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기나무에 선 모세(출 3:1-5)
모세는 애굽의 왕자의 신분으로서 호화스럽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유대인이라는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신분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고 하니 자기의 의가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애굽 사람을 죽임으로 인하여 광야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모세는 르우엘의 집에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매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고 합니다.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불러서 애굽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가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도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도록 소명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모세는 미디안에서 이드로를 만나 그의 사위가 되어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자신의 사역을 감당할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베드로도 자신의 직업인 어부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때에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부르셔도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사용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유되는 것입니다. 모세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하나님은 부르지 않다가 시간이 흘러 자신이 맡겨진 목자의 일을 열심히 할 때에 하나님께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도 모세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나에게 맡겨진 일에 열심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하는 직업이든지 교회에서 맡겨진 일이든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이든지 내가 보기에 하찮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도 다른 사람의 시각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볼 때에 충실히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큰일만을 생각하여 작은 일은 소홀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건성 건성하게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일을 맡겨주신다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나에게 맡겨진 일이 작다고 생각하더라도 최선을 다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진리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산 호렙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3: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1절 우모세 하야 로에 에트 촌 이트로 호트노 코헨 미드얀 바이니하그 에트 하촌 아하르 하미드바르 바야보 엘 하르 하엘로힘 호레바
모세는 미디안 광야를 누비면서 양떼를 치고 있습니다. 광야는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에 풀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른 건초를 양떼들이 뜯어 먹고 살게 됩니다. 우기에 잠깐 비가 오므로 풀이 올라오게 되는데 건기에는 금방 시들어 버리게 됩니다. 이 풀을 양들이 뜯어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항상 어디에 이런 풀들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광야를 누비면서 양떼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꼴을 먹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이렇게 자신이 맡은 양떼들을 위해서 헌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것은 모세가 이드로의 양떼들을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산 호렙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을 말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호렙에서 모세를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여기에 어떠한 하나님의 의도가 숨어있을까요?
‘호렙’ (호레브 2722) 호렙,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하라브 2717) 진멸되다, 황무하다, 황폐하다, 부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호렙 산은 말 그대로 황폐한 곳입니다. 사람이 살기가 힘이 드는 곳이 호렙 산입니다. 그런데 이 산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호렙 산은 광야에 있는 곳으로써 먹을 양식도 없는 곳이며 먹을 물도 없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폐하고 황무하여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땅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곳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산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진리가 무엇입니까?
호렙 산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의 방법대로 만나는 자들은 하나님께 진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영혼이 황폐하여 고통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호렙 산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그 영혼은 쉼을 얻고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함부로 호렙 산에 왔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심판을 당하게 되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한 자들은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안식을 얻고 마실 물을 마시며 떡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신앙으로 호렙 산에 접근하는 자들은 반드시 진노를 받아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은혜로 접근하는 자들은 진노가 축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출17: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하나님께서 호렙 산 그 반석 위에 서있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석을 치면 그곳에서 물이 나와 광야에서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 갈 때에 시원한 생수가 목에 들어와 갈증을 완전하게 해소시켜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반석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추르 6697) 반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시원한 생수를 뜨거운 광야에서 폭포수처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의 뜨거운 광야에서 목이 말라죽을 지경에 있을 때에 영원한 생수가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생수를 주셨기 때문에 영혼의 갈증이 해소된 것입니다.
왕상19:5-8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우리는 엘리야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이세벨 때문에 몸을 피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브엘세바까지 왔다가 큰 위험을 느끼고 광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때에 지쳐서 죽기를 바라면서 로뎀 나무 밑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지면서 떡과 물을 주면서 먹고 마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먹고 마심으로 힘을 내어 40일 동안 걸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이 말씀을 보자면 엘리야도 자신의 율법의 의로 호렙 산에 갔다면 진노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허락한 물과 떡을 먹음으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인정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호렙 산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수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율법의 의로 호렙 산에 하나님을 만나러 가면 반드시 진노받아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여 호렙 산의 하나님을 만날 때에 영혼이 황폐하여 죽을 죄인들이 안식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2절 바예라 말아크 아도나이 엘라이브 빌라바트 에쉬 미토크 하세네 바야르 비힌네 하세네 보에르 바에쉬 비하세네 에네누 아칼
모세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광경을 보게 됩니다. 모세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어떻게 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사라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는 나무를 찾아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 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을까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떨기나무’ (세네 5572) 떨기나무,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어근사전에 (싸나) 찌르다, 가시가 많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렙 산은 황폐하고 파괴되는 그런 장소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철저하게 몸이 죄인들을 위해 파괴되고 황폐케 되며 고통당하여 부수어진 골고다의 모형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허락에 의하여 철저하게 몸이 부수어지셨는데 바로 떨기나무에 뜻이 있는 것처럼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에 찔림으로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하나님도 함께 계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도 떨기나무는 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사라지지’ (아칼 398 VUPP 동사 푸알 분사수동) 죽다, 망하다, 불타다, 멸절하다, 라는 뜻입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떨기나무는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불에 타서 없어져야 하는데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불을 두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불의 관점입니다. 이 불은 영광의 불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불입니다. 또 하나의 관점은 고난과 고통의 불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다는 것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을 상징하는 불의 관점에서 볼 때에 예수님은 떨기나무와 같은 골고다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이 죽고 멸망당하여 이 땅에서 사라진 것같이 보였지만 절대 떨기나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속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던 자들은 떨기나무가 고난의 풀무를 통하여 연한 풀이 사라질 줄 알았지만 그 떨기나무는 하나님에 의하여 부활되셨기 때문입니다.
이 떨기나무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많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이 나무는 영원할 것입니다. 푸알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많은 불과 같은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없어지지 않고 함께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도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언정 주님이 하신 십자가 사건이며 진리의 말씀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세가 이 광경을 볼 때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떨기나무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럼 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바로 떨기나무와 같으신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인정하고 볼 때에 진정 그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떨기나무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직접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호렙 산에서 진노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떨기나무 속에 하나님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떨기나무를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출3:3-4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3절 바요메르 모세 아시라 나 비에리에 에트 하마리에 하가돌 하제 마두아 로 이비아르 하세네
4절 바야리 아도나이 키 사르 리르오트 바이크라 엘라이브 엘로힘 미토크 하세네 바요메르 모세 모세 바요메르 힌네니
모세는 궁금했습니다. 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지를 알고 싶어서 가까이 접근하여 갔습니다. 그때에 갑자기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고 있습니다. 모세는 깜짝 놀랐습니다. 불이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것을 보려고 갔다가 그 속에서 음성이 들리는 것을 듣고 놀라게 된 것입니다. 떨기나무 안에 바로 하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떨기나무를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죄인이 떨기나무에 붙은 불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만날 수가 있습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달라고 하며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요14: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빌립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떨기나무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고난당하신 예수님 안에 하나님 아버지는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가시에 찔려 고통을 당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외면하시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 떨기나무 안에 불로 항상 계셨던 것처럼 십자가에 하나님 아버지도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나를 위하여 이 엄청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처럼 떨기나무를 직접 내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내 귀에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를 통하지 않고는 절대 나에게 음성을 들려주시지 않습니다. 마이크에서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스피커가 고장 났기 때문에 소리를 감지하지 못하고 말이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현재 나의 영적인 스피커는 고장이 나있지는 않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서는 절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이 시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출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5절 바요메르 알 티크라브 샬 니알레카 메알 라길레카 키 하마콤 아세르 아타 오메드 알라이브 아디마트 코데쉬 후
모세는 떨기나무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께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고 가까이 오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신발을 벗지 않고 오면 호렙 산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율법의 의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합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자신의 의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애굽에서도 마찬가지고 미디안 광야에서도 율법의 의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벗기고 복음의 신으로 바꾸어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을’ (나알 5275) 신발, 샌들,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비유적으로는 매우 가치 없는 것을 나타낼 때에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나알 5274) 잠그다, 신기다, 덮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이 신고 있는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이기 위해서 그러는 걸까요? 아닙니다.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현재 신고 있는 신발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율법으로는 절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새로운 복음의 신을 준비하여 주시고 신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죽음은 완전하게 봉쇄되어 잠가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엡6: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하시면서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신을 신으면 평안이 오고 안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신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 단어도 (나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고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들어와 생명을 얻고 안식을 얻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죽지 않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를 떠나는 자들에게도 집에 들어갔을 때에 너희를 반기지 않고 쫓아내면 신발에 있는 먼지를 모두 떨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저주를 의미하는 행위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신발을 신고 있는 자들은 가는 곳마다 정죄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불화가 일어나고 싸움과 투쟁과 분쟁이 일어나는 중심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은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가 일어나게 되고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현재 무슨 신발을 신고 있습니까? 항상 정죄만 하고 저주만 퍼붓는 율법의 신발을 신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안식을 누리면서 축복을 선포하는 신발을 신고 있습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복음의 신발을 신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고 죄인의 삶이 아닌 의인의 삶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떨기나무는 불에 절대 타지 않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많은 수난을 당하셨지만 영화의 몸으로 부활하셔서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아직도 죄인의 자리에 있다면 빨리 떨기나무 앞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이 떨기나무 안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야 합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떨기나무와 같이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나의 구주로 믿을 때에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신발을 신고 전 세계를 누비시는 저와 여러분들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하 원어성경말씀] 다윗의 아들 딸인 암논과 다말의 영적 관계(삼하 13: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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