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히브리어강해 설교

[창세기 원어성경 설교말씀] 야곱의 영적 장자의 특권(창 25:27-34)

르호봇 2022. 4. 1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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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5장에서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자기의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아넘깁니다. 야곱은 영적 장자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축복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복을 사모해야 합니다.

 

야곱의 영적 장자의 특권(창 25:27-34)

 

오늘 말씀은 에서와 야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성격과 육체가 너무나 다릅니다. 에서는 힘 있고 남성다운 모습이라면 야곱은 얌전하고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사냥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생활은 남자는 밖에 나가서 사냥을 하면서 가정을 이끌어 가는 것이 남자의 삶이었습니다. 당연히 남자라면 들과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사냥하는 것이 남자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반면에 여성들은 장막 안에서 남자가 밖에 나간 사이에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면서 집을 지키는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여성들이 하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리브가를 좋아하여 리브가와 함께 했고 이삭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에서를 더 사랑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선택받은 자녀와 선택받지 못한 자녀의 삶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에서는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한 자지만 야곱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녀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1:2-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우리를 사랑했냐고 말하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고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며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에서는 선택받지 못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워하였고히브리어는 (사네 8130 VQACXS 동사 칼(능동태) 완료 공성 1인칭 단수) 가증히 여기다, 싫어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이삭의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싫어하시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원수를 표현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에서를 원수 취급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혐오하시고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였는데 너무나 미워하시고 다시 회복할 수 없도록 미워하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혐오는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야곱처럼 하나님 앞에서 선택함을 받아 구원을 얻고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장자의 명분을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소홀히 생각한다면 에서와 같은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나의 힘으로 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주님의 저주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영적 장자의 명분을 주셨다는 것을 이 시간 감사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경홀히 여기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에서와 야곱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에서와 야곱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첫째, 에서는 사냥꾼이며 야곱은 조용한 자라는 것입니다.

27절 바이게델루 하니아림 바예히 이쉬 요데아 차이드 이쉬 사데 비야아코브 이쉬 탐 요셰브 오할림

창25:27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에서와 야곱이 장성하면서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에서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의 삶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냥꾼이었으므로히브리어는 (차이드 6718) 사냥한 고기, 먹을 것,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추드 6679) 올가미, 함정, 사냥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에서와 같이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올가미와 함정을 파놓고 사람을 죽이는 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거짓된 교리들을 가지고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접근하여 함정을 파 놓고 영혼을 사냥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들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며 구원받은 백성들을 죽이는 자들이라는 것을 에서를 통하여 상징하고 있습니다.

 

창10:8-9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구스는 함의 장자이며 니므롯을 낳게 됩니다. 니므롯은 함의 자손으로서 저주받은 가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세상에 첫 용사가 되어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냥꾼이라는 단어를 똑같은 차이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니므롯(니므로드 5248) 반역, 우리 반란을 일으킵시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니므롯은 자신의 힘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반역한 자이며 바벨론 제국의 창시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대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자가 니므롯입니다. 이 사람은 사냥꾼이며 자신의 힘을 믿고 살았던 선택받지 못한 자의 자손입니다. 이처럼 에서도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한 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므롯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 하나님께 반역하여 죄를 짓게 하는 것처럼 에서도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을 사냥하여 죽이는 자들의 표상인 것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라 장막에 거주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용한(8535) 완전한, 온전한, 옳은,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타맘 8552) 끊어지다, 소멸되다, 끝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야곱이 조용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성격이 조용하고 차분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신의 온전한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옳은 행위를 하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야곱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통하여 야곱의 저주가 끊어지고 완전하게 소멸되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야곱은 조용하게 장막에 거하는 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야곱의 모든 죄가 사라지고 끝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상징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에서는 들사람이라 늘 밖으로 나갔지만 야곱은 장막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장막에’ (오헬 168) 장막, 성전, 성막,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아할 166) 깨끗하다, 빛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하나님의 십자가 의로 구원을 받고 항상 주님과 함께 하면서 성막과 성전에서 생활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야곱의 삶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장막에 거했다는 것은 늘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면서 주님을 빛나게 하고 자신의 삶은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깨끗하게 원죄가 씻김 받은 자가 성전에서 영광을 돌리는 삶이 야곱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에서의 삶처럼 다른 사람의 영혼을 죽이고 마음을 다치게 하며 하나님께 반역하는 사냥꾼의 삶을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주님의 십자가 의로 구원을 받았으니 교회에서 주님과 함께 하면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 시간 우리는 야곱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야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사모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둘째, 야곱은 죽을 쑤고 에서는 그 죽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9절 바야제드 야아코브 나지드 바야보 에사브 민 하사데 베후 아예프

30절 바요메르 에사브 엘 야아코브 하리이테니 나 민 하아돔 하아돔 하제 키 아예프 아노키 알 켄 카라 쉐모 에돔

창25:29-30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은 장막에서 죽을 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들에 나갔다가 와서 배가 고프고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내가 피곤하니 네가 쑤고 있는 죽을 나에게 주어서 먹게 하라고 말합니다.

 

쑤었더니(주드 2102 CW.VHIMZS 와우접속사 동사 히필(사역능동)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거만하게 굴다, 사악한 짓을 하다, 오만하게 굴다, 라는 뜻입니다. 현재 야곱이 죽을 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야곱이 죽을 쑤고 있는 것에 대하여 깊은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의로 깨끗하게 되었고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이런 야곱이 죽을 쑤고 있는데 이 단어의 뜻에 거만하게 굴면서 자신이 현재 사악한 짓을 하고 사람들 앞에서 오만하게 굴었던 모든 것들을 회개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미 하나님에 의하여 원죄가 해결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어도 계속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죄가 바로 자 범죄입니다. 야곱이 죽을 쑤고 있는 것의 영적 의미는 바로 구원받고 자신이 오만방자하게 살고 있는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반복적인 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를 통하여 원죄를 해결 받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 범죄를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꼭 상급을 받기 위하여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소홀하게 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자 범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 속에서 무감각해지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셔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야곱은 장막에서 거주하면서 원죄를 해결 받고 자신의 자 범죄도 늘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있었다는 것을 죽을 쑤고 있는 모습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야곱이 죽을 쑤어놓은 것을 자신이 배가 고프니 달라고 하면서 먹고 있습니다.

 

내가 먹게 하라(라아트 3938 VHMMYS 동사 히필(사역능동) 명령법 남성 2인칭 단수) 탐욕스럽게 먹다, 게걸스럽게 먹다, 라는 뜻입니다. 에서는 야곱이 죽을 쑤어놓은 것을 달라고 하여 탐욕스럽게 먹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게걸스럽게 먹는 것은 바로 죄악을 먹고 있다는 것을 영적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에서는 선택받지 못한 자로서 죄악을 더 하나님 앞에서 짓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10:3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게 되고 마음에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여 멸시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서와 같은 자들이 탐욕을 부려 하나님 앞에서 많은 죄를 짓는 자들의 표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서가 배가 고파서 야곱이 죽을 쑤어놓은 것을 명령하여 달라고 합니다. 이 죽을 안 주면 죽일 태세로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이렇게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야곱이 만약에 주지 않으면 야곱을 죽일 수도 있는 이런 상황입니다. 이렇게 죄악들을 집어 먹는데도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죄악을 주어서 먹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죄를 짓는 것을 밥 먹듯이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야곱처럼 죽을 쑤어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지 에서처럼 죽을 먹듯이 죄악들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바로 죄악을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죄악을 더 짓고 사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팔고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사고 있습니다.

31절 바요메르 야아코브 미크라 카욤 에트 베코라티카 리

32절 바요메르 에사브 힌네 아노키 홀레크 라무트 베라마 제 리 베코라

33절 바요메르 야아코브 히샤비아 리 카욤 바이샤바 로 바이미코르 에트 베코라토 레아야코브

34절 베야아코브 나탄 레에사브 레헴 우니지드 아다쉼 바요칼 바예쉬티 바야캄 바옐라크 바이베즈 에사브 에트 하베코라

창25:31-34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에서가 야곱에게 죽을 요구하자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에서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야곱에게 팥죽을 받고 자신의 장자의 명분을 팔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이 받은 장자의 명분을 너무나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내게 팔라(마카르 4376 VQMMYS.Ch 동사 칼(능동태) 명령법 남성 2인칭 단수 연장형) 포기하다, 바꾸다, 넘기다, 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강력하게 에서에게 자신의 장자 명분을 팔라고 말합니다. 야곱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장자의 명분을 살려고 하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장자의 축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육체의 장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파는 순간 야곱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적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명령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형에게 팥죽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고 자신에게 넘겨 이제는 장자의 권한을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얼마나 장자가 되고 싶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야곱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영적 장자가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도 에서처럼 죽었던 자들인데 이런 자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영적 장자로 삼아주셔서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장자가 되어야 만이 아버지의 기업을 두 몫을 받을 수 있고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야곱은 이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이것을 너무나 소홀하게 생각했습니다.

 

가볍게 여김이었더라(바자 959 CW.VQIMZS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멸시하다, 경멸하다, 업신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에서는 자신이 받은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귀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멸시하며 더 나아가 현재 배가 고프다고 경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장자의 명분을 너무나 하찮은 가치로서 업신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의 명분이 싫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이 장자의 명분이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서에게 육적인 장자의 명분을 주었지만 자신은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사서 영적인 장자로서의 권한을 얻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업신여기고 멸시하고 경멸한 것이 무엇인지를 영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사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는 것을 예언한 장입니다. 예수님이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는데 여기에서 멸시를 받아 라는 단어가 바자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멸시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야곱은 자신을 위해서 멸시를 받았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 분이 멸시를 받고 죽어야 만이 자신의 영적 장자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선택받지 못한 자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장자의 명분을 경멸했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경멸하고 멸시하여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찮게 보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구원받고 장자의 명분을 받은 것이 얼마나 감사하며 기쁜 일인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세전에 선택해 주시고 육적인 장자가 아니라 영적인 장자로 삼아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구원을 주시고 천국의 기업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반면에 에서와 같은 자들은 자신들이 육적인 장자라고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무의미하게 보고 모욕하면서 주님을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영적인 장자를 무시하고 천국의 기업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제 내가 구원을 받았으니 야곱이 죽을 쑨 것처럼 항상 주님 안에서 자 범죄의 회개를 해야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나의 원죄가 사라졌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이 죄를 짓는 자 범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좋아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며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운동력 있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 범죄를 해결할 때입니다. 이 시간 내가 받은 구원의 영적 장자를 절대 포기하지 말고 남에게 양도하거나 우습게 보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원어 설교말씀] 떡 관원장에 나타난 율법주의자의 최후(창 40:16-23)

 

[창세기 원어설교말씀] 떡 관원장에 나타난 율법주의자의 최후(창 40: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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