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구약성경 말씀

[아가서 1장 주석 성경말씀]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고백(아 1:1-17)

르호봇 2021. 8. 15.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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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아가서 1장 주석 성경말씀 중에서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고백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솔로몬은 아가서를 기록하면서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가서를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술람미 여인과 같은 내가 주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큰 사랑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오늘도 아가서를 통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을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평생 사랑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하겠습니다.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고백(아 1:1-17)

 

[1] 솔로몬의 아가라

아가서의 인간 저자는 솔로몬 왕이다. 열왕기상 4:32는 솔로몬이 잠언을 3,000개나 말했고 노래를 1,005개나 지었다고 증거한다. 아가서도 그중의 일부일 것이다. 그러나 아가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며 구약성경의 일부분이다. 아가서를 성경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은 처음부터 정통 유대교의 견해이며 예수님의 견해이었고 또 초대교회의 견해이었다.

아가서의 주제는 사랑이다. 아가서는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인 간의 사랑을 통해(3:11; 6:13) 이상적 부부의 사랑을 증거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사랑의 관계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피흘려 사신 교회와의 사랑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하고 또 이스라엘의 배교(背敎)를 영적 행음으로 표현한다(3:6-8, 14; 1:2; 3:19 ).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 교회의 관계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되었다(5:22-33).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2절을 직역하면, “그가 그의 입의 입맞춤들로 내게 입맞추게 하라. 이는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다.” 히브리 말에는 남성, 여성 같은 성이 있다. 아가서에서는 단어의 형태, 동사의 어미 등을 고려하면 그것이 누구의 말인지를 알 수 있다. 2절은 신부의 고백이다. 신부는 신랑의 사랑을 포도주보다 나은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포도주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음식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성도에게 큰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하였다(4:7).

이제 신부는 신랑의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사모한다. 신부의 사랑은 신랑의 사랑을 사모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사모할 자이시다. 시편 73편 저자는 고백하기를,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했다(73:25).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하였다(3:7-8).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너무 부족하다. 우리는 그 사랑을 더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 사랑이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사랑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붙어 오르기 때문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했다(고전 16:22). 우리도 그렇게 불붙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3]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본절을 다시 번역하면, “네 아름다운 기름의 향기 때문에 네 이름이 기름같이 부어졌도다. 그러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네 아름다운 기름이란 주님의 머리와 몸에 발라진 향유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복음 12: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는 말씀과 비슷하다. 주님의 몸은 성령으로 충만하시며 그의 거룩과 사랑과 온유는 아름다운 향기와 같다.

또 하나님의 이름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온 세상에 향유같이 부어졌다. 시편 8:1에서 다윗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하늘의 천사들은 큰 음성으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노래하였고, 또 천지만물은,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라고 화답하였다(5:11-13).

그 이름의 향기 때문에 처녀들은 그를 사랑한다. ‘처녀들은 성도들을 상징한다. 예수께서는 열 처녀 비유에서 성도들을,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에 비유하셨다(25:1). 바울도 성도들을 그리스도께 중매할 처녀들이라고 표현하였다(고후 11:3). 요한계시록 14:4는 성도들을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처녀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救贖)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성도들은 은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향기름 같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향기를 깨닫고 그를 더욱 사랑하자.

[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본절을 다시 번역하면,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우리는 포도주보다 나은 네 사랑을 칭송하리라. 그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난다는 원문(도데카 미야인)2절과 같은 구절로서 포도주보다 나은 사랑을 가리킨다.

우리라는 말을 라는 말로 바꾸어 읽으면 뜻이 잘 통한다. 여기에 우리는 신부 자신을 포함한 개념이다. 아가에서 신부는 한 개인으로 나타나지만, 그는 성도들 전체를 대표하는 것 같다. 즉 하나님과 어떤 한 개인, 그리스도와 어떤 한 개인과의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전체, 그리스도와 성도들 전체와의 관계인 것이다.

본문은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고 말한다. 성도는 주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이끌어주시기를 구하며. 또 주를 따라 주께로 달려가겠다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12:11) 경건에 이르기를 힘써야 한다(딤전 4:7).

본문은 왕인 신랑과 신부의 친밀한 관계를 왕이 나를 침실로 이끄신다는 말로 표현한다.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는 부부 관계이며 그것은 마음의 교통과 사랑 그리고 침실에서의 육체적 교통을 포함한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함은 친밀한 교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것은 영적인 친밀한 교제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를 칭송한다. 시편 73:25-26,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옛날 영어성경은 그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다는 구절을 정직한 자들은 너를 사랑하였도다라고 번역했다(KJV). ‘정직한 자들이라고 번역한 원어(메솨림)는 성경에서 주로 올바른 것혹은 올바르게라는 뜻으로 쓰인다. 주를 진실히 믿고 계명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하는 자들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그를 사랑한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영적 교제를 사모하자. 또 그 교제로 인해 주를 더욱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또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의와 선만 행하며 그를 더욱 사랑하자.

[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이라는 원어는 예루살렘의 딸들이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교인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특히 본문은 고난 받는 교회의 모습이나 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낙심하기 쉬운 처음 믿는 자들이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교훈이 된다.

내가 비록 검다는 말은 교회의 아름답지 못한 모습, 연약한 모습, 무질서한 모습, 교인들 중 어떤 이들의 잘못,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핍박 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외적 모습은 거무스름하다.

그러나 교회는 아름답다. 교회는 내면적으로 영광스러운 교회이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고 거룩케 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전 6:11).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10:14).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은 새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며 그 의도는 성취되었다.

교회의 외적 모습은 마치 게달의 장막과 같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후손 중 게달의 자손으로서(25:13) 아랍 유목민이다. 그들은 검고 투박한 천막에서 생활하는 자들이다. 게달의 장막은 뜨거운 햇볕과 폭우로 거무스름하고 투박해진 모습이다. 교회의 외적 모습은 게달의 장막과 같이 보기에 그렇게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나 교회는 내면적으로 솔로몬의 휘장과 같다. 솔로몬의 휘장은 의심할 것 없이 가장 고급스럽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거룩하여졌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 보배로운 자들이며 또 장차 영광스러운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받을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외적 모습으로 인해 낙심치 말자. 교회 안에 악한 자들이나 위선자들이 있다고 낙심치 말자. 하나님의 교회의 내면적 모습과 영광을 보자. 성도 개인도 그러하고 지교회나 전체 교회도 그러하다. 교회는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 같음을 알자.

[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내가 일광에 쬐인다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기때문이었다. ‘포도원지기라는 원어는 포도원들 지키는 자이다. ‘내 어미의 아들들은 촌수로는 형제이지만, 실상은 거짓 형제들, 위선적 교인들을 가리키며 그들은 옛날부터 오히려 참 성도들을 괴롭혀왔다. 구약시대에도, 예수님과 사도들 당시에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실상 마귀의 자식이요(23:33; 8:44) 사탄의 사자요(고후 11:15) 십자가의 원수이다(3:18). 그들은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 아니요 허무는 자들이다.

그들은 참 성도로 하여금 그들의 포도원들을 지키게 하였다. 거짓 목사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거짓된 방향으로 인도하였다. 신부는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라고 말한다. ‘나의 포도원이라는 원어는 내 자신의 포도원이다. 그것은 참 교회를 가리킨다. 그것은 참 성도가 참 교회의 임무를 바르게 수행하지 못했음을 말한다. 참 교회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파함으로 영혼들을 구원하고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이 영적으로 자라 온전케 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거짓된 종들과 교인들은 교회의 참 임무를 버리고 교회가 다른 일들, 곧 헛된 세상 일들에 힘쓰게 한다. 교회는 이것을 반성하고 본래의 모습과 위치로 돌아와야 한다.

교회는 환난과 핍박, 부족과 연약 등으로 인해 외적인 영광을 잃어버리고 검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있는 위선자들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비록 교회의 외적 모습이 그럴지라도, 참 교회는 항상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피 흘려 사신 교회를 온전케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고난과 연약 가운데서라도 자기의 본분과 임무를 다해야 한다.

[7]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

성도는 고난과 핍박 중에서라도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신부는 신랑에게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고 말한다. 신랑은 양떼를 치는 목자로 묘사된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목자되신 하나님과 주님을 가리킨다. ‘양떼 먹이는 곳은 양들을 위한 양식이 있는 곳이다. 성도는 주님의 말씀의 교훈을 사모하며 그 교훈이 있는 곳을 찾는다.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은 오정 곧 가장 더운 시간, 즉 환난의 시간에 쉴 수 있는 그늘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성도는 환난 중에 주께로 피한다. 주는 그의 피난처요 쉴 만한 곳이 되신다.

후반 절을 다시 번역하면, “이는 내가 네 친구들의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될까 함이라.” 성도는 참 목자되신 주님을 찾는다. 그의 교훈과 피난처를 찾는다. 그러나 때때로 주님의 모습은 감취어 있고 참된 교회의 모습도 감취어 있다. 참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네 친구들은 주를 안다는 이름만 가진 거짓 지도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의 양떼들은 거짓 교회들이다. 거기에서는 주님을 뵈올 수 없다. 그래서 신부는 그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슬퍼하며 방황하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자, 참 교회를 찾지 못한 자는 이처럼 슬퍼하며 방황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과 참 교회를 만날 때 그는 기쁨과 안식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자. 또 하나님의 참된 말씀의 교훈이 있는 곳을 찾아 나아가자.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휴식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자. 참 교회를 찾아 나아가자. 우리는 거짓된 종들과 거짓된 교회들을 분별하고 그 곁에서 슬퍼하며 방황하지 말고, 참 교회 안에서 말씀의 교훈과 안식을 누리자.

[8]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주께서는 우리를 여인 중에 어여쁜 자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보기에 거무스름한, 별로 예쁘지 않은 자들이지만, 주께서는 우리를 예쁜 자로 여기신다. 그것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 죄를 씻으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셨고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그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하겠다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신다. 첫째는 양떼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고 둘째는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우리의 염소 새끼를 먹이는 것이다.

양떼의 발자취를 따르라는 것은 앞서간 진실한 성도들의 발자취를 주목하고 배우며 따르라는 뜻이다. 성경의 경건한 인물들뿐 아니라, 역사상 경건한 인물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우리가 진실한 성도들의 발자취를 주목하고 살피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교훈과 뜻을 알게 될 것이다.

또 주께서는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우리의 염소 새끼를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목자들은 신실하고 충성된 목사들을 가리킨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외에도 역사상 신실한 목사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했고 바른 삶을 본보였다. 그들은, 바울의 말대로, 금은 보석으로 교회를 건립한 일꾼들이다(고전 3:10-12). 우리는 그런 목사를 만나고 그런 교회에 속하여 우리의 염소 새끼를 먹여야 한다. ‘염소 새끼는 어린 신자들, 연약한 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성숙한 성도는 어린 성도를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쁘게 보심을 기뻐하고 감사하자. 또 더욱 분발하여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자. 또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거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신실한 종들과 성도들의 발자취를 주목하며 배우자. 또 우리는 주의 신실한 목사들의 교회로 나아가 거기서 우리의 자녀들과 이웃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자.

[9]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신랑은 신부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교하였다. ‘준마(駿馬)’라는 원어는 나의 암말이라는 뜻이다. 말은 짐승 중에 아름답기도 하지만, 사람이 쓰기에 매우 유익하다. 말은 힘과 용기가 있어서 잘 길들여진 말은 전쟁에 필수적 장비이다.

주께서는 교회를 그러한 말()에 비유하신다. 주께서 친히 십자가의 피로 거룩하게 하신 교회는 그가 보시기에 심히 아름답다. 또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선포하고 증거하시기 위함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주 안에서 잘 길들여져서 영적 전쟁에서 힘과 용기를 가진 전사로 쓰이기를 원하신다.

[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또 신랑은 신부의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그의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땋은 머리털로라는 원어는 장식물로라는 말이다. 여성의 뺨과 목은 아름다운 곳이며 거기에 장식물과 구슬꿰미가 있을 때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그 아름다운 단장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들과 거기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덕과 선한 행실을 가리킬 것이다. 성도들의 온유와 겸손과 선행이 그러한 덕의 일부이다(벧전 3:4; 딤전 2:10).

[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우리가라는 표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하는 것 같다. 주께서 교회를 위해 은 단추로 장식된 금사슬을 만드시겠다는 것은 교회를 위해 아름다운 복을 예비하시고 허락하신다는 뜻 같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죄씻음과 중생(重生)과 의롭다 하심과 양자됨과 성령을 주셨을 뿐 아니라, 또한 훌륭한 목사들과 성도들, 의로운 법들과 거룩한 규례들을 주셨고 또 계속 주실 것이다. 주께서는 그를 진실히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더욱 아름다운 은혜로 채우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이미 아름답게 하셨음을 깨닫고 감사하자. 그러나 참된 교회와 성도들은 내면적, 인격적 덕과 선행으로 그 아름다움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디도서 3: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12-14]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12절의 나도 기름은 매우 값비싼 향유로서 신약성경에도 나온다. 마가복음 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요한복음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13절을 다시 번역하면,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몰약 향낭(향유 주머니)이니 내 품에서 밤을 새우도다.” 몰약은 맛은 쓰지만, 냄새는 좋아서 최고의 향유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고 한다. 14절의 고벨화(코페르)엘 헨나라는 나무로서 향기 있고 희읍스름한 꽃들이 포도송이처럼 자라는 떨기나무 혹은 작은 키 나무이다.

본문은 신랑이 신부에게 얼마나 향기로운 존재인가를 세 번이나 말한다. 상에 앉은 왕에게 신부의 나드 향유가 부어진다고 표현된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구주 예수께 이루어졌다. 또한 신랑은 밤새도록 신부의 품에 있는 몰약 향유 주머니이며, 또 그에게 엔게디 포도원의 향기로운 고벨화 나무의 꽃송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잘 드러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존재인지! 그의 아름다우심과 향기는 그의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선하신 인격과 그의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사랑의 행실을 통해 확실하게 증거되었다. 우리는 주님의 그 선하신 인격과 그 선하신 행실의 향기를 깨닫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자. 또 우리의 가장 귀한 향유를 그에게 부어드리자. 또 주님의 선하신 인격과 행위를 본받자.

[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신랑이 신부에게 하는 이 말은 주께서 교회를 어떻게 예쁘게 보시는지 말해준다. ‘어여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도 비슷하게 야파이다.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 개개인과 개교회나 전체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부족투성이이며 많은 결함과 연약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성도 개인이나 교회를 예쁘게 여기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며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공로일 뿐이다.

주께서는 또 네 눈이 비둘기 같다고 말씀하신다. 비둘기의 눈은 매나 독수리의 눈과 다르다. 그것은 아름답고 온유하고 순결한 눈을 가리킨다. 눈은 단순히 밖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아니라 또한 내면적 성향을 가리킨다. 그래서 성경은 교만한 눈’(6:17), ‘악한 눈’(23: 6) 등의 표현을 한다. 아가서의 신부는 이상적인 성도와 교회의 모습을 묘사한다. 성도의 눈은 온유하고 겸손하며 성결한 눈이어야 한다. 그것이 이상적 성도의 모습이다. 이와 같이 우리 개개인의 삶이나 교회는 온유와 겸손과 거룩함으로 단장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여쁘게 여기심에 대해 감사하자. 우리는 부족과 연약이 많은 자들이지만, 주께서는 우리를 어여쁘고 어여쁘다고 말씀하시니 주의 은혜일 뿐이다. 주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고 성령을 부어주셨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자로 간주된다.

이제 우리는 온유와 겸손으로 자신을 단장하며(11:29) 순결한 처녀같이(고후 11:3)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천국의 영광스러운 잔치를 사모하자. 죄악되고 세속적인 것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오직 영원한 존귀와 영광의 세계를 바라자.

[16-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신부는 신랑에게 당신이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대답한다. ‘화창하다는 원어(나임)사랑스럽다, 기쁘다라는 뜻이다. 주께서 교회를 어여쁘게 여기시지만, 실상 아름다우신 자는 우리가 아니고 주님 자신이다. 그는 본래, 본질적으로, 완전히 아름다우시다. 또 그는 사랑스러우시며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자가 누구인가. 또 하나님처럼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자가 누구인가.

신부는 또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라고 말한다. 침상은 교제를 상징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성도들의 교제, 즉 말씀과 기도의 교제를 가리킬 것이다. 그것이 푸르다는 말은 신선하고 생명력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우리에게 힘과 기쁨을 주고 생명력을 공급한다.

또 우리의 집은 교회를 가리킬 것인데, 그것의 들보가 백향목이며 석가래가 잣나무라고 말한 것은 그 집이 튼튼하며 향기로움을 나타내는 것 같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그가 친히 세우셨고 지키시고 보장하시는 집이며 우리가 그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튼튼하고 향기롭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사랑스러우심을 깨닫고 그를 많이 사랑하자. 아가서의 말씀과 같이 그에게 고백할 수 있도록 그를 사랑하자. 또 우리는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귀히 여겨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에게 기도함으로 힘과 기쁨을 얻자. 이상적 교회는 항상 주님과 교제하는 교회이며 그 교회는 튼튼하고 향기롭다. 주님과의 참된 교제를 포기한 자는 참된 성도나 교회가 아닐 것이다.

[추수감사절 히브리어 설교] 초막절과 수장절을 지켜라(신 16:13-17)

 

[추수감사절 히브리어 설교] 초막절과 수장절을 지켜라(신 16:13-17)

안녕하세요. 오늘은 추수감사절 히브리어 설교 중에서 초막절과 수장절을 지켜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구약에서는 추수감사절은 초막절과 수장절입니다. 가을 절기에 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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