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히브리어강해 설교

[창세기 3장 히브리어강해설교]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창 3:7-11)

르호봇 2021. 2. 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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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3장 히브리어 강해설교 중에서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이렇게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를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인류가 원죄에 빠지게 되었고 모두가 죄악에 죽었습니다. 이것을 회복하러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원죄에서 회복되었습니다. 이 시간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아직도 죄악에 눈이 열려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창 3:7-11)

 

여자는 뱀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했던 선악과를 따 먹고 그것을 남편에게도 주어 똑같이 먹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창세기 3장을 히브리어 원문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파란색은 히브리어 알파벳 상형문자로 창세기가 기록된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게 됩니다. 7절은 바티파카흐나 에네 쉐네헴 바예데우 키 에루밈 헴 바이트페루 알레 테에나 바야에슈 하고로트입니다.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아담과 여자는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전에는 자신들이 벗은 줄도 몰랐는데 선악과를 먹는 순간 자신들이 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어 치마를 해서 입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라는 단어에서 밝아져는 פקח(파카흐 6491 와우계속, 닢알, 미완료, 여성, 3인칭, 복수)입니다. 와우계속법은 즉시로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동태를 쓰고 있는 것은 선악과에 의해서 아담과 여자가 눈이 밝아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파카흐는 눈이 열려지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복수는 아담과 여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의 열매를 먹고 좋은 쪽으로 눈이 열려져야 했는데 죄들의 눈이 열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한 눈이 열려지지 않고 악한 눈이 열려진 것입니다. 죄악의 눈이 열리기 싫어도 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원죄를 짓고 싶어서 지은 것이 아니라 태어나보니 원죄의 죄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으면 한번 죄악의 눈이 열린 것을 닫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이 벗은 줄을’이라는 단어는 עירם(에롬 5903)입니다. 교활하다, 간사하다, 라는 뜻의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인간들이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고 뱀처럼 교활하게 되고, 간사하게 된 것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들이 파괴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이 파기되고 이 순간 인간들은 죄인으로 강등되어 버린 것입니다. 원래는 인간들이 천사를 부리고 천사 위에 있었던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였는데 죄를 짓고 난 후로 천사보다 못한 존재로 떨어진 것입니다. 결국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인간이 죄악의 눈이 떠지니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고 하나님도 몰라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교활한 자들이 되어 하나님께 역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자신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자신들의 몸을 가렸습니다. 자신들의 수치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원래 선하게 창조되었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자신들이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타락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원죄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금방 시들어버리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상징하는 가죽옷을 지어 입혔던 것입니다. 우리도 가죽옷을 입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8절은 바이쉐므우 에트 콜 아도나이 엘로힘 미트할레크 바간 레루아흐 하욤 바이트하베 하아담 베이쉐토 미페네 아도나이 엘로힘 베토크 에츠 하간입니다.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이 죄를 지은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늘 에덴동산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난 즉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른 후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죄를 짓고 마음이 안정된 상태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방 나타났다면 아마도 인간은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이 흐른 후에 마음이 정돈된 후에 나타나셔서 아담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 날 바람이 불 때’라는 단어는 רוח(루아흐 7307)입니다. , 기운, 생기, 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영으로 에덴동산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인간들을 찾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들과 교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늘 성령님과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호흡하고, 성령님의 영이 함께하며, 하나님의 기운이 나에게 임할 때에 늘 생기가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 범죄를 지으면 성령은 내 안에서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니시는הלך(할라크 1980 동사, 히트파엘)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거니시는데 히트파엘로 거니십니다. 히트파엘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을 찾으시면서 애통해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타락하기 전의 인간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거니시고 있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을 찾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죄지은 인간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죄지은 인간을 찾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시면서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죄인들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하면서 죄지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여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뻐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도저히 나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의로운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지 죄인들은 도저히 공의로 우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원죄의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 간다는 것은 죽음뿐입니다.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지라’에서 ‘숨은 지라’라는 단어는 חבא(하바 2244 와우계속법, 동사, 히트파엘)입니다. 히트파엘입니다. 가만히, 낮추다, 숨기다, 라는 뜻입니다. 와우계속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즉시로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순간 숨은 것입니다. 완벽하게 보이지 않도록 숨었습니다. 아담과 여자는 자신들을 위하여 스스로 몸을 낮추고, 숨겼습니다. 그 이유가 자신들의 죄가 하나님 앞에 드러날까 봐! 숨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인간들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단수를 쓰고 있는 것은 죄를 짓는 것도 1:1이고 구원도 1:1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선악과 사건은 인간들의 전적 타락입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류가 죽은 것입니다.

 

이제 인간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절대 구원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두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는 절대 살아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후 아담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살아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이 원죄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아담이 죄가 없다면 하나님이 불렀을 때 왜 숨었습니까? 당당하게 나오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이 나갈 수 있습니다.

9절은 바이크라 아도나이 엘로힘 엘 하아담 바요메르 로 아예카입니다.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부르시며קרא(카라 7121 와우계속법,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부르다, 선포하다, 소환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즉시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면서 소환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마음에 죄악이 들어온 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셔서 이렇게 아담을 부르고 계실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아담을 부르고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복합적인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아담이 네가 왜 이 선악과를 따먹었느냐! 내가 너에게 명령을 했지 않았느냐!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하지 않았느냐!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마음으로 이 세상의 죄인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부를 때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너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너의 현재 위치가 어느 곳에 있느냐! 네가 서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 모르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위치와 자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영적 위치가 어디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합니다. 죄의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만한 자리에 서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죄의 자리에 서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면 위치를 떠나게 됩니다. 죄악의 자리에 서게 되고 앉게 됩니다. 결국 영적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걱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믿음과 신앙이 떨어져 결국에는 영적 죽음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알고 계시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적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런 신앙은 안 됩니다. 결국 아담과 같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만나면 기뻐야 하는데 두려워 떠는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인생은 하나님을 만나면 두려워 떨고 숨게 됩니다. 하나님께 노여움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고, 심판을 받지 않을까? 두려운 하나님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면서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고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무조건 사랑만 있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선택하여 가면 가차 없이 매를 대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내 마음대로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자 범죄를 지으면서 살게 되면 하나님이 징계를 내리게 됩니다.

10절은 바요메르 에트 콜카 솨마에티 바간 바이라 키 에롬 아노키 바에하베입니다.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되אמר(아마르 559 와우계속법,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말하다, 이야기하다, 선언하다, 라는 뜻입니다. 와우계속법의 문법은 아담은 하나님께 즉시로 고백합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선언하고 말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숨었다고 고백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기 전에는 마음이 편안하고 기뻤습니다. 그러나 뱀의 간교함에 빠져 죄를 짓고 나니 하나님이 두려운 하나님으로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전과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두려운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벗은 것을 알았다는 것은 자신들이 간사하고 교만하고,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을 알아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기 전에는 에덴동산에서 평안하게 살 수가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이후에는 평안이 사라졌습니다. 불안과 공포가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공포와 불안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죄악의 불안과 심판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숨었나이다חבא(하바 2244 와우계속법, 동사, 닢알,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 물러나다, 숨다, 라는 뜻입니다. 와우계속법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로 숨은 것을 말합니다. 닢알형 수동태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1인칭과 단수를 쓰고 있는 것은 죄를 지은 인간이 각 개인적으로 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지은 자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수동태는 자신의 죄를 발견했기 때문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큰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수동태를 보았을 때 인간은 절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습니다.

 

현재 아담은 하나님을 보기가 두렵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자체가 공포입니다. 자신의 눈이 열렸기 때문에 평안과 화평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공포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악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아담처럼 공포감이 있습니다. 이것은 에덴동산부터 있었습니다. 이것이 원죄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아담이 타락한 것을 회복받고 하나님과 함께 대화하고 사는 존재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은 존재들은 천사보다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후사를 위해서 천사들을 붙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두려워 떠는 신앙을 하면 안 됩니다. 율법의 진노 아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두려운 하나님으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늘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우리는 공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동시에 믿어야 합니다.

11절은 바요메르 미 히기드 레카 키 에롬 아타 하민 하에츠 아쎄르 치비티카 레빌티 아칼 미메누 아콜타입니다.

3: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합니다. 도대체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너에게 알려주었느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말은 너의 간사함과, 교만함과, 교활함을 누가 깨닫게 하였느냐 라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아주 강력하게 먹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이것을 네가 먹었다는 것이냐 말씀하십니다.

 

명한צוה(차바 6680 동사, 피엘, 완료, 공성, 1인칭, 단수) 명령하다, 부과하다, 부탁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하시고, 부탁하셔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피엘 강조능동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이 명령을 어기면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결과적으로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먹지 말라고 하셨던 선악과를 인간이 먹으니 결국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하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선물로 받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어기면 결국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나에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을 철저하게 지켜나가야 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살면서도 세상에서 얼마나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깨닫지 못하고 영적으로 무뎌져 가는 인생들도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에 예배만 드리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는 생활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우리의 예배가 연속적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자 범죄를 짓지 말고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담은 생활 속에서 연속적인 예배의 생활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었고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타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나는 아담의 신앙과 삶을 살지 않아야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십자가 복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서 교회에서나 세상에서 항상 말씀이 생각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럼 아담이 왜 선악과를 먹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먹었습니다.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는 존재로 바뀐다는 호기심에서 먹었고, 결국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과 견주어 보기 위한 교만에서 먹었던 것입니다. 뱀의 미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뱀과 같은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미혹합니다. 우리는 슬기롭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도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다가 죄를 지을 때가 많습니다. 내 욕심대로 믿음 생활을 하면 결국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교만해지거나, 자만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삶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인생,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사는 인생은 교만해지거나 타락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담을 교훈 삼아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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