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구약성경 말씀

[예레미야 애가 주일 강해설교]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슬퍼함(애 1:1-22)

르호봇 2021. 9. 1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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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예레미야 애가 주일 강해설교 중에서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슬퍼함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립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예언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죄악을 짓다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예루살렘은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복음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슬퍼함(애 1:1-22)

 

1-6, 슬프다, 이 성이여

[1]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읽으면, “백성이 가득하던 성이 어찌하여 적막히 앉았는고. 그것이 과부같이 되었도다. 열국들 중에 크고 지방들 중에 공주이었던 그가 종이 되었도다(KJV).

예루살렘 성은 거민의 수가 심히 줄었다. 바벨론 군대의 침입과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어떤 이들은 사방으로 도망쳤으며 또 많은 이들은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에 이제 예루살렘 성의 거민의 수는 매우 조금이며 성은 적막한 곳이 되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과부와 같다고 표현한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가족들을 위하여 식사 준비, 빨래, 청소 등 가사의 일로 바쁘게 생활하는, 그러나 행복한, 보통 여인들과 대조하여 한가하고 쓸쓸하며 행복과 낙이 없이 지내는 과부에다 비유한 것이다.

또 예레미야는 열국들 중에 크고 지방들 중에 공주같이 존귀하던 성 예루살렘이 이제는 종이 되었다고 표현한다. 예루살렘 성은 다윗 왕의 성이며 솔로몬 왕의 성이며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성이었다. 그 성은 세상적으로도 부귀와 권세와 영광이 있었던 성이었다. 그곳은 이스라엘 영토 중에서 가장 귀한 곳이며 유다의 여러 성읍들 중에서 가장 귀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은 경건한 성도들이 가장 사랑하고 즐거워했던 성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137편의 저자는 말하기를,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라고 하였다(137:6). 그러나 이제 이 아름다운 성이 바벨론 관리들의 종처럼 그들의 지배와 통제를 받고 있으며 그 거민들은 학대와 강제 노역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2]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본절의 주어는 예루살렘 성이다. 그것은 선지자 자신을 포함하여 그 성의 모든 거민들을 가리킬 것이다. ‘밤새도록이라는 원어(발라옐라)는 ‘밤에라는 뜻이다.

그 성의 거민들은 밤에 애곡하였다. 왜 그들이 밤에 애곡하였는가? 그들이 아마 낮에는 노역으로 수고로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밤에, 즉 좀 쉬고 웃고 해야 할 시간에 쉬지 못하고 웃지 못하고 애곡한다는 뜻일 것이다.

또 예루살렘 성을 사랑하던 모든 자들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모든 친구도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다. 전에 이스라엘과 유다가 강한 때에는 조공을 바치고 친근히 하고 동맹관계를 맺었던 이웃 나라들이 많았으나 예루살렘이 멸망할 당시에는 그들이 다 등을 돌렸다. 이웃 나라들과의 튼튼해 보이던 동맹관계가 하루아침에 깨지는 것은 역사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일이다.

[3]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저가 열방에 거하여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유다가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사로잡혀 갔다는 말은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유다 백성이 환난과 많은 수고를 당하는 중에(NASB) 혹은 수고를 당한 후에(NIV) 포로로 사로잡혀갔다는 뜻일 것이다. 그들은 이방 나라들에 거하여 충분한 잠과 휴식을 취하지 못하였다.

[4]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이 황적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저도 곤고를 받았도다.” ‘처량함이라는 원어(아벨롯)는 ‘애곡함이라는 뜻이다(BDB, KJV, NASB, NIV). 이것은 시적 표현이다. 도로들은 애곡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기쁜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또 모든 성문은 황폐하고 적적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고 고통을 당하며 그 성 자체가 곤고한 상태에 있었다.

[5-6]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 저의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저의 목백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이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 같도다.” 유다 백성의 대적들은 그들의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은 형통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2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면 열국 가운데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고(13), 반대로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들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들이 머리가 되고 그들은 꼬리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43-44).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곤고케 하셨다.

사람이 다 죄인이지만 죄가 작을 경우 하나님께서 그렇게 무섭게 징계하시지는 않는 것 같으나, 사람이 많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무섭게 징벌하신다. 그들은 곤고함을 당하였고 그들의 어린 자녀는 사로잡혔고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갔다. 그들의 방백들은 꼴을 찾지 못해 힘없이 달리는 사슴과 같았다. 노아의 시대에도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패괴하고 강포가 땅에 가득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그 온 땅과 거기 거하는 생물들을 멸하셨다(6:5, 11, 13).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많다고 깨달을 때뿐 아니라, 조금 있을 때에도 회개해야 한다. 죄를 회개치 않고 고집하면 큰 벌을 받고 결국 멸망하게 된다.

1절로 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크게 여기거나 의지하지 말자. 예루살렘의 영광은 그 거민들이 범죄할 때 다 상실되었고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황폐케 되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는 다 없어질 것들이다. 땅의 모든 것은 헛되다(1:2).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40:6).

둘째로, 우리는 인간 친구를 너무 신뢰하지 말자. 인간 친구는 어느 날 우리를 배신하고 떠나갈 수 있다. 그는 어느 날 더 이상 나의 친구가 아니고 나의 원수가 될 수 있다. 그는 내가 참으로 필요한 때 나의 위로와 도움이 되지 못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자.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의지하고 그의 명령만 순종하자. 그것이 인간의 본문이며 성경의 요지이다(12:13). 또 이것이 평강과 형통의 길이다(48:18). 이런 맥락에서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초월하는 삶을 살라고 교훈하셨다(눅 14:26-27, 33).

7-11, 그 결말을 생각지 않음

[7]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窘迫)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지나 돕는 자가 없고 대적은 보고 그 황적(荒寂)함을 비웃도다.”

군박이라는 원어(메루드)집이 없음, 정처 없음을 뜻한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지금 환난을 당하고 정처 없이 행하고 있다. 사람들은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한다. 옛날에는 성안에 평화와 즐거움이 있었다. 또 먹을것도 넉넉하였고 가족과 이웃 간의 사랑의 교제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에게 환난과 정처 없음뿐이다.

또 백성은 대적의 손에 빠졌다. 본서에는 대적’(차르, 9)이나 ‘원수’(오옙, 15)라는 말이 24번이나 나온다.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진다는 말은 대적이 지배하고 학대한다는 말이다. 이긴 자는 진 자를 지배하며 진 자는 이긴 자에게 자유를 빼앗긴다.

또 이런 상황에서도, 예루살렘을 돕는 자가 없었다. 예루살렘은 스스로도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고 그가 믿었던 애굽의 도움도 얻지 못했다. 물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도 못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하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이다.

또 대적들은 예루살렘의 황적(荒寂)함을 비웃었다. ‘황적함’이라는 원어(미슈밧)는 ‘멸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BDB). 예루살렘은 멸망하였고 대적들은 그 상황을 비웃었다. 예루살렘은 불쌍하기 그지없는 처지가 되었다.

[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같이 되니 전에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같이 되니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 그 적신(赤身)[벌거벗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저가 탄식하며 물러가도다.”

예루살렘의 근본적 문제는 그 거민들이 크게 범죄한 데 있었다. 작은 죄는 하나님께 쉽게 용서받기도 할 것이지만, 사람이 큰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망시키실 수밖에 없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그 거민들 중에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였다. 예레미야 5:1에 보면, 예루살렘 성은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죄를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를 반드시 벌하신다.

예루살렘의 죄는 또한 불결함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죄는 도덕적 불결이다. 예루살렘 거민들이 우상을 섬기고 부도덕하게 행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보기에 좋지 못하고 더럽고 추한 모습이다. 이런 불결함 때문에 그들은 멸망을 당한 것이고 육신적으로도 낮아지고 상하고 찢기고 더러워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다 부서져 공개되었고 왕궁도 공개되고 왕후와 공주들과 궁녀들은 다 짓밟힘을 당했다. 이전에 예루살렘을 높이던 모든 자들, 즉 예루살렘에 조공을 바치러 왔던 이웃 나라들이 이제는 예루살렘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업신여긴다. 예루살렘 거민들 자신도 탄식하며 물러갔다.

[9]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결국을 생각지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게 낮아져도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다는 말은 예루살렘의 영적 음란의 죄를 묘사한 것 같다. 예루살렘은 심히 죄악되었고 더러웠으나 그 결말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가 복이 될지 화가 될지를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현재의 일들만 보고 안심하며 즐겼지,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은 놀랍게 낮아졌다. 그 부요하고 영화롭고 평화로웠던 성의 멸망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렇게 수치와 궁핍을 당하고 있어도 예루살렘을 위로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어려울 때 위로의 말에 큰 힘을 얻는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고 권면하였다(살전 5:14). 성령께서는 보혜사 곧 우리의 위로자로 오셨다. 그러나 예루살렘에게는 위로자가 없었다.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라는 말은 원수가 거대해졌사오니’라는 뜻이다. 원수들은 거대한 세력이 되었고 예루살렘은 미약해졌다. 이런 처지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여호와여,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라고 호소한다. 죄로 인하여 징벌을 받는 성도에게도 한가닥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돌아보시면 그는 어떤 곤란 중에서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10]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을 금하여 주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사오나 저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가장 귀한 곳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한 성소로 이스라엘과 이방을 구별하셨다. 그러나 이방인이 성소를 짓밟고 그곳에 들어갔고 성도들은 이제 그것을 보고 탄식한다.

[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보물로 식물들을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에게는 먹을 것이 심각하게 부족하였다. 그들은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어 먹었고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고 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형편을 대신해 나는 비천하오니라고 표현한다. ‘비천하다는 원어(졸렐라)무가치하다는 뜻이다(BDB). 이스라엘은 무가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다시 하나님께 호소한다.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멸망당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소망은 그것뿐이다. 하나님의 돌아보심 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7절로 11절까지는 요약하면, 첫째, 예루살렘의 멸망의 상황에 대한 묘사이다. 예루살렘은 옛날의 즐거움을 기억할 뿐 지금은 고통과 슬픔뿐이다. 그들은 자유가 없고 돕는 자도 없고 원수의 비웃음을 받으며 벌거벗겨지고 탄식하고 있다. 그들은 놀랍게 낮아졌고 위로하는 자도 없다. 원수는 커졌고 성전은 짓밟혔으며 먹을 것이 심각히 부족하였고 심히 비천하고 무가치한 자가 되었다. 둘째,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은 그들의 큰 죄와 불결 때문이었다(8-9). 그들은 도무지 미래를 대비치 않았다. 셋째, 멸망하는 예루살렘에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뿐이다. “여호와여 . . .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9).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11). 죄인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대비하자.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삶으로써 대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해야 하며,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평강을 누릴 것이다. 이사야 48:18,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체험할 것이다. 이사야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 . .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또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의식주의 공급함도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12-17, 주께서 징벌하심

[12]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 . . .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라고 한다.

유다 땅을 지나는 자들은 유다 백성의 근심과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것 같았다. 그들은 유다 백성의 고통을 동정하지 않았다. 사람이 먹을 것이 풍족하고 평안할 때 주위의 가난한 자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잘못이다(16:49). 예수께서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주 안에 있는 형제가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지옥 형벌을 받을 죄라고 말씀하셨다(25:42-43). 고난 받는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진노하시는 날이 있다. 그는 진노하신 날에 유다 백성을 괴롭게 하셨다. 역사상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종종 있었고 마지막으로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날이 올 것이다(2:5).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평안도 주시지만 환난도 주신다(45:7).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다(11:36).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10:29).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외적인 현상만 보지 말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아야 한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잠언 3:6의 교훈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라는 뜻이다.

[13] [그가]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 . . .

선지자는 또 말한다. “[그가]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그가] 내 발 앞에 그물을 베푸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그가 나를] 종일토록 고적(孤寂)하여 곤비케 하셨도다.”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뼈들에 불같은 고통을 보내셔서 견딜 수 없게 하셨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발 앞에 그물을 베푸셔서 그로 물러가게 하셨고 종일토록 쓸쓸하여 곤비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셨다. 인생이 누리는 복도, 화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불같은 화를 내리셨다.

[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케 하셨음이여, 내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붙이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죄악들과 그 결과를 손으로 묶고 얽어 그의 목에 올리셨고 그의 힘을 피곤케 하셨다. 또 주께서는 그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그를 붙이셨다. ‘주께서라는 원어(아도나이)주인, 주권자를 가리키는 말이며, 15절에도 두 번 더 나온다.

모세의 율법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만일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면 그들 다섯 명이 원수 백 명을 쫓고 그들 백 명이 원수 만 명을 쫓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나, 반면에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치 않으면 원수에게 지고 세계 만국으로 흩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26:7-8, 17). 유다의 패배는 이 율법대로 된 것이었다.

[15] 주께서 내 지경 안 모든 용사를 없는 것같이 여기시고 . . . .

예레미야는 또, “주께서 내 지경 안 모든 용사를 없는 것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소년들을 부수심이여, [주께서] 처녀 유다를 술 틀에 밟으셨도다라고 말한다. ‘없는 것같이 여기셨다는 원어(실라)경멸하셨다(BDB), ‘거절하셨다(KB, NASB, NIV)는 뜻이다. 주께서는 유다 지경 안의 모든 군사들을 경멸하며 거절하셨고 대회를 열어 그 청년들을 죽게 하셨다. 원문에는 처녀 유다앞에 주께서라는 말이 또 있다. 주께서는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다. 유다는 큰 고통과 굴욕과 멸망을 당하였다.

[16]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이는 내 영혼을 소생시킬 위로자가 나를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이를 인하여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징벌과 고통과 멸망을 가리킨다. ‘외롭다는 원어(쇼메밈)황폐하고 쓸쓸하다는 뜻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참혹한 멸망의 현실 앞에서 울었다. ‘내 눈에라는 말이 원문에는 두 번 반복되었다(에니 에니). 선지자의 눈에서는 비오듯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위로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멀리 떠나셨고 돕지 않으셨다. 원수들은 유다 백성을 이겼고 유다 자손들은 황폐하고 쓸쓸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왜 유다 백성을 멀리 떠나셨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멀리 떠나시는 것은 한가지 경우뿐, 즉 사람이 범죄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고 말하였고, 에스겔 8:6, “그들이 여기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고 했다.

[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면에 있는 자를 명하여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저희 가운데 불결한 자 같도다.”

시온이 두 손을 펴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며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시온을 위로할 자가 없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위로하지 않으시고 사람들 중에도 위로자를 찾을 수 없다. 유다의 사면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대적이 된 것은 하나님의 명령 곧 작정대로 된 것이었다. 하나님의 작정대로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 불결한 자같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요셉은 형들에게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말했고(45:8), 다윗은 자기를 저주하는 시므이에 대해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며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라고 말했다(삼하 16:10-11).

12절로 17절까지도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증거한다. 예루살렘은 근심과 고통 가운데 있고 골수까지 아팠고 넘어졌고 황폐하고 쓸쓸하며 곤비하였다. 그들의 군대는 경멸과 죽임을 당했고 유다는 짓밟혔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비오듯 눈물을 흘린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며 여호와께서 명하신 일이다. 멸망의 때에 유다에게는 위로자가 없었다. 멸망의 원인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자.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는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 좋고 나쁜 모든 일을 다 섭리하신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죄를 멀리하자. 예루살렘의 멸망의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우리가 세상에서 조심해야 할 일은 오직 죄짓지 않는 것이다. 죄는 모든 좋은 것을 빼앗고 가로막고 모든 재앙을 가져온다. 죄는 불행과 사망의 원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받고 의롭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일한 위로자이시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며 위로와 승리의 길이다.

18-22, 나의 거역과 패역 때문에

[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여호와는[여호와 그는] 의로우시도다. [이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거역하였음이로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근심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여호와 그는이라는 원문의 표현은 강조적 표현이다. 여호와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의롭다는 말은 기준에 맞다는 뜻이다. 그 기준은 하나님 자신, 즉 하나님의 속성, 그의 뜻, 그의 계명과 율법이다. 하나님의 법은 사람의 양심에도 쓰여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일만 하신다. 그는 도덕적이시다. 그의 심판은 의롭다. 이것은 의인에게는 감사한 일이지만 악인에게는 두려운 일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의롭다고 말하는 까닭은 유다의 멸망이 그의 공의로운 처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음이로다라고 말한다. 예레미야가 무슨 큰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그 자신도 부족한 인간이었지만, 그는 지금 유다 민족을 대표하여 유다의 죄악 됨을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이다. 유다의 멸망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까닭에 왔다. 그들의 죄는 사망과 불행을 가져왔다. 죗값은 사망과 불행이다.

예레미야는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 그는 유다 백성들에게 지금이라도 이 재앙이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이요 우리의 죄 때문에 온 것을 알라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또 그는 그들이 그의 근심을 보라고 말한다. 죄는 불행과 재앙을 가져오고 근심을 가져오지만, 의는 평강과 기쁨을 가져온다. 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소년 소녀들을 나의 처녀와 소년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사로잡혀 갔다고 말한다. 그들은 2세들이요 다음 시대를 책임질 자들이며 미래의 소망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로잡혀 갔고 노예가 되었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다 빼앗긴 자가 되었다. 이제 유다 나라의 소망은 없어졌고 미래는 사라졌다.

[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성[회복]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도다.”

내 사랑하는 자들은 유다의 이웃 나라들, 어려울 때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던 동맹국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인데, 그들은 전에는 유다와 친근한 교류가 있었지만, 유다가 어려울 때 관심과 동정을 가지지 않았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유다를 속였고 동맹으로서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또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자기 영혼을 회복시킬 음식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고 죽어 갔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킬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부족하였다. 당장 먹을 양식들이 없었다.

[20]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 . . .

예레미야는 말한다.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이는]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번뇌하오니[번뇌함이니이다]. [이는]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으로는 칼의 살육이 있고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

예레미야의 마음은 괴롭고 번뇌하였다. 평안이 없었다. 행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호소하며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을 찾고 그의 이름을 부른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 하나님을 믿는 자이다. 하나님을 알고 믿고 의지하는 자마다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낙심치 않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다.

또 예레미야는 유다의 번뇌와 고통, 즉 그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 말한다. 그것은 그의 패역이 심히 컸기 때문이었다. 유다 백성은 죄 때문에, 큰 죄 때문에 지금 심한 고통과 불행 가운데 떨어졌다. 길거리에는 칼의 살육이 있었고 집 안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과 부상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었다.

[21] 저희가 나의 탄식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고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저희가 나의 탄식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고 나의 모든 원수가 나의 재앙을 들었으나 주께서 이렇게 행하심을 기뻐하나이다. 주께서 반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 저희가 나와 같이 되겠나이다.”

저희는 본절 중간에 나오는 나의 모든 원수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유다 백성의 탄식을 들었지만 그들 중에는 유다를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고난당하는 자에게 위로의 말이 큰 힘이 되므로 성경은 성도가 고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함으로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하는 자가 되라고 교훈하지만(고후 1:4), 유다 백성은 그런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원수들은 유다 백성의 재앙을 들었으나 주께서 그렇게 행하심을 기뻐하였다. 그들은 무정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부족과 악함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었다.

본절은 또한 유다의 멸망이 주께서 행하신 일이었음을 증거한다. 그것은 주권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다. 이미 앞의 12, 17절은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그 사면에 있는 자들을 대적이 되게 하셨음을 말했고, 14절과 15절은 주(아도나이, 3)께서 유다를 원수의 손에 붙이셨고 그 용사들을 죽게 하셨고 유다를 밟으셨다고 말했다.

본절의 마지막 구절은 다시 번역하면, “주께서 선언하신 날을 오게 하셨나이다. 그러나 저희는 나와 같이 되리이다.” ‘이르게 한다는 원어(헤베사)는 완료형이다. 한글개역과 영어성경들은 원수 나라들의 멸망을 가리키는 말로 번역했다. 물론 히브리어 완료형은 예언적 의미나 확신과 소원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완료형의 일반적 뜻대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그러나라는 연결어가 없이 주제가 유다로부터 원수 나라들로 바뀌는 것은 자연스럽지는 않으나 끝부분은 원수들의 멸망을 말한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앞부분은 유다의 멸망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바대로 된 일이었다. 그는 그가 선언하신 그 날을 오게 하셨다. 심판과 멸망의 그 날은 기어코 오고야 말았다. 그러나 유다의 원수들도 멸망할 것이다.

[22] 저희 모든 악을 주 앞에 나타내시고 나의 모든 죄악을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저희 모든 악을 주 앞에 나타내시고 나의 모든 죄악을 인하여 내게 행하신 것같이 저희에게 행하옵소서. [이는]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곤비하니이다[곤비함이니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이 그들의 모든 죄악 때문임을 다시 고백한다. 18절과 20절에 이어 본문에서 세 번째로 언급한 말씀이다. 유다의 멸망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18), 그들의 패역이 심히 컸기 때문에(20), 또 그들의 모든 죄악 때문에(22) 온 것이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벨론 등의 원수 나라들도 유다와 똑같이 그들의 죄 때문에 멸망을 당하게 하시기를 하나님께 탄원한다. 바벨론의 죄란 우상숭배, 부도덕함, 무정함, 포학함 등의 죄악이다. 또 마지막 문장 앞에는 원문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이렇게 탄원하는 것이 그의 탄식이 많고 그의 마음이 곤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다 나라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으나 바벨론 백성 앞에 범죄한 것은 아니었다.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 백성에게 행한 강포와 악행, 유다 백성이 그들에게 당한 억울한 학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실 날이 있을 것이다.

18절부터 22절까지의 내용의 요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유다 멸망의 비참함이다. 유다의 멸망으로 예레미야는 근심, 고통, 번뇌, 탄식, 곤비함이 있었다. 유다의 소년 소녀들은 포로로 잡혀갔고 유다는 동맹국들에게 속임을 당했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먹을 것이 없어 기진해 죽어갔고 칼에 죽은 자나 굶주리거나 병에 걸려 죽는 자가 가득했고 위로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둘째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다. 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이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음이로다.” 유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18), 심히 큰 패역함 때문에(20), 모든 죄악 때문에(22)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 멸망한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시다. 하나님께서는 의와 불의, 선과 악을 공정하게 판단하시며 공정하게 보응하신다. 이 공의는 장차 바벨론에게도 또 마지막 날 온 세상에도 적용될 것이다.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죄는 고통과 근심, 번뇌와 곤비함, 굶주림과 포로로 잡혀감, 살육과 사망의 원인, 즉 멸망의 원인이다. 반면에, 의는 생명과 평강과 기쁨의 원인이다(48:18).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이나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말자. 유다는 동맹국들이 있었으나 전쟁 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속임을 당했다. 자녀들은 포로로 잡혀갔고 식물들은 고갈되었다.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절망할 때가 올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말자.

셋째로, 우리는 징벌 중에서라도 회개해야 한다. 유다 백성은 재앙을 당하면서도 금방 회개하지 않았다. 선지자만 그들을 대표해 회개의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재앙을 당하면 모든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9: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11:18). 우리는 징벌 중에서라도 회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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