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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식물 히브리어 설교말씀] 아브라함이 거주하던 상수리 나무(창12:6)

르호봇 2022. 2. 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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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상수리나무는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세겜과 헤브론의 상수리나무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구속사 관점에서 상수리나무는 권능자 이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식물인 상수리나무를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상수리나무’ (엘론 436), (엘라 424)

 

성경에 상수리나무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수리나무를 외형적인 것만으로 생각하면 영적으로는 별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상수리나무와 인연이 깊은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세겜 땅에 이르렀을 때에도 상수리나무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애굽에서 수치를 당하여 올라와서 롯과 헤어지고 난 후에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나무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이 정도로 아브라함과 상수리나무는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수리나무의 어근으로 올라가면 권세 있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습니다. 상수리나무가 이라는 하나님의 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하여 상수리나무를 신성시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상수리나무에서 만나주시고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상수리나무는 권세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나무입니다.

 

고대근동에서 상수리나무는 이방인들도 우상을 섬기기 위하여 제단을 쌓았던 장소입니다. 이런 풍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나무 아래에서 제단을 쌓고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이런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을 인도하여 제일 먼저 한 것이 상수리나무에서 하나님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우상을 만나기 위하여 상수리나무에서 제사를 드리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상수리나무를 통하여 영적으로 깨달을 진리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전능하시며 모든 죄에서 구원하신 권세의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상관없는 분이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죽음을 초월하여 부활하신 능력의 주님이라는 것을 상수리나무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권세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원죄에서 해방이 되었고 죽음에서 부활하여 전능하신 주님을 영원히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상수리나무와 같은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의 죄를 모두 청산해 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의 권세로 당당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혼자일 때에도 하나님은 상수리나무에서 만나주시고 인생을 인도해 주신 것처럼 우리들의 인생도 주님이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상수리나무에서 아브라함을 만나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통하여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보겠습니다.

6절 바야아보르 아브람 바아레츠 아드 메콤 세켐 아드 엘론 모레 베하케나아니 아즈 바아레츠

창12: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지나 처음 도착한 곳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입니다. 이때에 이미 가나안 사람들이 이 땅을 차지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방의 객입니다. 이 땅에서 정착하려면 힘이 듭니다. 먼저 있던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실 때에 말씀으로 인도하여 주셔서 신앙의 훈련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왜 세겜으로 인도하셨을까요? 영적으로 우리가 깨달아보겠습니다.

 

세겜’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셰켐 7927) 세겜,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샤캄 7925) 아침 일찍 일어나다, 진지하게 행하다, 끊임없이, 부지런히,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세겜이라는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방인의 땅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면서 진지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타지에서 살기 위해서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해야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신앙이나 세상의 일이나 게으름 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끊기 있게 하나님께 경배하며 일을 하게 되는 것을 세겜이라는 땅을 통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새벽에 찾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저녁에는 주님의 말씀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지런히 주님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찾는 자들을 보시고 있습니다. 나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영적으로 깨어있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마콤 4725) 장소, , 성전,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6965) 세우다, 자기 소유가 되다, 확정되다, 성취하다, 라는 뜻에서 왔습니다. 세겜 땅은 하나님께서 성전과 같은 거룩한 장소로 허락한 곳입니다. 이곳에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하시는 장소입니다.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현재 아브라함이 있는 이 땅을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확정하여 자신의 소유가 된 땅입니다. 인간이 준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입니다. 이 땅은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이 됨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곳에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게 됩니다.

 

모레’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모레 4176) 모레,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야라 3384) 가르치다, 교훈하다, 알게 하다, 라는 뜻에서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세겜 땅 모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일이 막막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깨달아 알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교훈을 삼아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부지런히 일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신앙의 훈련도 받아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머무르면서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을까요?

상수리나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엘론 436) 상수리나무,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193) 권세 있는 자, , 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상수리나무에서 거주했던 이유는 바로 권세 있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부지런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인들은 이런 상수리나무에서 이방 제사들을 많이 드렸습니다. 하나님보다도 눈에 보이는 나무를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신앙을 권세 있는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던 아브라함의 신앙은 어떠했습니까? 새벽 일찍 부지런하게 일어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늘 상수리나무에서 하나님을 기다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말씀으로 교육받고 이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서 적용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아브라함의 신앙을 배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오직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이나 생활면에서 부지런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새벽에 주님을 찾고 만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영적으로 깨어 주님과 교통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아브라함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던 아브라함에게도 인생의 시련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기근입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자신들의 가족을 데리고 내려가게 됩니다. 애굽은 영적으로 보면 세상을 의미합니다. 기근이 올 때에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육신적인 생각을 먼저 하고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대단한 것 같지만 결국 우리와 같은 성격을 가진 죄인에 불과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 사래도 애굽의 바로 왕에게 빼앗길 뻔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고 애굽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아브라함은 수치를 당하고 애굽에서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어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현재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힘들고 고난이 찾아왔다고 세상으로 눈을 돌려서 가면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해 결국은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신앙은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가나안 땅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은과 금과 가축이 풍부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가지고 온 재물 때문에 조카인 롯과 아브라함은 함께 동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재물이 서로를 시기 나게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과 함께 살고 싶지만 롯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 아니면 재물 때문에 뼈아픈 이별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롯은 서로 이별하게 됩니다. 우리들도 재물 때문에 가족 간에 불화가 일어나는 가족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떠난 직후에 장막을 헤브론으로 옮기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왜 장막을 헤브론으로 옮기는 것일까요?

18절 바예에할 아브람 바야보 바예쎄브 베엘로네 마므레 아쎄르 베헤브론 바이벤 솸 미즈베아흐 라아도나이

창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헤브론’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헤브론 2275) 헤브론,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하바르 2266) 결합하다, 연합하다, 교제하다, 약조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조카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으로 갔지만 아브라함은 헤브론 지역으로 장막을 옮겼습니다. 헤브론 지역은 높은 산악지대로 살기에 불편한 도시입니다. 하지만 문화와 문명에 익숙한 롯은 요단 지역을 선택하여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영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결합되지 않고 연합하지 않으면 애굽에서의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늘 교제하기를 원했으며 이제부터 하나님과 묶여서 하나가 되어 다시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따라갈 것을 하나님과 약속하는 신앙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반드시 세상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십자가 복음의 말씀으로 묶여 있어야 합니다. 물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 구명조끼가 답답하다고 벗어던지면 물속으로 가라앉아 죽게 됩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십자가 복음을 벗어 버리면 안 됩니다. 생명줄이기 때문입니다. 늘 주님과 교제하고 연합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마므레’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마므레 4471) 마므레,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마라 4754) 때리다, 채찍질하다, 배반하다, 반역하다, 라는 뜻에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수치를 당한 후에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악 가운데 반역하여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채찍에 맞아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떠올리면서 하나님과 연결되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다시 세상으로 가지 않겠다는 아브라함의 결단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56절 아브라암 호 파테르 휘몬 에갈리아사토 히나 이데 텐 헤메란 텐 에멘 카이 에이덴 카이 에카레 에이폰 운 호이 이우다이오이 프로스 아우톤 펜테콘타 에테 우포 에케이스 카이 아브라암 헤오라카스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도 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던 것인데 언제 주님을 보았다는 것입니까? 바로 헤브론 마므레에서 예수님을 체험한 것입니다. ‘마므레의 뜻에 채찍질하다는 뜻이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을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세겜의 신앙은 하나님만 알았던 신앙이라면 헤브론의 신앙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만난 구원의 확신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헤브론 마므레지역에서도 상수리나무에서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늘 함께 하기를 원하면서 생활 가운데서도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연결되어 교제하는 삶 속에 하나님은 상수리나무에서 아브라함을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1절 바예라 엘라이브 아도나이 베엘로네 마므레 베ㅔ후 요셰브 페타흐 하오헬 케홈 하욤

창18: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하나님께서 상수리나무에서 아브라함을 만나주시기 위해 나타나셨습니다. 채찍에 맞고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 주셨습니다.

 

나타나시니라’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라아 7200 CW.VNIMZS 와우계속, 동사, 닢알(수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감찰하다, 뵙다, 사모하다, 경외하다, 준비되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생활을 하나님께서 감찰하시고 하늘에서 마므레 상수리나무에 있는 아브라함을 만나러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고대하던 하나님을 뵙게 되었으며 늘 자신의 신앙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모하면서 기다렸던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으며 이미 이삭을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준비된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다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나기 위해 즉시 내려오시게 되며 아브라함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삭을 약속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닢알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이제는 직접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완전하게 눈에 보이게 만나 주시고 있습니다.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구원시켜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을 보았습니다. 상수리나무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부지런히 믿음을 지켜나갔던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할 때도 있었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을 먼저 찾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이 우선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한 후에는 다시 하나님과 연결하고 결합하여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시고 만나주시러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고민하고 있던 이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이제 주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상수리나무는 야곱과도 연관이 있는 나무입니다. 야곱이 세겜 성에 장막을 치고 살 때에 자신의 딸 디나가 히위족속 중 하몰의 아들 세겜이 강간을 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때에 야곱은 자신의 집안사람들의 우상들을 모두 버리고 의복을 갈아입게 됩니다.

4절 바이테누 엘 야아코브 에트 콜 엘로헤 하네카르 아쎄르 베야담 베에트 하네자밈 아쎄르 베오즈네헴 바이테몬 오탐 야아코브 타하트 하엘라 아쎄르 임 쉐켐

5절 바이사우 바예히 히타트 엘로힘 알 헤아림 아쎄르 세비보테헴 베로 로드푸 아하레 베네 야아코브

창35:4-5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의 가족들은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야곱은 이것들을 자신의 아버지가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 제단을 쌓았던 그 장소의 세겜 상수리나무 아래에다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 장소를 떠나 벧엘로 올라갈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모든 고을들을 크게 두렵게 하여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크게 두려워하게’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히타 2847) 두려움, 공포, 무서움, 이라는 뜻이며 이 단어는 (하타트 2865) 부수다, 깨뜨리다, 꺾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현재 야곱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이 세겜과 하몰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자신의 모든 우상을 상수리나무 밑에 묻고 떠날 때에 하나님이 히위족속들을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회개를 의미합니다. 야곱은 상수리나무에서 권세 있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까지 의지했던 모든 신상들을 버리고 가족들이 의지했던 이방 신상들을 권세 있으신 하나님께 묻어버리고 이제부터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신앙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내가 섬기고 의지했던 모든 것들을 파묻고 나갈 때에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시고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세상의 주변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처음 만났던 첫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신앙의 회복이 일어나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상수리나무에서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럼 나의 상수리나무는 어디입니까? 직장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있다면 그곳이 상수리나무입니다. 우리는 상수리나무에 함께 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

2절 베샤울 베이쉬 이스라엘 네에세푸 바야하누 베에메크 하엘라 바야아르쿠 밀하마 리케라트 펠리쉐팀

삼상17:2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서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을 대하여 전열을 벌였으니

 

사울의 군대와 블레셋 군대가 엘라 골짜기에서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블레셋의 대표 장군은 골리앗입니다. 골리앗이 나와서 하나님을 모욕해도 사울의 군대에서는 한 명도 골리앗과 싸우기 위하여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골리앗의 외형만 보고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죽이기 위해 출전했던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엘라 골짜기에서 골리앗을 죽이게 됩니다.

 

골리앗’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골야트 1555) 골리앗, 포로를 의미하며 이 단어는 (갈라 1540) 발가벗기다, 드러내다, 사로잡혀 가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골리앗은 엘라 골짜기에서 사울의 군대를 향하여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모멸감을 준 것입니다. 골리앗은 자신의 힘과 권세를 믿고 교만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신의 힘만 믿다가 엘라 골짜기에서 다윗의 물매에 맞아 한 방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완전히 자신의 수치가 발가벗겨지게 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죽음으로 인하여 자신의 힘과 권세는 헛된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되었으며 이미 다윗의 포로가 되어 목이 잘리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라 골짜기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까?

 

엘라’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엘라 425) 엘라,이며 이 단어는 (193) 권세 있는 자, , 이라는 뜻입니다. 엘라 골짜기는 힘과 권능의 하나님이 계신 곳임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이곳에 다윗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고 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과 권세를 가지고 나가서 골리앗을 포로로 만들어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힘과 능력을 믿는 자들은 멸망당하게 되지만 주님의 이름을 힘입어 나가는 자들은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골리앗과 같은 문제가 있을지라도 엘라 골짜기에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나가면 골리앗은 이미 나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골리앗과 같은 문제들을 모두 발가벗기듯이 속속들이 알게 하시고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셔서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힘과 전능하심을 믿고 나가시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9절 바이카레 아브솰롬 리페네 아브데 다비드 베아브솰롬 로케브 알 하페레드 바야보 하페레드 타하트 쇼베크 하엘라 하게돌라 바예헤자크 로쇼 바엘라 바유탄 벤 하솨마임 우벤 하아레츠 베하페레드 아쎄르 타흐타이브 아바르

삼하18:9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땅과 공중 사이로 빠져나간지라

 

상수리나무는 압살롬과 연관이 있는 나무입니다. 압살롬이 다윗을 배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좌에 올라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다윗의 손을 들어주시고 압살롬의 반역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도망을 치는데 노새를 타고 도망가다가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가지 아래로 지나갈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공중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때에 다윗의 부하인 요압에게 심장에 찔려 죽게 됩니다.

 

현재 압살롬이 노새를 타고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보통 왕들은 말을 탔습니다. 말은 힘과 권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새는 작고 볼품이 없기 때문에 천한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압살롬이 다윗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것은 이미 성공할 수 없을뿐더러 천박한 행동이며 천하게 죽을 것을 예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새’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페레드 6505) 노새,이며 이 단어는 (파라드 6504) 끊어지다, 분리하다, 흩어지다, 이간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압살롬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다윗의 백성들을 이간질하여 마음을 훔쳤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의 계획을 끊어버리시고 분리하여 다윗에게 다시 왕권을 돌려주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왕이 되려고 했던 압살롬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결국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새를 타고 도망을 치는 압살롬의 모습은 천하고 볼품없는 죽음으로 돌아갈 것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것을 자신의 힘으로 억지로 얻으려고 이간질하면 결국 죽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상수리나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엘라 424) 상수리나무,이며 이 단어는 (193) 권세 있는 자, , 이라는 뜻입니다.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서 걸린 것은 권세 있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에게 반역하여 왕좌를 찬탈하려고 했던 압살롬은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여 죽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 것을 억지로 얻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냥 놔두지 않으시고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상수리나무를 통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면서 신실하신 주님을 섬기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전능하시며 권세 있으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 때에 세상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고 율법적인 의로 하나님께 나가려고 한다면 하나님께 진노를 당하게 됩니다. 골리앗도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서 교만하고 자만하니 결국 상수리나무의 골짜기에서 진노를 받았습니다. 또한 압살롬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다윗에게 대들어 상수리나무에 머리털이 걸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골리앗은 이방인으로서 자만하고 교만하여 육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라면 압살롬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다윗의 영적인 권위에 도전하여 영적으로 죽음을 당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육적으로는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영적으로는 항상 말씀에 깨어있어서 상수리나무에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영원히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시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상수리나무와 같은 나의 모든 저주를 담당해 주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식물 헬라어 설교말씀] 겨자 나무(마태복음 13:31-32)

 

[성경식물 헬라어 설교말씀] 겨자 나무(마태복음 13:31-32)

마태복음 13장에는 겨자씨의 비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천국은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다고 했습니다. 씨는 작은 데 성장하면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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