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성경적 성교육 중에서 그리스도인과 성윤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성윤리
글쓴이/ 송광택(宋光澤)
사랑의 나라 독서문화센터 대표
들어가는 말
성(性) 문제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성에 대한 논의는 금기(禁忌) 시 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일반 교육은 오랫동안 성교육을 무시하였다. 교회 안에서도 성에 관한 성경적 혹은 기독교적 이해를 위해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의 영향이라고 여겨진다. 1970년대에 와서 청소년들의 성문란이 사회 문제로 등장하자 성교육(性敎育)이 <순결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성 문제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은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닐지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1. 성(性)에 관한 이해
(1) 역사적 배경
수세기 동안 지배적인 신학이론은 인간의 성에 대해 기능적 성격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즉 인간의 성을 출산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였다. 오늘날 성은 인간의 본질적 결정 요소 가운데 하나로 다루어지고 있다. 인간을 전체로서 보는 관점을 통해 성은 재평가되고 그 의미가 새롭게 파악되고 있다.
초대교회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는 그의 작품 <교훈자>에서 성 문제를 다루고 있다(제2권 10장). 그는 출산의 목적을 위해서만 부부관계를 허용한다. 그는 임신 중의 아내와의 성관계를 단념시킨다. 클레멘트에 의하면, 결혼의 결속 안에서도 즐거움이 그 자체만을 위해서 추구되는 것은 죄이며, 법과 이성에 거슬리는 일이다. 성에 관한 그의 기본적 태도는 부정적이다. 루터는 성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로 보았다.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다. 따라서 한 성이 다른 성을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Paul Althaus, The Ethics of Martin Luther,1972, p.83).남성과 여성은 모두 하나님의 선하신 작품(God's good work)이다.
오늘날 에로티시즘은 20세기 말의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어떤 시기에 유럽 문화 가운데 에로티시즘의 물결이 있었다고 한다. 그 물결이 매우 강력한 형태로 1950년대에 다시 나타났다. 그 물결은 줄어들 징조를 보이지 않고 있다. “성은 가장 값싼 일반적 쾌락의 원천이 되어서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수준에 놓이게 되었다”(Otto A.Piper, The Biblical View of Sex and Marriage, p.16).인간의 죄악은 이제 성의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의 영향으로 성문제에 있어서 균형을 잃었다. 우리의 성적 활동은 우리의 전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무제약적인 성관계는 인간의 삶을 공허하게 하고 불만스러운 것이 되게 하며 점점 더 인간을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2) 성에 관한 새로운 이해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성(性)을 주제로 한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성에 관한 많은 지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성문제를 다룬 저서들도 많이 나왔다. 그 책들은 인간의 성문제를 사회심리학적 인간 상호 관계의 차원에서 연구하였다. 공립학교에서의 성교육은 이전보다 더 보편적이다. ’70년대 후반기에 미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에 뿌리내린 성교육 프로그램은 -만일 성공이 행동변화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면- 성공적이지 못했다(G.B.Spanier, Human Sexuality in a Changing Society,1979, p.5).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의 성문제에 대한 보다 공개적이고 책임 있는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남녀평등의 문제도 전면에 부각되었다. 여성운동은 여성에 관한 일반의 생각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서구사회의 경우, 성을 죄악시하거나 필요악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성문제와 관련하여 전통적 이해와 태도가 많이 남아 있다. 이제 우리는 성문제를 금기사항으로 취급할 수 없다. 성이 상품화된 현실 속에서 이를 금기시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나 교사는 어린이들과 학생들에게 성에 관한 많은 질문을 받는다. “그런 것은 묻는 게 아니야”라고 회피하는 것은 옳은 응답이 아니다. 성은 부끄러운 것이나 죄악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임을 가르쳐야 한다.
(3) 성경과 성(性)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인 성(性)은 선하고 신성한 것이다. 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을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의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날 발견되는 성문제의 모순은 타락의 결과이다. 또한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죄 된 의지의 탓으로 여겨진다. 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불과 같다. 성은 귀중하게 생각되고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손상과 파괴를 가져올 것이다. 오토 파이퍼에 의하면,“성은 인간의 전체적 자아 기능의 하나이다... 인간의 성적 활동은 그의 인격 형성을 표현해 주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특별 계시인 성경에서 성과 결혼에서의 거룩함을 요구하신다. 인간의 성(性, sexuality)의 의미는 하나님의 여자 창조의 기사 안에 나타난다(창 2:4-24). 이 본문은 상호관계 속의 남자와 여자의 가치와 중요성을 특별하게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시고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남성의 성적 상대역인 여성을 창조하셨다.
정정숙 교수는 <성교육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성에 대한 성경의 이해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모두 좋았다. 그런 고로 성도 좋은 것이었다. 성은 그 자체로서의 좋은 것 외에도 하나님의 다른 신적 축복인 자녀 생산의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녀를 생산케 하시며, 그 자녀들을 축복의 후계자로 삼으셨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구체적으로 이 땅에서 실현토록 하셨다... 구약은 성이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이것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인간이 가진 성에의 욕망을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 제도 안에서 사용하여야 하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실현시켜야 한다.”
월터 카이저(Walter C.Kaiser)는 <구약성경윤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인간의 성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어떤 두려운 힘이 아니다. 또한 도덕이나 종교 범주 및 관심을 벗어난 세상적인 어떤 충동도 아니다. 도리어 성경은 태초부터 성을 ‘좋다’(선하다)고 하였고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한다.” 피조물에게 첫 번째로 시달된 명령은 인간의 생육에 관한 것이었다(창 1:28). 결혼제도는 이 명령과 밀접하게 연관된 제도이다(창 2:23,24). 결혼은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성경은 이 결혼으로 시작된 관계를 파괴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성에 관한 성경의 견해는 두 가지 근본 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하나는 성의 신비에 관한 경외감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성적 관계에의 목표로서의 결혼을 신성화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성에 관한 기록이 많지만, 성을 표시하는 단일한 어휘는 없다. 성에 관한 성경의 언급은 매우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물론 성관계에 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기 위해 완곡한 우회적 표현을 쓰고 있다.
<아가서>는 이 주제를 상술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전통적으로 아가서 해석의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일반적으로 에표론(typology)의 입장에서 해석하여왔다. 예를 들면, 박윤선 박사의 아가서 주석과 석원태 목사의 아가서 강해가 예표론을 따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아가서의 입장은 순수한 부부간의 사랑까지 반대한 일부 초대 교부들의 입장과는 반대이다. 아가서의 인물들은 참으로 서로에게 연모와 온전한 매력을 느낀다. 아가서는 사랑에 대한 인간의 체험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 아가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육체적 사랑의 기쁨을 찬양하는 일련의 연시(戀詩)로 이루어져 있다. 아가서에는 “두 사람의 성적인 사랑의 체험이 아주 다양하고 서로 다른 관점들로부터 다루어지고 있다”(Brevard S.Childs, 구약신학 참고). 아가서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리키고’ 있고, 그리스도와 교회 간의 사랑을 다소간 상기시키고 있다.
성은 결혼 관계에서는 순결하고 거룩한 것이다. 성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역할 내에서 그 기능을 발휘할 때에는 수치스럽거나 죄악 된 것이 하나도 없다(B.C.Hostetter).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은 <순결>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성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즐겁고, 자연스럽고 생기 있고, 한가롭고, 창조적이며, 연인들이 서로를 위해 창조를 경험함으로써 배운 특별한 환희로 가득 차 있다. 서로에게 완전히 순종한 두 사람이 자신들을 서로 주고받고 찬미하는 창조적 사랑과 표현의 은밀한 작은 세계보다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은 없다. 바로 이 찬미, 감사, 기쁨의 영혼 속에 진정한 순결이 존재한다... 올바르게 이해된 성적 결합은 인간의 깊은 사랑의 표현이며 그 사랑을 깊게 하고 완전하게 하고 신성하게 하는 수단이다”(<존재하는 것과 행하는 것> 중에서).
2. 결혼에 관한 성경적 이해
(1) 성경과 결혼
결혼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다음 구절에 요약되어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 구절은 주님과 사도 바울에 의해 인용되었다(마 19:5, 엡 5:31).
그랜버그(L.I.Granberg)에 의하면,“결혼은 ‘독점적인’ (exclusive) 관계를 지닌다.” ‘한 몸’이란 개념으로 이해되는 두 사람 사이의 육체적, 감정적, 이지적, 영적인 완전한 일치란 일부다처제(polygamy)를 배척한다. 그에 의하면, 결혼에 관한 성경적 입장에 있어서 신약성경이 주로 기여한 내용은 결혼의 불가분설(indissolubility)과 여성의 동등성(equal dignity)에 대한 기본적 원리를 강조했다는 점이다(갈 3:38, 고전 7:4). 결혼은 여자를 남자와 함께 동등한 이격적 존엄성의 위치로 올려놓음으로 진실로 ‘한 몸’이 되는 것이며, 이 표현에 내포되어 있는 연합이란 의미는 두 사람 각자가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가정하고 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엡 5:22,23)은 ‘기능’ 상의 위계질서를 말함이지 존엄성이나 가치에 대한 언급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에 있어서 책임의 순서와 권위를 정하셨는데 이는 창조의 순서에 따른 것이었다.
(2) 기독교 윤리와 결혼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회적 제도요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선물이다. 결혼의 목적은 인간의 사회성을 충족시키려는 것이었다. 아담에게는 인간 동반자가 필요했다. 사람의 독처함과 고독이 좋지 못한 상태로 선언되었다(창 2:18). 사람은 본래 사회적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적합한 돕는 자’ 혹은 ‘그의 곁에 있는 돕는 자’를 창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심으로써 결혼과 부부사랑을 축하하셨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결혼에 관한 성례전적 해석을 거절하였다. 루터 자신은 1525년 6월 13일, 비텐베르크 교구 목사의 주례로 그의 집에서 결혼식을 가졌다. 이것은 그의 결혼관과 일치되는 행동이었다(H.Thielicke, The Ethics of Sex, p.135).
칼빈(Calvin)도 결혼이 성사가 아니라고 말했다. 칼빈에 의하면,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하고 거룩한 규정이다. “남편은 처를 , 처는 남편을 신중히 대하여, 혼인의 존귀성과 절제 성에 합당하지 않은 일은 일체 허용되지 말아야 한다”(기독교강요 II,8,44).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D.Bonhoeffer)에 의하면,“인간의 결혼은 인간 사회의 어떤 다른 결합이 형성되기 전부터 존재한다. 결혼은 이미 첫 인간의 창조와 더불어 주어졌다. 결혼의 권리는 인류의 시초로부터 주어졌다.”(기독교 윤리, 149쪽).
에밀 브룬너에 의하면, 결혼이 사랑으로부터 솟아 나오지만 그 안정성은 사랑이 아니라 충실함(신실함)에 근거하고 있다. 결혼은 충실함의 계약이다. 결혼의 전체적 기초와 본질은 상호 간에 그들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요, 서로에게 끝까지 신실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이 ‘충실함의 계약’ 안에서 성욕과 육체적 관계는 결혼 밖에서의 그러한 것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가톨릭 교회에 의하면,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으로서 일부일처주의이며 정당한 결혼은 불가 해소성을 갖는다. 영세한 신자들 간의 결혼은 성사이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전통적 결혼관이다(사목, 32호, 4-5쪽).
창세기 2:21-24은 처음 두 인간의 창조를 말해주며, 동시에 일부일처 혼이 하나님의 뜻임을 나타낸다. 사실 아담에서 셋 계보의 노아까지의 모든 조상은 일부일처 혼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일부다처 혼은 타락한 가인 계보에서 최초로 나타난다(창 4:19). 일부다처 혼이 족장시대나 레위 법전 하에서 합법적이었던 적이 있는가? 월터 카이저에 의하면,“분명히 일부다처 혼을 허용하는 표현은 성경에 단 한 번도 없었다. 결혼을 통제하는 법은 항상 창세기 2:24를 규준으로 여겼다.”
(3) 이혼과 재혼
이혼에 관계된 가장 중요한 본문은 신명기 24장에서 발견된다(신 42:1-4 참고).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이 모세의 규정은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것은 인간의 악함과 마음의 완악함(마 19:8)에 대한 양보적 규정이었다. 그 규정은 창조 때로부터의 인간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존재하던 관습을 조정하고 완화하는 것이었다. 1절에 언급된 ‘이혼 증서’는 분명히 그 여자의 재혼 권리가 포함된 권리들과 평판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수치되는 일’(something indecent)의 의미는 많이 논의되어 온 주제였다. 이미 예수님 당시에 랍비들의 견해는 나뉘어져 있었다. 보수적인 삼마이 파는 음란한 행위로 보았다. 반면에 힐레리 파는 남편을 화나게 만드는 일로 보았다. 여기에는 음식을 망치는 사소한 일까지 포함되었다. 필로와 요세푸스는 힐레리 파의 견해를 알고 있었고, 이에 동의하였다. 이 율법에 대한 허용적 해석은 분명히 1세기 유대교 안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예수님은 이 입장을 날카롭게 비판하셨다. ‘수치되는 일’은 간음으로 해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세오경은 간음에 대해 사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레 20:10). 죤 머리는 신명기 32:14에 근거해서, 행위의 음란함이나 부도덕성으로 보았다(some shameful conduct connected with sex life). 아벨 아이잭슨(Abel Isakkson)은 그 여자가 자신의 벗은 몸을 -자발적으로 혹은 비자발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보았다(John J.Davis, Evangelical Ethics,95).
말라기 2:10-16은 이혼과 관련된 구약성경의 중요한 구절들이다. 그 본문은 이 종족 간의 결혼과 이혼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당시에 그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어떤 학자는 본문의 이혼을 여호와에게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설득력도 없다. 본문의 이혼은 문자적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말라기는 결혼과 관련하여 신학적 틀을 제시해 준다. 비록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 아래서 이혼을 관대하게 다루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이혼을 초래하는 죄 된 상태를 미워하신다. 본문에서 말라기는 창세기 1-2장의 창조 기사까지 올라가며,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다보고 있다(마 5:31,32).
‘음행 한 연고 없이’에서 ‘음행’(porneia)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부 로마교회 학자들은 이 용어가 모세의 율법에 금지된 근친의 결합을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학자는 혼전의 성적 불성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혹은 ‘지속적이고 회개하지 않는 간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마태는 ‘간음’을 가리키는 특별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마태는 간음과 음란을 구분하고 있는 듯하다(마 15:19). 신약성경의 용법에 비추어 볼 때,‘모든 종류의 비합법적인 성행위’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음란함으로 볼 수 있다. 이 단어는 간음을 포함하나, 그것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바울은 근친상간(고전 5:1)과 창기와의 성관계(고전 6:13)와 관련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비합법적 성행위는 혼전의 성적 부정과 동성애(레 18:12, 롬 1:26-28) 그리고 수간(레 18:23)을 포함할 것이다. 이러한 성적 부도덕의 행위는 한 몸의 원리를 범하는 것이다. ‘한 몸의 원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의 연합과 배타성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이혼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발견된다(7:10 이하). 10,11절의 문맥을 볼 때, 동사 ‘코리조’(‘가르다’를 의미함)는 분명히 이혼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방인의 경우 여자가 이혼 문제의 주도권을 쥐는 법적 권한을 갖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문자적 의미는 ‘has not been enslaved’)라는 말씀은 재혼이 자유롭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J.J.Davis). 불법 유기의 문제가 여기서 등장한다. 믿지 않는 남편(아내)에 의한 불법 유기(내버림)의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이혼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결과로써 재혼할 수 있다. 그것이 본문의 결론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이러한 유기를 구성하는가? 배우자의 물리적 유기와 장기간 가족을 버려두고 떠나 있는 것은 분명히 그러한 유기의 조건에 속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낭비벽과 일콜 중독과 재정능력의 결함 혹은 혼인상의 의무 불이행에 까지도 적용될 수 있는가? 데이비스에 의하면, 심각한 경우에도 교회는 이혼을 고무시키지 말아야 한다. 병이나 신체적 무능력으로 인한 혼인상의 의무 불이행도 유기를 구성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 이혼은 언제나 죄 된 인간의 태도와 행동의 결과이다. 따라서 기독교 지도자는 이혼을 격려하거나 고무할 수 없다. 동시에 성경은 모든 이혼이 예외 없이 그 자체로서 악한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재혼에 있어서, 피해를 본 사람은 재혼할 권리를 갖는다. 그러면 이혼의 책임(잘못)이 있는 쪽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사람도 합법적으로 재혼할 수 있는가? 만일 그가 회개하고 과거에 수행하지 않은 인간적 재정적 의무를 회복하려고 참으로 시도한다면 긍정적인 답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참된 회개란 하나님 보시기에 새 출발 하는 것이요, 과거의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요,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를 용서해주셨다면, 교회는 더 이상 그 ’ 잘못한 ‘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그는 무죄하다. 물론 교회는 변화된 삶과 태도를 지켜봄으로써 그 회개가 참된 것이라는 근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재혼에 앞서서,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결혼의 성경적 표준을 제시하는 상담이 이루어져야 한다. 회개와 죄 사함 그리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하여 이혼한 사람은 과거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다.
3. 동성애(同性愛) 문제
(1) 정의(定義)
동성애(Homosexuality)란 동성 간의 성적 행위(sexual behavior)를 말한다. 학자들은 동성애의 행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동성애에 관하여 일치된 명확한 정의에 도달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발견하였다.
몇몇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백인 남성의 4-5%가 사춘기 이후에 오로지 동성애 행위자로 남아있으며, 10-20%가량은 규칙적으로 양성 모두와 성행위를 한다고 한다. 동성애의 원인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어떤 학자는 성 호르몬의 불균형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많은 이론들이 있는데 두 가지 범주로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 범주는 유전적이라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이론들은 이란성 쌍둥이들보다도 일란성 쌍둥이들에게서 동성애 행위의 발생률이 한층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쌍동이 연구로부터 증거를 내세우고 있다.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이론은 심인 성적(心因性的)인 것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가족의 영향과 그 밖의 환경적 요소들이 개인의 성적(性的) 자기 동일감을 결정한다고 가정한다. 오늘날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가장 동성애적인 소년을 만들어내기 쉬운 가족은 지나치게 자상하고 소유욕이 강하며 지배적인 어머니와 초연하고 냉담한 아버지를 가진 가족이라고 한다. 그러한 아버지들은 아들을 경시하며 굴복시키고, 그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거의 없다. 이러한 연구조사를 한 학자들은 만일 한 소년이 ‘따뜻한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를 갖고 있다면 그 아이가 동성애자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다.
어떤 동성애자들에게는 이성(異性)에 대한 공포심이 동성에 대한 깊이 뿌리 박힌 매력보다 한층 더 강하게 나타난다. 레스비어니즘(Lesbianism)은 여성의 동성애를 말한다. 이 경우도 가족의 영향은 중요하다. 최근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여성 동성애자들의 많은 어머니들은 그들의 딸에 대하여 냉담하며 경쟁적인 경향이 있다고 한다.
(2) 역사적 배경
동성애는 역사적으로 매우 오래된 현상이다. 동성애에 대한 증거는 고대문화의 그림문자나 상형문자에서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의 미술에서도 발견된다. 고대 히브리 민족, 이집트인 그리고 앗시리아인은 동성애에 반대하는 법을 갖고 있었다.
주전 6세기부터 동성애에 대한 표현은 그리스의 미술과 문학에서 갈수록 더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고대 헬라의 문화가 동성애를 사회적 규범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결론은 옳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 헤로도토스 그리고 후대의 많은 스토익파와 견유학파(견유학파) 철학자들은 동성애에 대한 도덕적 거부를 표현하였다. 서구 문명에서 동성애는 교회법과 민법에 의해 엄격하게 다루어져 왔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동성애자들을 화형에 처하도록 요구하였다. 중세기에 캔터베리의 안셈은 많은 사람이 동성애에 빠져있는 현실을 언급하면서 교회 형벌의 완화를 촉구하였다.
주후 1,000년부터 1,500년 사이에 유럽은 도시화되었고, 동성애에 대한 증거는 증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군대에서 실시된 연구조사에 따르면, 병사들 중 1% 가 량이 동성애자라고 밝혔다. 미국의 경우, 1970년대 이후로 ‘동성애적 반문화’는 두드러지게 눈에 띄고 전투적이 되었다. 1974년에 동성애 활동가들은 미국 정신협회를 설득하여 정신병의 목록에서 동성애를 제거하였다. 대신 ‘성적 태도 결정의 불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J.J.Davis, Evangelical Ethics, pp.106-108).한 의학잡지(1977)에 의하면, 미국 정신협회 회원들의 69%는 동성애를 치료가 필요한 병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동성애자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있은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동성애에 대한 사회 일반의 지속적인 거부감을 반영해주는 것이다.
(3)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입장
인간의 성적 본질은 남녀의 구별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아주 닮은 짝과 동역자로서 여자를 창조하셨다. 성적 차이는 결혼과 출산 그리고 가정생활의 기초이다. 가정은 인간 공동체의 근본적 형태이다. 돈 윌리암스의 말대로 인류의 근본 형태는 남자와 여자의 교제이다. 동성애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인 인간의 성적 본질과 결혼의 ‘출산적 차원’을 성취할 수 없다(창 1:26). 동성애는 타락의 결과요, 인간 생활의 많은 무질서 가운데 하나이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최초의 언급은 창 19:1-11에 나타난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성관계를 의미한다. 창세기에는 이 단어가 12번 나온다. 그 가운데 10번은 성관계를 의미한다. 소돔 사람들은 롯의 손님과 동성애적 관계를 가지려고 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주석가들은 모두 이 본문에서 동성애 행위에 관한 언급을 발견한다(참고. 유다서 7절).
동성애는 모세의 율법에서 강하게 정죄받고 있다(레 18:22,20:13). 동성애에 대한 신약성경의 금지는 세 곳에서 발견된다(롬 1:26, 고전 6:9, 딤전 1:10). 성경은 동성 간이든 이성간이든 모든 종류의 육욕을 정죄한다. 성경은 일관성 있게 동성애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구약신학>에서 차일즈(B.S.Child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동성애의 행위에 대한 성경의 개방성-보증이 아니라면-을 찾으려는 최근의 몇몇 신학자들의 시도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구약의 이해와 엄청난 불일치를 보이는 것이다. 그 신학적 문제는 그러한 행위를 정죄하는 몇몇 본문들을 인용하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레 20:13)... 구약은 끊임없이 이성 간의 도착적인 사랑을 통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의도의 외곡을 증언한다(삿 20장;삼하 13장). 마찬가지로 구약은 동성애를 축복 바깥의 그늘로 떨어지는 창조의 왜곡으로 본다.” 교회는 이 근본적 가르침을 양보할 수 없다!
동시에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동성애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교회는 죄 된 태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명백하게 제시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은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하신다. 임상적 경험에 따르면, 죄의식뿐만 아니라 변화되어야겠다는 동기를 갖는 것은 치료의 성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4)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역할
동성애에 관한 논의는 그 원인을 찾는 일에 있어서 큰 어려움이 있었다. 혹자는 이 논의 자체를 결론이 없는 논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상당수의 동성애자들이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동성애를 생득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마틴 호프만(Marti Hoffman)은 동성애에 관한 글에서 말하기를, 성적 대상의 선택은 근본적으로 ‘학습된 현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도주의자들은 동성애를 질병의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이스(C.S.Lewis)는 이러한 입장에 반대하였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동성애를 ‘부자연스럽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성경이 동성애를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 기독교는 동성애를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처럼, 사회 타락의 징조로 여겼다.
로마교회의 밀헤이븐(John G.Milhaven)은 주벽이 도덕적으로 좋지 않고 비기독교적인 것과 같이, 동성애도 도덕적으로 악하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동성애가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것은 기능을 오용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사랑을 거부하고 온전한 인간생활을 못하게 하는 데 있다.” 이러한 관점은 동성애의 잘못을 범하는 사람을 ‘큰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을 가진 사람은 동성애자들이 교인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법에 의해서 처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버나드 램(Bernard L.Ramm)은, 구속받은 자들의 코이노이아인 교회는 동성애자들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다(The Right, The Good and The Happy,1971, p.111).카알 하임(Karl Heim)은 말하기를, 개별적인 경우 우리들은 그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 사랑과 목회적 분별력으로 이 일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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