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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성경공부] 유대교의 종교적 분파(바리새, 사두개파)

르호봇 2021. 4. 12.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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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이스라엘 성경공부 중에서 유대교의 종교적 분파인 바리새, 사두개파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모세오경만 고집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까 논의하면서 모의했습니다. 이 종파들은 예수님 당시에 종교적 힘을 과시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일등공신들입니다. 우리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를 보면서 현재 교회가 자신들의 입장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기 위해서 복음은 뒷전이고 눈에 보이는 이익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이 시간 교회가 기득권 싸움을 하지 말고 낮아져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유대교의 종교적 분파(바리새, 사두개파)

 

유대인들이 B.C. 538년에 있었던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뒤에 두 가지 경향이 현저히 나타났다. 그 중의 하나는 성전 제사와 의식들을 계속하는 것과 관계가 있었다. 포로기 이후에는 대제사장이 유대 국가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정치적인 관심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제사장과 왕의 직책이 한 사람에게 부여되었던 마카비의 반란 이후에 더욱 그러하였다.

 

또 다른 경향은 율법에 대한 서기관의 새로운 관심, 즉 율법의 전수와 해석이었다. 처음에 이 두 관심은 일치하였으나 얼마 후에 그들 사이에 균열이 일어났다. 따라서 원래는 동일한 직책을 맡은 사람의 공통적인 책임이었을 성전의 일과 율법의 일이 서로 구분이 되어 한편은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고 다른 한편은 종교적 문제에 관여하게 되었다.

 

1. 바리새파

그리스도의 탄생 전후 세기들에 살았던 유대인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모든 파당 사이에서 바리새파는 가장 커다랗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종파였다. 신약성경에서 어떤 다른 종파보다도 더 많이 언급되고 있다.

 

바리새(Pharisee)란 명칭은 구별되다”, 혹은 “-로부터 분리되다란 의미의 히브리어 페루쉬(perush)에서 유래하였다. 바리새란 명칭의 최초의 사용은 요한 힐카누스가 통치하였던 B.C. 1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리새주의(Phariseeism)의 발전에 기여하였던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율법주의, 바벨론 포로 시대에 시작된 토라 종교(the religion of the Torah)였다. 바벨론에서의 귀환 이후 성전 제사의 확장으로 회당에서의 율법 공부가 강조되었다.

 

2. 사두개파

유대인 가운데서 두 번째로 중요한 종교적 종파, 바리새인들이 주로 중간계층의 사람들이라면, 사두개인들은 부유한 귀족층과 특히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제사장 계급을 대표하는 단체였다. 대부분의 사두개인들이 제사장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모두가 다 제사장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는 돈 많은 상인들, 정부 관리들, 그리고 기타 특수층이 많이 있었다(후자는 하시딤파의 회개와 갱신운동에 가담하지 않는 한에서 사두개파에 가담하였다). 그러므로 근본을 따지고 보면 이들은 본래 종교단체라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인 단체로서, 현 위치를 그대로 고수해 보자는 뜻에서 형성된 단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구전 율법(Oral Law)을 주장하는 반면에 서기관과 바리새파의 유전은 용납하지 않았다. ‘토라인 오경만을 표준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1226절에서 죽은자들의 부활에 대한 증거로써 창세기의 내용을 인용하였다. 하시딤파의 ‘율법의 울타리가 구약성서의 한계선을 넘어가는 확장을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주장하기를 새 율법은 오경의 율법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의 이러한 요구에 굴복하였다. 사두개파는 육체 부활에 있어서 바리새파와 동의하지 않으며(눅 20 : 27 - 40, 행 23 : 8) 미래의 심판을 부정하였다.

 

사두개파의 전통과 바리새파의 전통 사이에 더 독특한 차이점이 있었는데, 사두개파는 재판 과정에서 엄격한 판단을 내렸던 것 같고 바리새파는 관대한 방향으로 기울어졌던 것 같다. 바리새파의 태도는 죄를 지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회피하려고 진지한 노력을 하였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판단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릇된 판단을 선포할 수도 있는 위험에서 자기들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태도를 보여주는 명백한 모범 하나는 가말리엘의 충고다(5 : 38). 가말리엘은 자기 시대의 지도적인 바리새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사도 바울에게 사형선고를 내려야 옳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대하여 산헤드린에서 다음과 같은 사상적인 양식을 제공하였다.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에게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부분적으로 그가 사도들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의 바리새파적인 사상 때문이었다. 반면에, 사두개인들은 합리적인 편의주의를 근거로 삼고 무거운 형벌을 명령하였다. 이와 같이 사두개인들에게는 전반적으로 정치적인 배려가 훨씬 더 큰 역할을 하였다. 요한복음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를 처형해야 할 정치적인 이유를 변론하고 있다(11 : 48). 이와 비슷하게, 주님의 동생 야고보에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사형선고를 내린 일과 이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꺼려한 사실도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서로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요세푸스가 사두개파의 특징으로서 그들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자기 자신의 운명을 만드는 자라고 보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신앙이 허약하다는 표와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자유사상가들과 신앙이 없는 사람들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들에게도 율법은 신성한 것이었다.

 

천사와 영들의 존재를 반박하였으며 바리새파 가운데서는 강렬하였던 메시아의 대망과 예견이 사두개파에 의하여 촉진되지는 않았다. 사실상 바리새파가 귀하게 여긴 모든 교리들에 무관심하게 대하거나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왜냐하면 구전 율법도 전통이 있고 의식과 법률의 관례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모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토라와 같은 수준의 것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토라의 말씀이 준행될 수 있는 곳은 주로 성전이었고, 제사장들의 권위로 주어지는 규례들이 백성들의 실행에 충분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록된 토라가 구전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은 반면, 구전을 과거의 유물 이상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바리새파에게 있어서 토라가 신앙의 중심이었다면 사두개파에게 있어서는 토라가 신앙의 외곽지역(circumference)이었다. 이 안에서만이 유대교에 생소한 신앙과 관습들이 용납될 수 있었다. 그들의 조직에 가담한 사람들은 헬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므로 동료 유대인들에게는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게만(Gehman)은 사두개파에 대하여 이렇게 저술하였다.

장로의 유전을 대단히 강조하는 바리새파와는 반대로 사두개파는 그들이 성경 안에서만 발견하였던 교리들로 그들의 신조를 제한시켰다. 그들은 기록된 율법만이 준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Joseph. Antig.)"

 

사두개”(Sadducee)란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주장되어 오고 있다. 헬라어 Sadukaioi의로운이란 뜻을 지닌 히브리어 Zaddik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히브리어 Zadukim에서 파생되었다.

 

외스텔리(Oesterley)는 이러한 유래가 언어학상 불가능하다고 하여 배격한다. 코울리(Cowley)사두개이교도(infidel)란 뜻의 페르샤어 Zinkik(아랍어 Zindikun, 복수는 Zanadiku)의 와전이란 설을 발전시켰다. 이 단어는 B.C. 220년 경에 조로아스터교인“(Zoroastrian)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따라서 외국의 사상을 좋아하고 일반적으로 유대인에 의하여 지켜지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들을 지적하는 데 사용되었으리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솔로몬의 치세 때 대제사장에 있던 아비아달을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올랐던 사독(Zadok)의 이름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사독의 자손들은 포로 시기에 세습적으로 제사장직을 맡았으며(대하 31:10, 겔 40 : 46, 48:11), 이 이름은 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을 이르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숫자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극히 소수였으나 학식을 겸비한 자들로서 특히 그 나라의 계급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의 운세는 시시때때로 다변적이었다. 요한 힐카누스의 말년에는-또한 알렉산더 얀내우스(B.C. 103-76)때도- 영향력이 있었다. 아리스토불루스 2(B.C. 67-63)가 통치하는 동안에 다시 막강한 세력을 장악하였으나 헤롯에 의하여 박해를 받고 그 수효가 감소되었다.

 

로마가 유대를 합병시켰을 때 대제사장은 유대인의 공식적 대표자로서 간주되었기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지배계급에 머물게 되었다. A.D. 60년과 70년 사이의 대제사장은 항상 사두개인이었으며, 이것은 그가 공공의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들의 본거지는 성전이었으며, 바리새인들은 회당에서 그들의 지지자를 발견하였다. 사두개인의 수효는 바리새인과 비교하여 그다지 열세에 있지도 않았다. 요세푸스는 당시 그리스에서 유사한 종교관과 저급한 도덕생활을 하였던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s, 철학적으로 쾌락주의를 표방한 Epicurus의 추종자들)와 사두개인들을 비교하였다. 사두개파는 그리스도에 대한 반대를 드러내고 조직화시키는 데 있어서 바리새파와 또한 헤롯당과 합세하였다.

 

거의 주후 70(이 몇 해 전에 바리새파와 열심당들이 성전을 장악하기는 하였지만)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영향력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지위가 박탈당함과 동시에 그들의 영향력도 중지되고 말았다. 1세기 기간 동안에 사두개파의 세력은 점점 쇠약해 갔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바리새파의 규준에 따라서 예배 행위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마카비 시대에 일어난 갱신운동을 사두개파가 거절함으로써, 하나님 사상이 약화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이로써, 하나님 사상은 외래의 헬라 사상에게 침식당하였다. 이와 같이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는 신앙을 비웃기 위하여 예수에게 조롱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막 12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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