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산상수훈 말씀에서 사랑에 관하여 새로운 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새 법(마 5:43-48)
43절 에쿠사테 호티 에르레데 아가페세이스 톤 플레시온 수 카이 미세세이스 톤 에크드론 수
성 경: [마5:4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에 근거한 실천적 윤리를 강조하신 예수의 교훈 중에 최절정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적하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율법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현존하는 랍비 문헌들 조차도 그처럼 대담하고 부정적인 결론으로 비약(飛躍)하는 것은 좀처럼 없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본문이 유대인의 가치관을 비웃기 위해 기독교에서 후에 첨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가설일 뿐이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쿰란 공동체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라는 공동체 내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외부인들을 미워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그것이 유대 사회 전체의 흐름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사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자기들만이 신앙을 지키는, 소위 '남은 자들'(remnants)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사랑과 미움의 대상을 그처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즉 이처럼 냉혹한 흑백 논리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매사를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예수 당시에 이 같은 식의 사고방식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Davies). 한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앞부분의 원칙은 레 19:18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원칙의 범위는 이방인이 아니라 주로 선민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 내부인들로만 해석되었다. 물론 때로 이스라엘에서 정주(定住)하고 있는 이방인에게도 조건부로 적용되기도 했다(레 19:33, 34; 신 10:18, 19). 즉, 이것은 할례와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선민 공동체 속에 들어오는 이방인들에게 만으로 제한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원칙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간혹 그들은 이 같은 단서 없이 원수 사랑을 인정하기도 했고(삼상 24:20), 가축이 관계된 문제에서나(출 23:4, 5) 또는 위급한 상태(잠 25:21, 22) 등과 같은 일상사(日常事)에서 이 원수애가 요구되기도 했다. 한편 본절은 19:19;22:39 과는 달리 구약을 인용하면서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특히 레 19:33, 34에서는 이방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사랑을 베풀라고 명령하고 있는데도 본 인용구는 그런 명령까지도 무시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당시 일반 대중들은 하나님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였다면, 반대로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정되며 나아가서는 공인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눅 10:25-37을 보면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며, 또 믿는 자들에게는 오직 사랑할 의무만 있고 미워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45절 호포스 게네스데 휘오이 투 파트로스 휘몬 투 엔 우라노이스 호티 톤 헬리온 아우투 아나텔레이 에피 포네루스 카이 아가두스 카이 브레케이 에피 디카이우스 카이 아디쿠스
성 경: [마5:4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따르고 그의 성품에 동참하는 자는 윤리적 관점에서 그분의 '아들'이 되는 것을 뜻한다(9, 16절 참조). 이 '아들'됨은 단순한 명예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신분과,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영예(榮譽)를 누릴 필수 요건이 바로 44절에 언급된 바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이다.
그 해를...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 예수의 사람들은 그 삶의 전형으로서 하나님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한편 하나님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 없이 사랑하셔서 모두에게 똑같이 해를 비취게 하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의미하는 바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면에서든지 구별이 없고 따라서 결국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된다고 결론 지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분명 선인과 악인에게는, 특히 종말론적 측면에서 확실한 차등(差等)이 주어질 것이라고 가르치셨다(25:3-46).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그 공평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각 개개인에게 엄격한 도덕적 생활과 순종(順從)을 동시에 요구하신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요 15:9-11; 유 1:21). 그런데 칼빈(Calvin) 이후로 많은 신학자들은 44, 45절을 하나님의 '일반 은총'과 관련시켜 왔다. 여기서 '일반 은총'이란 모든 인간에게 구별 없이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은총을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써 모든 사람을 정죄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계속하여 오랫동안 은총을 베푸셨다. 사실 '일반 은총'을 강조하는 자들의 견해로는 이 구절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원수를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마음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도덕적인 면과는 무관하다거나 종말론적으로는 아무 구별 없이 주어지는 사랑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구약성경에는 원수에 대하여 가혹한 태도를 요구하고, 신약성경에서는 이러한 어두운 면을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극복(克服)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관념은 그에 반대되는 증거들을 살펴보면 부인될 수밖에 없다.
즉 구약성경에는 형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고 있는 곳이 많이 있다(출 23:4, 5; 레 19:18, 33, 34; 삼상 24:5; 욥 31:29; 시 7:4; 잠 24:17, 29;25:21, 22). 그리고 반면에 신약성경에서도 타락하여 버림받은 자를 강력히 정죄하고 있다(눅 18:17; 고전 16:22; 살후 1:6-10; 딤후 4:18; 계 6:10). 오히려 44, 45절에서 주장하는 것은 43절에 인용된 구약성경의 율법이 천국의 상속자(相續者)들이 보여 주어야 할 풍족한 사랑, 즉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였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절의 핵심은 아들이 되는 방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아들 됨을 추구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자신을 예언자 계열 위에 놓는 것이다(5:12). 그러나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성품의 연장 위에 놓는 것이다"(D. A. Carson).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Plummer). 이 두 마디의 말이 보여주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 주위 사람들의 행동 양식보다 뛰어나게 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D.A. Carson).
46절 에안 가르 아가페세테 투스 아가폰타스 휘마스 티나 미스돈 에케테 우키 카이 호이 테레로나이 토 아우토 포이우신
성 경: [마5:4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공관복음에 나오는 세리들은 로마 정부의 직접적 임명을 받은 조세징수(租稅徵收) 청부 계약의 주계약자가 아니다(라틴어로는 Publicani). 그들은 통상적으로 외국인이었고 '세리'들이란 단지 그 밑에서 일하며 한지방을 맡아서 징수하는 본토(本土) 출신 사람(라틴어로는 Portitores)들이었다. 사실 이들은 멸시받는 존재였다. 그 이유는 조세 청부 제도가 대규모의 부정부패(不正腐敗)를 낳게 할 뿐 아니라 엄격한 유대인의 눈에는 세리들이 그들을 지배하는 외세를 위하여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매국적인 행위를 하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세리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더럽혀져서 부정하게 되었을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상황은 조세징수의 계약자가 이방인 상급자들과 거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위 계급의 세리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다. 실로 세리들은 창녀와 다른 죄인들과 함께 취급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 즉 그의 모친이나 동료 세리들은 사랑하는 것이다(D.A. Carson). 그것은 너무도 인간적이요 본능적인 사랑이다.
무슨 상이 있으리요 - 이 말은 결국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삶을 세밀히 평가하고 계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후 5:10). 사실 신령한 일에는 세상의 보상보다 더 공정하고 영화로운 상급(上級)이 주어진다(1-12절).
47절 카이 에인 아스파세스데 투스 아델푸스 휘몬 모논 티 페릿손 포이에이테 우키 카이 호이 텔로나이 우토스 포이우신
성 경: [마5:4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이방인들도... - 적절한 인사를 하는 것은 예의와 존경의 표시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형제들', 즉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다른 제자들에게만 그런 인사를 한다면 그들은 '이방인'(에드니코이)과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에드니코이'는 선민(選民) 이스라엘에 반(反)하는 이방 민족들 전체를 가리키는데, 대부분의 이방인이 이교도(異敎徒)이므로, 이 말은 결국 인종적 의미 이상의 영적인 조롱의 뜻을 갖게 되었다. 사실 "사람이 친구를 사랑할 때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친구 사랑은 일종의 확장된 이기심인 것이다"(Broadus). 예수는 바로 이런 이기적 사랑과 예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 "타락한 옛 인간의 삶은, 손해는 복수하고 유익은 돌려주는 소박한 정의에 입각한 삶이다. 그러나 구속받은 새 사람의 삶은 복수를 거부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삶이다"(Scott).
48절 에세스데 운 휘메이스 텔레이오이 호스페르 호 파테르 휘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텔레이오스 에스틴
성 경: [마5:4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온전하라 - 일부 학자들(Allen, Hendriksen)은 이 절을 마지막 대립 명제(43-47절)의 결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 경우에는 여기에서 말하는 '온전'이란 '사랑의 온전'이다. 그러나 '온전함'에는 훨씬 더 넓은 의미가 들어 있으며, 48절은 본장 전체 대립 명제에 대한 결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한편 '온전'(텔레이오스)이라는 구약성경의 '탐밈'(온전한)이라는 말을 반영하고 있다. 이 '탐밈'이라는 말은 희생 동물이 흠(欠)이 없는 것, 즉 하나님께 합당한 것을 말하기도 하고(출 12:5) 여호와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 곧 의로움을 의미하기도 한다(창 9:6; 신 18:13; 삼하 22:26). 이와 연결되는 헬라어 단어는 '성숙한' 또는 '다 성장한'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고전 14:20; 엡 4:13;히 5:14; 6:1). 율법이 지향하는 것도 앞의 대립 명제와 관계된 권위 있는 율법 해석에서 보였듯이 하나님의 온전하심 그 자체인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진정으로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전케 하신 분(17절)을 따르는 제자라면 본받아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온전함이다. 사실 복음서 기자들은 메시야와 신자들에 관계되는 맥락(脈絡) 안에서만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한다. 진정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의 제자들의 아버지이신 것이다(H. F. D. Sparks). 따라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反映)하는 선민으로서 모든 불의한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그들의 독특한 표시였던 것처럼(레 11:44, 45;19:2;20:7, 26) 메시야 공동체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진정한 곳으로써 이 같은 특징(벧전 1:16)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France). 그러나 이 때문에 자신 있게 예수가, 무제약적인 온전함이 제자들에게 가능하다고 가르친 거스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들이 영적으로 파산(破産)하였다(3절)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십사'(6:12)고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이 바라던 종말론적인 목표인 아버지의 온전함을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추구(追求)하여야 하는 것이다.
[요엘 1장 히브리어 성경 강해] 하나님의 징계인 메뚜기 재앙(욜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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