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헬라어 단어 중에 카이로스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카이로스는 세월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세월을 아끼라고 했는데 이 세월이라는 단어가 카이로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말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하나님의 때를 준비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시간이라는 단어 중에 크로노스가 있습니다. 이것은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라는 시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정확한 때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종말의 때를 준비하여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오늘도 세월을 아끼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깨닫고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엡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Καιρος(2540, 카이로스)
시간 time, 시점 a point of time, 순간 moment.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명사 카이로스는(Hesiod Works 694에서 처음) 본래 '올바른 치수, 정확한 비율, 편리한 것, 적절한 것, 결정적인 것’을 뜻하였다.
물리적, 시간적, 사전적 내용과 아울러 카이로스는 '올바른 지점, 적합한 장소'를 뜻하는 처소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물리적, 시간적 의미로 사용될 경우 카이로스는 사람이 결단을 해야 하는 중대한 상황, 사람이 숙명적으로 이끌려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을 나타낸다.
긍정적으로, 그것은 기회 (참조: Aristotle, Eth.Nic. 1,4, p.1096) 혹은 '이익'을 나타내며, 부정적으로는, ‘위험’을 나타낸다(P1 ato, Log. l2,945c).
카이로스의 물리적 의미로는 '중요성 importance, 규범 norm’(예: Aesch., Ag 7871) 및‘지혜로운 중용 wise moderation’등이 있다(soph., QT l5l6).
시간적 의미에서 카아로스는 '적합한 시간(때), 좋은 기회의 순간'(soph., El. l 292)을 묘사한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다른 시간 개념들과 동의어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아주 일반적인 '때나 기간(카이로스 5550), 년의 계절(예: plato, Leg. 4, 709c), 시간이나 때 hour(5610: 호라), 지금(3568: 뉜), 오늘(4594: 세메론)' 과 같은 '현재의 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크로노스와 관련하여 크로노스는 모든 가능한 카이로이를 포함하며, 보다 광범위한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카이로스가 사용되는 곳에서 역시 종종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은 불가하다. 소포클레스( sophocles )의 문구처럼(Elect. 1292) 카이로스 크로누를 말할 수 있으나 크로노스 카이루를 말할 수는 없다’(R.C. Trench Synonyrns of the New Te stament, [1880] 1953, 2l0; 눅 I:57; 갈 4:4) .
(b) 다음으로, 카이로스는 ‘결정적인 순간 decisive moment'(Soph의 시대로부터)이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도 3가지 의미, 긍정적 의미, 중립적 의미,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긍정적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가장 알반적이다.
시간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와, 각각 연관된 두개의 어원론적 어군의 존재는, 헬라인들이 그 진행에 인간적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시간의 흐름인 크로노스를 인간의 결정이 영향을 미치는 독특한 기간이나 시점인 카이로스와 구별하였음을 시사한다. 순간을 포착하고자 하는 의지인 카이로스 사상(카이로스, 2540-thinking)은 크로노스 사상(크로노스, 5550-thinking)에서 자라날 수 있는 운명론적인 위험을 저지하거나 막는다.
카이로스는 헬라인에게 대우주적 시간(크로노스, 5550)의 끝없이 흐르는 흐름에서 그의 개인적 삶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시점을 의미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Eth.Nic.1,4p.1096a)는 '시기에 있어서 좋은 것을 카이로스라 일컫는다'라고 카이로스를 높이 평가했다. 카이로스는 '좋은 실행의 때(시간)'이다(Philo).
운명의 순간에 확고하게 키(helm)를 잡는 자는 행운(fortune)으로 몰아간다. 때때로 종교적 뉘앙스도 찾아볼 수 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 : 카이로스는 크로노스 데온 곧 형편 좋은 상황과 동일하지 않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으로 한(순간적인) 카이로스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창조적으로 역사해야만 하는 언제나 새로운 시점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카이로스는 때때로 튀케(tuvch: 운명)와 관련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튀케(tuvch)는 우연성으로 특징지울 수 있으며, 사람은 그것에 수동적으로 굴복당한다. 그렇지만 카이로스는 사람으로부터 결정적 행동을 요구하는 운명(destiny)이다. 따라서 카이로스는 도전을 통하여 인생을 결정한다. 이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카이로스를 붙잡는 것이며, 카이로스를 유용하는 것이며, 심지어 카이로스를 빼앗는 것이다(Delling, TDNT).
행위를 요하는 시점이 중요성을 띠게 된 것은 시간(크로노스)의 신속한 흐름이라는 배경하에서였다. 시간의 공간에서 개개인들의 많은 결단이 내려지며, 인간은 시간의 공간을 담대히 활용하여야 한다. 자기의 카이로스를 놓치거나 회피하는 자는 자신을 파괴한다. '일을 적시에 행하지 않는다면 망치게 된다는 데에 의심이 있을 수 있는가?’(Plato, Rep. 2, p. 370b). 때를 놓치고(파라 카이론) 받는 것 역시 결국은 불행을 초래한다(Theogris in Griechische Lyrik, I08/l18).
그러므로 카이로 그노디(시기를 인식하다)(Pittacus, Diels -Kranz, I, 64)를 명심하고 모든 활동에서(공중 연설에서, Democ., Frag. 226; 자선행위에서, Frag 94) '적시 안타'를 노리는 것이 중요하다.
운명의 기로(岐路)에서 카이로스는 인간에 대해 윤리적 결정을 요구한다. 카이로스(좋은 기회의 시간)를 잡는 것은 솔직히 책임을 의식하고 있는 (스토아 학파의) 윤리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카이로스가 분명하게 될 때 헤도네(hJdonhv, 2237) 즉 정욕에 대한 자기 정복적 투쟁에서 인간은 카이로스의 요구에 복종해야 한다(Ench, 34). 하나님은 사람이 카이로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밝히기 위해(Dissertationes, Ⅲ,10,8), 매일 인격의 형성에 기여를 요구하기 위해 그를 소환하신다(Dissertationes, Ⅳ,4; 45f).
여기에서 카이로스는 이성의 덕으로 알려진 도덕적 필요성이 될 수 있다. 후대에 카이로스를 신들의 하나로 숭배를 한 적이 있었다(Paus., V, 14, 9).
(c) 호기의 포착(카이론 람바네인 혹은 크레스 다이)이 스토아 학파의 윤리학에서(Epictetus와 후대의 Seneca)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성적 도덕적 필수요소(Dissertationes 2, 7, 3참조)라 생각되는 것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에서(Epictetus, Dissertationes 1, 1, 6) 인간은 시간을 붙잡음으로써 그 압제하는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초시간적인 숙명에서 싹트는 현재의 의무들을 위해서만 산다. 그들은 먼 미래에 대한 걱정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도 관심을 거의 갖지 않는다"(M.Pohlenz, Die Stoa, 1, 19542, 47). 시간(크로노스)을 전적으로 이차적 중요성의 문제(아디아 프호론)로 보는 스토아학파에 있어서 카이로스에 대한 역사적 관점은 궁극적으로 사라지고, 초시간적 순간으로서의 카이로스만 있다(참조: R.Bultmann).
2. 70인 역본의 용법
카이로스는 70인 역본에서 약 300회, 카이로스가 크노로스보다 더 많이 나타난다. 카이로스는 70인 역본에서 주로 히브리어 에트(시간, 독특한 사건의 시점, 198회), 모에드(시점, 31회), 케츠(6회), 욤(날, 3회)을 번역하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카이로스는 '결정적인 순간이나 시점'을 나타낸다. 첫째로 시간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윤리적인 요구보다는 하나님의 정하심에 보다 큰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하나님의 때를 가리킨다(참조: 욜 3:1; 민 23:23; 전 3:11; 단 2:21). 하나님은 최종적인 축복의 때를 주시며, 죽음의 때를 정하시며(전 7:17), 최후의 때, 즉 심판의 때를 가져오신다(애 1:21). 전도서 기자는 그가 지나온 카이로스 속에서 하나님의 손을 발견한다(전 3:10 이하). 대상 12:32 등(결정적인 상황)과 집회서 4:20(적당한 순간; 참조: 학 1:2)에서는 이 단어는 보다 비종교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b) 카이로스는 일반적으로는 순수한 시간적 의미로 더욱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창 17:21, 창 17:23 등에서는 '시점'을 나타내고, 겔 12:27 등에서는 '일련의 기간'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어가 절기나(출 34:18; 레 23:4; 민 9:3, 민 9:7, 민 9:13; 대상 9:25 등) 정규적인 생물학적인 시간이나(겔 16:8; 레 15:25; 욥 39:1; 삼상 1:20 등) 기상학적 시간(신 28:12) 또는 다른 자연적 사건들(시 1:3; 욥 38:32)에 대해 사용되고 있음을 본다.
카이로스는 인생의 시기적 구분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러한 더욱 보편적 용법은 신학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
3. 신약성경의 용법
1. 카이로스에 대한 이해.
헬라어에는 '시간'에 대한 3가지 중요한 용어가 있다. '매우 긴 시간, 영원한 시간'을 뜻하는 아이온 속에 크로노스가 있고, 크로노스 속에 카이로스가 있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는 부분적으로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특히 '일정적인(calendrical) 의미로 인생의 시간의 한정된 지속에 대한 진술'이 있는 곳에서 이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시간의 기간 period of time'을 나타내는 반면, 카이로스는 자주 '결정적인 순간이나 시간(때), 종말론적으로 찬 때'를 가리키며(Baumgarten 187), 따라서 '위기의 시간(때), 적합한 시간(때), 좋은 기회'라는 의미도 지닌다.
카이로스는 인간의 카이로스와 하나님의 카이로스로 양분되는데, 인간이 인간을 본위(本位)로 한 자리에서 인간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마련되는 인간의 카이로스로는 세속사(世俗史) 곧 인간의 일반 역사가 형성되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카이로스로는 구속사(救贖史) 곧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歷史)가 이루어진다. 끝없이 흘러내려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役事) 하나 하나의 합(合)이 '구속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경우 카이로스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다(행 l:7).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은 전적으로‘하나님의 카이로스’에 의해서만 사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의 일체는 곧‘구속사’였다. 하나님의 카이로스에 의한 삶과 인간의 카이로스에 의한 삶의 대조를 요 7:6-요 7:8이 잘 보여주고 있다.-“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카이로스) 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예수의 형제) 때(카이로스)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 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카이로스)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올라가지 아니 하노라.”
여기서 '너희 때'란, 아직 결정적인 신앙이 없이 세상에서 자기 본위로 살고 있는 '예수님의 형제들의 때'인데, 이는 곧‘인간의 카이로스(카이로스)'를 말씀하신다. '나의 때'란 하나님이 정하여 주시는데서 만이 행하게 되는 '예수님의 때'인데, 이는 곧 '하나님의 카이로스’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예수님은 그의 형제들을 향하여 인간 본위로 사는 너희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는 때는, 너희들의 뜻에 의하여 항상 열려 있으나 하나님 본위로만 사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하는 때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기독교인이란, 하나님의 카이로스로만 이어지는 삶을 지향(指向)하는 존재이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오승태, 福音).
카이로스는 구원사에 있어서 하나님이 가져오시는 "심판의 때"와 "마지막"의 개념을 표현하는 확립된 용어이다. 신약성경에서 카이로스는 때때로 '운명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시점'(참조, 막 1:15), 예를들면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의 카이로스를 인정하지 아니했다(눅 19:44; 참조: 눅 12:56; 마 16:3-4). 예수님의 카이로스는 그의 죽음의 때(time)이다(마 26:18). 이 용어는 귀신을 제어하는 메시아적 권능의 시작(마 8:29), 신자들에 대한 박해(벧전 4:17), 막는 자의 능력의 옮김(살후 2:6), 신자들의 판단(고전 4:5), 죽은 자에 대한 일반 심판(계 11:18)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카이로스는 요한 계시록의 독자들의 생각을 이러한 주제들로 향하게 한다(J.M FORD).
그러나 위기나 심판의 때가 우리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여 주신 카이로스라는 시간을 바로 인식하여, 보다 가까와진 '세상의 종말 및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새로운 각성을 하고, 그리고 이 각성을 바탕으로 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다.
2. 신약성경에서 카이로스의 용법
명사 카이로스는 신약성경에서 8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① 카이로스는 '결정적인 순간이나 싯점'을 의미하며, 항상 명시적이 아니지만 그 순간이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행 24:25는 예외).
모든 기독교적 시간 개념을 결정적으로 새로이 구성하는 요소는, 예수님의 강림과 더불어, 다른 모든 시간에 특성을 부여하는 카이로스가 동텄다는 확신이다. 막 1:15는 이것을 프로그램적인 방식으로 명백하게 한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선포의 핵심은 '성취의 시간이 동텄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이미 나타났으며, 곧 그 결정적인 도래를 개시하는 재난이 닥칠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시간을 활용하라 그것은 생사(生死)의 문제이다'(J.Jeremias)는 것이다. 이러한 카이로스는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하나님의 성취이다. 선지자들이 바라던 은혜의 때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실현되었다(롬 3:21; 벧전 1:11). 예수님의 삶 및 특히 고난과 죽음과 더불어 옛 시대는 지나갔으며, 진정한 하나님의 의의 뉜 카이로스(롬 3:26)와 더불어 신기원, 말하자면 '시대의 성취'가 동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 5:21; 요 3:16; 요 10:27 이하). 따라서 결단의 중대성이 새로이 커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러 오신 그 독특한 카이로스를 알지 못했다(눅 19:44). 무리들은 예수님과 함께 존재하는 카이로스의 결정적인 성격을 깨닫지 못하였다(눅 12:56).
② 예수님의 육체적 임재가 모든 구체적 오늘(Today)을 하나님의 구원의 빛 속에 담그듯이(눅 13:32; 눅 19:5, 눅 19:9; 눅 23:43; 눅 2:11) 승귀 하신 분과의(참조: 눅 22:69) 신앙의 관계를 통해서 그의 구속하시는 능력이 이제로부터 계속하여 인간들의 생활 속에서 유효할 수 있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은 단순한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사실이다'(R.Bultmann; 참조: G.Delling). 부활 이래 다음과 같은 선포가 중요성을 지닌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만한 때요(카이로스 유프로스데크토스)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참조: 사 49:8).
예수님의 카이로스의 메시지를 전함으로 말미암아(Stauffer) 구원을 제공하는 지금(Now)은 계속하여 새롭게 결단을 요구하는 현실이 된다. 그러므로 말씀(Word)의 선포의 "지금"(now)은 계시자(Revealer)의 도래의 "지금"과 정확하게 상응하며, 이는 또한 일정한 시간의 한 역사적 사건의 "지금"이며, 기회의 "지금"이며, 한 주어진 시간에 구체적 사건으로서 말씀을 전파함으로써 예수님이 계시자가 되는 그 "순간"(moment)인 것이다(Bultmann).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을 때에 순종한 것과 같이(참조: 마 4:20, 마 4:22; 막 1:18) 각 사람도 이 선교적 선포에 지체하지 않고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모든 사람에게는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시간과 장소는, 사랑의 시간이요 이 사랑을 경험하는 장소임을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를 묻는 질문이 주어진다(Fuchs). 그들은 오늘을 내일로 연기함으로써 이 결단을 회피치 말아야 할 것이며(Philo, Sacr. 69 참조), 그들이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아야, 다시 말해 하나님 없는 존재에로 그들의 뜻을 강화시키지 말아야 할지니(참조: 히 4:7, 히 4:15) 이는 그들이 예루살렘처럼 "화"(Woe)의 평결하에서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눅 19:44).
③ 종말과 현재의 성취의 동시성은 사랑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행동할 것을 요구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신자는 이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이 시기를 분별해야 한다(눅 12:56), 이 시기는 자다가 깰 때이다(롬 13:11). 신앙은 시간을 마음대로 현명하게 활용할 윤리적 책임을 면제하지는 않는다(갈 6:10; 골 4:5). 진실로 그와 같은 책임이 있으니, 선지자들은 "시간을 사라"(엡 5:16)는 명령법 어구와 더불어 역사적 시간을 할당받았다. 이 시기는 복을 받는 시기이기도 하지만(막 10:30), 고통의 시기이다(롬 8:18). 이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유혹의 순간에(눅 8:13) 타락하지 않도록 서로를 권면해야 한다(딤전 4:1; 참조: 히 3:12 이하).
④ 예수님 자신의 삶은 카이로스의 요구에 지배를 받는다. 예수님은 때를 분별하고 따라서 결정하신다(요 7:6, 요 7:8). 이 카이로스가 단순히 호의적인 기회인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은 성부로부터 오는 그 때를 기다리며, 따라서 참된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마지막 특히 카이로스 하에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주신 카이로스를 보고, 붙잡고, 받아들이며 때가 가까웠다고 말씀하신다(마 26:18). 따라서 그때는 "적절한 때"이다(롬 5:6).
(b) 때때로 카이로스는 특별히 그 내용과 관하여 '특별한 결정적인 순간이나 시점'을 나타낸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사실이 강조되나 사람이 한 결정이라는 의미는 크게 약화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로고스가 출현할 때(딛 1:3),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할 때(딤전 2:6),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딤전 6:15), 그의 백성들의 수확시기(갈 6:9)를 정하신다. 이러한 종류의 다른 카이로스 중에는, 즉 하나님의 계획의 전개에 있어서의 특별한 시점들로는 귀신들을 제압하는 메시아의 권세의 시작(마 8:29), 임박한 심판의 시작(벧전 4:17), 카테콘("막는 것")의 권세를 제거하기 시작하는 때(살후 2:6), 최후의 심판의 시작(고전 4:5; 계 11:18) 등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때를 헤아릴 수가 없다(막 13:33; 살전 5:1; 행 1:7); 하나님만이 그러한 때를 주관하신다. 카이로스는 최후의 심판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가 될 수도 있다(눅 21:8; 벧전 5:6; 계 1:3). 그러나 카이로스는 또한 신자의 생애에 있어서의 개별적인 시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딤후 4:6; 눅 1:20).
(c) ① 카이로스는 '짧은 시간'에 대해 사용되었다. 눅 21:36; 엡 6:18,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도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롬 9:9(창 18:10에 근거)에서 한번 특별한 '기간, 기한', 마 24:45; 눅 12:42에서 '일정한 시간', 막 12:2과 병행구에서 '정한 때', 마 13:30; 마 21:34; 막 11:13; 행 14:17에서 자연적 사건들의 '때'를 나타낸다.
② 카이로스는 '시간의 연속이나 얼마간의 시간'에 대해 사용되었다. 예를들면, 사람이 '정한 시간'(살전 2:17; 고전 7:5), '불확정한 시간'(눅 8:13), 하나님이 정한 시간(눅 21:24; 고전 7:29; 계 12:12), '생의 일부분'(히 11:11), 연대(행 17:26; 엡 1:10),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 생의 부분(엡 2:12), 현재 시간(막 10:30)을 나타낸다.(참조: Walter Bauer; G.Delling; H.C.Hahn).
[사사기 성경식물 설교말씀] 사사 삼손과 연관 있는 푸른 칡(삿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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