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신약성경 말씀

[요한계시록 설교말씀] 종말의 시대와 예배(요한계시록 4~5장)

르호봇 2021. 1.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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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계시록 설교 말씀 중에서 종말의 시대와 예배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종말에는 세계적 종말이 있고 개인적 종말이 있습니다. 개인적 종말은 죽음을 맞이할 때 오게 됩니다. 세계적 종말은 주님이 구름 타고 재림하실 때 오게 됩니다. 주님은 종말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악해져 가고 포악하여 정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노아 때도 종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타락해져 갑니다. 이럴 때 성도는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피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지탄받고 있는 이때에 과연 성도는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넓은 문으로 들어간다고 나도 그 사람들을 따라서 갈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좁은 문을 향하여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으로 들어갈 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종말의 때에 우리가 영적으로 열려서 좁은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종말의 시대와 예배(요한계시록 4~5장 강해설교)

 

계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계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계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계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계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계 4: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계 4: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계 4: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계 4: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계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계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영국 정부는 그리스도인들이 존경하던 월리암 템플 감독에게 전쟁의 공포에 떨고 있는 영국 국민을 위한 라디오 메시지를 부탁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 시기에 하나님의 사람 윌리암 템플 감독은 전영국 국민들에게 띄우는 메시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다른 어떤 때보다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그는 전쟁이 터진 후 국민들에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전쟁에 참여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혹은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보따리를 싸들고 지금은 피난을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때입니다.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상황에서 템플 감독은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때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예배는 성도의 최우선 순위입니다. 특별히 위기를 만났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종말론적인 계시를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예수님 오시기 직전에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어떻게 인류 역사를 심판하실 것인가? 그것이 주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에 대한 본격적인 드라마는 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3장까지는 서론이고 본론은 6장에서부터입니다. 그 사이에 4, 5장이 삽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4, 5장의 내용은 하늘나라에서 천사들과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광경을 다룹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의 심판을 보여 주시기 전에 사도 요한으로 천상의 예배 광경을 보게 하셨을까요? 이에 대해 한 신학자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했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본 자라야 땅의 비극을 이겨 낼 수 있다. 나님의 영광을 본 자라야 사람됨의 수치와 실패를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비참함과 죄악과 실패와 저주를 인간들에게 보여 주시기에 앞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먼저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특별히 그 영광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광입니다.

 

그 영광이야말로 이 땅의 비극과 이 땅의 저주와 이 땅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이겨 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그 영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땅의 전쟁터에서 진정한 승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요한계시록의 구조 자체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합니다. 6장부터 본격적으로 인간의 죄가 토해 낸 오염된 지구 문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심판이 나오는데 그 광경을 보고 나면 도무지 살 맛이 안 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 역사 속에서 견뎌 나갈 것인가를 질문하게 됩니다. 누가 이런 죄악과 비극 속에서 진정한 승리자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늘의 영광을 먼저 바라본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요한으로 천상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4, 5장을 통해서 예배가 어떻게 성립되는지 예배는 누구에게 드려야 하는지 그리고 참된 예배의 전제 조건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성립 요소 4장 1절과 2절에서 예배의 성립 요소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는 주님의 음성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님의 감동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1, 2절) 주께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주님의 말씀과 함께 천상의 예배 광경이 펼쳐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 말씀과 동시에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장에 보면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예배에 대한 토론을 하십니다. 처음부터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자신이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녀의 치명적인 죄를 깨우쳐 알도록 하는 부분을 보십시오. 16절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주께서 자기의 가장 아픈 부분을 지적하시니 이 여인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사람은 자기의 약점을 지적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폭로될 때 딴청을 부리며 다른 이야기를 하던가 아니면 정면으로 부딪쳐서 왜 자기를 모욕하느냐고 따집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17절) 이 여자는 회피 작전을 썼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남편이 없다는 네 말이 맞다. 다섯이나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 남편이 아니니 말이다. 얼마나 무안한 장면입니까? 그러나 이때야말로 자기의 죄 문제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주님의 용서와 도우심을 구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 상황을 피하고 엉뚱한 이야기로 예수께 시비를 겁니다.

 

우리 조상들은 사마리아의 이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다고 지금까지 믿어 왔는데 왜 당신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만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받을 수 있는 예배라고 주장하십니까?전도를 하다 보면 죄 문제보다는 다른 것으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교회가 많습니까?

선악과는 왜 만들어 놓았습니까?

이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예배 장소로서 예루살렘이 옳다거나 사마리아가 옳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께서 이 여자와의 대화에서 내렸던 중요한 결정이 있다면 요한복음 4장 24절의 말씀처럼 신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나 사마리아 같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파나 예배 형식이나 교회 건물처럼 비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만 수께서는 예배가 예배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신령과 진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령으로란 말은 성령 안에서(in spirit)란 말입니다.

 

진정한 예배에는 하나님의 임재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또 주께서 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것이 갖추어져도 성령과 진리라는 이 두 요소가 없으면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의 대상

요한계시록 4, 5장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 대답은 말할 것도 없이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령(聖靈)입니다. 4장은 성부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졌고 5장은 성자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성령께서 이 말씀을 받고 있는 사도 요한을 감동할 뿐만 아니라 보좌를 충만케 하고 계십니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4:5) 여기서 일곱 영(靈)은 하나님의 영이 일곱 개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숫자가 많이 등장하는데 특별히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곱 영은 완전하신 성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천상에서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를 위한 전제 조건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크게 두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예배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定義)가 있는데 제가 발견한 가장 정확한 정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에 대한 피조물인 인간의 응답이다. 그렇습니다.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 참석했다고 해서 모두 다 예배를 드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예배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worshipworth(가치)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배드리는 대상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런데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그분의 가치를 인정하며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강조점이 여러 가지 나옵니다. 4장 8절을 보십시오.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하고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향해서 네 생물이 찬송을 드립니다. 생물은 아마도 하나님의 보좌를 옹위하고 있는 그룹이라고 불리는 천사들일 것입니다. 천사들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24 장로들도 예배합니다.(10절) 24 장로들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지만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대표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열두 지파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서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둘을 합하면 24되기 때문에 24 장로를 신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구속(救贖)은혜에 동참한 모든 성도들을 대표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24장로와 네 생물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드리는 찬양을 주목해 보면 그분의 거룩성과 전능성과 영원성이 강조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속성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하나님만의 독특성입니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구별됩니다. 절대적으로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죄 많고 무능하고 유한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절대 타자(他者)이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6장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성전에 예배하러 들어갔던 젊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발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스랍들이 거룩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때 그 스랍들이 자기 얼굴을 가리고 찬양한 이유는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가 밝은 태양빛을 바라보는 것처럼 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분 앞에 내가 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거룩한 두려움 같은 것입니다. 완전히 도덕적으로 무흠 하고 정결하신 거룩자 앞에 설 때 우리는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합니까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가 예배에 대한 열정을 상실한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참으로 아는 자라면 주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잘 예배하려면 그분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가도 알아야 합니다. 4장에서는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5장에서는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계시합니다. 각 장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행하심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4:2)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보좌는 다스리는 곳이며 우주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통치하시며 나를 통치하십니다. 그분은 해가 가는 길과 달의 궤도를 정하시며 동시에 나의 심장을 뛰게 하십니다. 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전체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얼핏 보면 이 우주는 아수라장같이 혼란하고 무질서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도 보좌에 앉으셔서 우주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좌라는 말이 46회나 등장하는 것도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이라는 이 엄청난 의미를 깨닫는 자마다 그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4:11) 합당하오니라는 말은 가치가 있는(worthy)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실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가치를 깨달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실 만한 가치가 있으십니까? 그것은 주께서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 해도 창조의 신비를 완전히 밝혀 낼 수는 없습니다.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과학과 신앙의 동질성은 경이(wonder)에 기초하고 있다. 과학자는 자신들이 탐구하는 것에서 놀라움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분석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이 하나님의 엄청난 경이에 놀라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놀라는 사람입니다.

 

만물을 심판하시는 예수님

물론 하나님이 심판자이시지만 요한복음에 보면 성부 하나님이 심판하는 권세를 아들이신 예수님께 맡기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계시록 6장부터 심판이 시작되는데 인봉(印封)을 떼는 것으로부터 심판의 진행을 설명합니다. 그 인봉을 떼는 자가 심판자입니다.

 

누가 심판자가 될 수가 있습니까?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印)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5:1)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는 말은 누가 심판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외가 되는 대상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는 사람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분만이 심판자가 될 수 있습니다.

3, 4절을 보십시오.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사도 요한이 그러면 누가 역사를 심판합니까? 누가 이 땅에 기어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입니까? 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이 다음 절에 나옵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다 지파의 사자(獅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5절)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심판자가 되기에 합당하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자입니다. 우리를 심판하실인류를 심판하실 분 만물을 심판하실 분입니다. 든 피조물이 한 날에 그분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 아닌가요?

 

우리를 구속(救贖)하신 예수님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5:9-10) 무엇 때문에 그분 앞에 찬양을 바칩니까? 그분이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 앞에 바치신 구원의 사건 때문입니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복음을 듣는 자들이 새로워진 사람으로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보혈을 흘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예수님이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여기에서도 합당하도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주께서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까닭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신비 못지않게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의 저주와 나의 죽음을 짊어지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의 경이! 생각해 보았습니까?

 

어거스틴은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벌써 이 지구 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을 다 죽여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지구상에 나 혼자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하신다. 내가 지구상에 살고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해도 그분은 나를 위해 기꺼이 그 생명을 버리셨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랑을 체험한 자 이 구(救贖)의 은혜를 체험한 자마다 그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려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아야 하고 또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 혹은 어떤 일을 하시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분은 나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구원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과 사랑을 거절한 인류를 마침내 심판하실 심판자이십니다. 렇다면 우리가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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