘(강조능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돌아오다, 떠나다, 돌이키다, 옮기다, 소생시키다, 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혼을 소생시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회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나의 영혼을 소생시킨다는 것은 회개의 역사를 통하여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살려주신 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킨다는 것은 바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려주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악에서 떠나서 다시는 죄로 돌아가지 않고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전에는 죽음에 자리에 있었고 저주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영원한 저주의 자리에서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죽었던 영혼이 소생하여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래의 자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소생시켜 주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을 어떻게 소생시켜 주신 것입니까? 나는 죽어있었기 때문에 나의 힘으로는 절대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외부의 힘이 없이는 절대 살아날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병원에서 숨이 끊어진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인공호흡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기 쇼크를 심장에 가하여 다시 숨을 쉬게 만들어 줍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완전히 소생할 수 없는 자들을 외부의 하나님의 기적 같은 호흡으로 강력하게 역하여 살렸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 살렸으면 다시는 죽지 않는다는 것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피엘형과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살아났다면 다시는 죄악의 길로 떨어져 영원한 저주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는데 어떻게 영원한 심판의 자리로 돌아가서 죽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주신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내 마음대로 살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단어는 (나하 5148 VHIMZS 동사 히필(사역능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인도하다, 이끌다, 사로잡히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데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인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위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주님께 붙잡힌바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나의 인생을 내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데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나는 하나님께 붙잡힌바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생각과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구원받은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데 이것이 계속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따라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도의 견인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하나님께 붙잡힌바 된 사람들은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싶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저주는 무관심입니다. 무관심 자체가 바로 저주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무관심하게 두지 않으시고 관심 있게 보시면서 잘못하면 올바른 길로 가라고 코치를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차량이 너무나 좋아져서 졸음 음전을 하다가 차선이탈을 하면 경고음이 울려서 사고가 나지 않도록 방지해 주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경고를 울리시겠습니까? 잘못하면 인생의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큰 재앙을 당하기 전에 미리 방지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입니다.

 

넷째, 주님의 보호하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4절 감 키 엘레크 베게 찰마베트 로 이라 라 키 아타 임마디 쉬베트카 우미쉐아네테카 헴마 예나하무니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님이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골짜기’라는 단어는 (가예 1516) 골짜기,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גוה(게바 1466) 높아짐, 오만, 교만, 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이스라엘 땅의 광야에서 절벽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을 말하고 있습니다. 깊은 협곡이며 양들이 이곳에 떨어지면 절대 살아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목자가 지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나가 살다 보면 이런 흑암의 골짜기에 돌아다니게 됩니다. 많은 교만과 오만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상사에 의하여 교만한 자들 때문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상사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되고 교회 다닌다는 것 때문에 왕 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교만한 율법주의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 영혼을 죽이는 사망의 음침한 그늘들입니다. 이런 곳에서 주님은 나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망의 음침한 권세 자들 앞에서 건져내셔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흑암의 율법주의자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복음으로 돌아섰습니다.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문화적 배경을 통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고대 근동의 목자들은 항상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막대기로는 적을 물리치고 지팡이로는 양을 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면 양들은 열심히 풀을 뜯어먹으면서 한가롭게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이때에 목자는 자신의 지팡이를 한 곳에 막대기는 반대편 쪽에 두어 양들이 아무리 넓은 푸른 초장이 있다 하더라도 경계를 지어주게 됩니다. 이 경계를 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경계 밖에는 이리와 늑대들이 양들을 호심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양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경계 안에 있기 때문에 목자가 계속해서 예의 주시하면서 양들을 보살피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는 단어는 (나함 5162 VPIMZP 동사 피엘(강조능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 한탄하다, 후회하다, 변개하다, 위로하다, 긍휼히 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안위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고 더 이상 한탄하시거나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노아 시대에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후회하며 한탄했던 일을 말씀하실 때 사용하던 단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한 번 구원받은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마음을 변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지팡이로 막대기로 보호하여 주셔서 위로하시고 적들로부터 두려움이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해 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구원을 얻고도 잠시 시험에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양이 항상 건강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병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병들었다고 목자가 양을 죽이거나 내다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병들은 양을 더 보살피고 신경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내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잠시 영적인 병에 들어 신앙의 열정이 떨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 주님은 더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 불쌍히 여기시고 위로하시며 또한 왜 이 자녀를 구원시켰느냐고 후회하시지 않으며 한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스스로 한탄하거나 후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위로하고 있습니까? 내가 위로받을 수 없는 중에 위로해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셔서 마음에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여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시험에 걸려 넘어져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고 떠난 것처럼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나에게 찾아오셔서 절대 너를 버리지 않았다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피엘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함께 하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내가 작은 죄악의 잘못에도 구원하신 것을 후회하시거나 한탄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5절 타아로크 레파나이 슐한 네게드 초르라이 디샤네타 바쎄멘 로쉬 코시 레바야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머리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잔이 넘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을’이라는 단어는 (슐한 7979) 식탁, 식사,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שלח(샬라흐 7971) 베풀다, 보내다, 넘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상이라는 단어는 성막에서 떡 상을 나타낼 때에도 쓰는 단어입니다.

23절 베아시타 슐한 아체 쉬팀 아마타임 오르코 베암마 로흐보 베암마 바헤치 코마토

25:23 너는 조각목으로 상을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조각목으로 떡 상을 만들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떡이신 주님의 살을 먹을 수 있도록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원수의 목전에서 이렇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들은 주님을 죽이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조롱했습니다. 이런 율법주의자들 앞에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멋들어진 십자가 복음의 상을 베풀어 주시고 보내주셔서 은혜가 넘치도록 상을 차려주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떡을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절대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주의자들의 원수 앞에서 하나님은 맛있는 영적인 꼴인 십자가 복음을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다음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시는 것입니다.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기름은 아무나 바르지 않습니다. 왕에게 기름을 바르고 선지자에게 기름을 바르고 제사장에게 기름을 바르게 됩니다.

부으셨으니’라는 단어는 (다셴 1878 VPAMYS 동사 피엘(강조능동) 완료 남성 2인칭 단수) 살찌다, 윤택하다, 풍족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을 머리에 부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의 역사가 나에게 임하여 영혼이 살이 찌게 되고 삶이 윤택하여지며 인생이 풍족해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벧전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름부음을 받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삶이 윤택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돈을 많이 벌어서 윤택해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육적으로 평안함을 누리면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인생을 사니 어디에 있든지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주시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흡족하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내주심으로 더 이상 기름을 붓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부어주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로 너희들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피엘형 완료 시제 2인칭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삶의 자체가 평강이며 안식이며 풍성한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의 잔이 차고 넘치게 되고 풍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차고 넘쳤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섯째,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6절 아크 토브 바헤세드 이르데푸니 콜 예메 하야이 베샤브티 베베이트 아도나이 레오레크 야밈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우리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천국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르리니’라는 단어는 (라다프 7291 VQIMZP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 추적하다, 뒤쫓다, 쫓아오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계속해서 뒤쫓아 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로켓이 어떤 목표물을 떨어뜨리기 위하여 쫓아가는 것처럼 따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절대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나를 따라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나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끝까지 계속해서 나를 지키시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의 눈앞에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항상 바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원히 살리로다’라는 단어는 (야샤브 3427 VQACXS 동사 칼(능동태) 완료 공성 1인칭 단수) 거주하다, 좌정하다, 동거하다, 머물러 있다,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구원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여호와의 집에 거주하면서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면 우리는 더 이상 방황하는 인생을 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거주하면서 천국에서 머물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바로 구원받은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좌정하여 있는 자들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자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천국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절대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주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삼으면 영원히 천국에서 거주하게 되며 절대 천국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칼형과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주한다는 단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גור(구르 1481) 이 단어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신앙의 정착을 하지 못하고 떠돌이 신앙생활을 한다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이 이런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 때에 끝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이 심령에 정착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생활을 해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잠시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작은 시험에 들어 금방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여도 손님으로 영접하는 신앙입니다. 주님이 심령에 손님으로 오셨으니 언젠가는 주님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ישב(야샤브)로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절대 주님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어떠한 신앙생활을 하시렵니까? ‘야샤브’입니까? 아니면 구르입니까?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 땅에서도 ‘야샤브’하는 믿음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생활에서도 정착하시고 믿음도 정착하시고 직장생활도 정착하시고 가정생활도 정착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구르처럼 나그네의 삶을 살면 인생 자체가 괴롭고 방황하면서 힘이 드는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시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느헤미야 히브리어 설교말씀] “성벽 건축 방해꾼 산발랏과 도비야”(느 4“1-6)

안녕하세요. 오늘은 느헤미야 히브리어 설교말씀 중에서 성벽 건축 방해꾼 산발랏과 도비야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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