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구약성경 말씀

[성경식물 하나님 말씀] ‘에셀 나무’ אשל(에쎌 815)(창 21:33)

르호봇 2020. 11. 3. 16:51
반응형

안녕하세요. 오늘은 성경식물 하나님 말씀 중에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연관이 있는 에셀 나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에셀 나무는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에셀 나무’ אשל(에쎌 815)

 

명제: 에셀 나무는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목적: 구원받은 백성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에셀 나무는 로뎀 나무와는 다르게 광야에서 많은 그늘을 제공해 주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척박하고 물이 부족한 땅에서도 잘 버티고 살아남는 나무입니다. 그 이유가 뿌리를 깊이 땅 속으로 내려서 깊은 곳에 있는 물을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에셀 나무의 특징은 잎이 짭니다. 나뭇잎 속에 있는 특수한 성분이 염분을 분비하게 됩니다. 또한 이 짠 성분이 새벽에 차가운 공기와 만나면 이슬을 맺히게 됩니다. 염분이 섞인 이슬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햇살을 받으면 아름답게 빛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에셀 나무의 염분 섞인 이슬의 그늘 아래에서 뜨거운 광야의 고단한 삶을 이겨내는 안식처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에셀 나무는 새벽에 내린 이슬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광야의 한낮의 뜨거운 온도에도 에셀 나무 주변에는 다른 곳과 10도 정도의 기온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에셀 나무에 앉아 있으면 뜨거운 광야에서도 시원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에셀 나무를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진리는 무엇입니까?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됩니다. 만세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입니다. 이 땅을 창조하실 때에도 함께 계셨던 주님이시며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에셀 나무는 척박한 광야에서 물이 없어도 잘 자라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 땅의 척박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나에게 생수와 그늘을 제공해 주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셀 나무는 광야를 여행하는 자들이 힘들고 지칠 때에 그늘을 제공하여 안식과 쉼을 주었던 나무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안식과 속죄의 평강을 주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에셀 나무와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늘 밑에 있으면 뜨거운 광야의 햇빛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인생에 고난과 환란이 왔을 때에 십자가 그늘 밑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의 저주를 가져가신 주님 그늘로 나오면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에셀 나무는 아브라함과 많은 연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맹세를 하고 나서 그곳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이름을 짓고 이곳에 아브라함은 에셀 나무를 심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창21:23-24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아들과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않기를 하나님께 맹세하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통치하는 땅에서 같이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짓되이 행동하지 않겠다고 아비멜렉에게 맹세하고 있습니다.

 

‘내게 맹세하라’ שבע(샤바 7650 동사, 닢알, 명령, 남성, 2인칭, 단수. 연장형) 맹약하다, 맹세하다, 서원하다, 라는 뜻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향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우리 가족과 자손들에게 거짓되게 행동하지 말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며 맹세를 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네가 섬기는 하나님께 서원하라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았기 때문에 맹세를 시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취하였을 때에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사라를 돌려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창20:3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여 맹세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닢알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아비멜렉이 알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맹세를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직접 아브라함에게 명령하고 권고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명령법과 연장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아브라함도 아비멜렉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세상의 왕에게도 이제부터 거짓된 행동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삶을 살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섬기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 사람들 앞에서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뜻을 위해 사는 자가 되기를 맹세해야 합니다. 나의 삶에 거짓된 행동을 하지 않으며 거짓된 증거를 하지도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내가 이제부터 주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거짓된 일 때문에 지탄받지 않는 삶을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21:25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자신의 우물을 빼앗은 것에 대하여 아비멜렉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잘못한 것이지만 책임은 지도자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개인으로서 블레셋의 왕에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의 우물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광야에서 우물은 생명과 같습니다. 그런데 부당하게 자신의 우물을 빼앗았기 때문에 왕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책망하매’ יכח(야카흐 3198 동사, 히필,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변론하다, 꾸짖다, 증언하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변론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종들이 잘못한 것이니 당신도 잘못이 있다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히필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잘못한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조목조목 모두 아비멜렉에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못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우물이 빼앗긴 것에 대하여 아비멜렉 앞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잘못하면 블레셋 땅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왕의 명령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자신의 마음에 아비멜렉의 종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고 아비멜렉이 깨달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12:2-3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며 힘이시며 노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기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우물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은 바로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우물을 빼앗겼던 것은 세상의 사람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빼앗긴 것을 의미합니다. 이 우물은 영원히 솟아나는 샘과 같은 것이며 우물곁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만나 영원한 십자가 복음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종들이 우물을 빼앗아 갔다는 것은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고통당하며 고난당한 것을 의미하는 반면에 아비멜렉에게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우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복음을 지켜야 합니다. 또한 세상의 사람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우물에서 솟아나는 십자가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우물이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이 시대도 생수가 없어서 영혼이 갈증 하는 심령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런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여 메마른 광야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해야 합니다. 메마른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현재 이것을 아비멜렉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생수를 선포하여 책망하고 징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을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창21:26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아비멜렉은 전에 종들이 우물을 빼앗은 것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너도 나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듣지 못하였다고 말하면서 오늘에야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복음에 대하여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전하지 않으면 절대 복음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롬10:13-15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믿지 못하는 이를 어떻게 부르며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겠으며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들을 수 있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떻게 전파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으로부터 아비멜렉에게 보냄을 받은 자로서 생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절대 듣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우물을 빼앗은 사건에 대하여 알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오늘에서야 우물의 사건에 대하여 듣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입술을 통하여 우물의 생수에 대하여 아비멜렉이 듣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블레셋의 왕인 아비멜렉에게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세상의 왕들과 같은 권력자들과 권세 자들에게 전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창21:27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아브라함은 블레셋 왕인 아비멜렉과 양과 소를 가지고 언약을 세우게 됩니다. 여기에서 양과 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동물입니다.

 

‘세우니라’ כרת(카라트 3772 와우계속,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 세우다, 파괴하다, 찍다, 계약하다, 멸망하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우물의 사건을 말한 뒤에 양과 소를 가지고 아비멜렉과 언약을 세우고 있습니다. 우물의 생수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양과 소를 죽여서 언약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제물을 죽이고 철저하게 파괴시켜 찍어버려야 만이 언약이 세워지고 더 이상 멸망당하지 않는 계약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이 제물이 되어 양과 소처럼 죽이심을 당함으로 당신의 죄가 없어지고 멸망당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즉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언약을 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개인적인 구원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비멜렉도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창21: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아브라함은 양과 소의 제물에서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아비멜렉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 암양 새끼로 자신이 우물을 판 증거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물을 판 것은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곱’ שבע(셰바 7651) 칠, 일곱,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שבע(샤바 7650) 맹약하다, 맹세시키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어린 양 일곱 마리를 주는 영적의미는 무엇일까요? 일곱은 완전한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린양을 줌으로 인해 우물에서 나오는 영원한 생수를 증명해 주는 것이며 이 증거로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맹세시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절대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으며 우물을 판 증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오전 9시에 달리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시기까지 선택받은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완전을 의미하는 가상칠언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곱 마디의 말씀이 죄악 된 인간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신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가상칠언은 이와 같습니다.

 

첫째 말-"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이것은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둘째 말-"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이것은 낙원의 약속이었습니다.

셋째 말-"어머니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다"(요19:26-27). 이것은 아들로서의 효도였습니다.

넷째 말-"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27:46). 이것은 영적인 고민이었습니다.

다섯째 말-"목 마르다"(요19:28). 이것은 육신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여섯째 말-"다 이루었다"(요19:30). 이것은 승리의 선언이었습니다.

일곱째 말-"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23:46), 이것은 최후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주고 있는 우물을 판 증거의 몫으로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서로 맹세를 하고 그곳 이름을 브엘세바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에 아브라함은 에셀 나무를 심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은 깊은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에셀나무’ אשל(에쎌 815 명사, 남성, 단수) 에셀나무, 라는 뜻입니다. 이 나무는 광야에서 많은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입니다. 뿌리가 땅속으로 30m 나 파고 들어가기 때문에 더위가 심한 광야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잎이 짜기 때문에 이 짠 성분이 공기 중에 있는 수분을 흡수하여 새벽에는 많은 이슬을 맺게 됩니다. 그래서 낮에는 이슬 때문에 한낮에도 다른 곳보다 온도가 내려가 서늘하게 만들어 주는 나무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이 나무는 바로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나무입니다. ‘에쎌의 히브리적 의미는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희생하셔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삶을 통제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에셀 나무 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전파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바로 이곳은 맹세의 우물이 있는 곳이며 영원한 생수가 터져 나오는 곳에 에셀 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원한 생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믿음 생활을 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십자가 복음을 담대히 전한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세상의 권세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브엘세바에서 에셀 나무를 심은 것처럼 우리의 심령에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는 삶을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셀 나무는 사울과도 연관이 있는 나무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고 죽이려고 합니다. 또한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다윗에게 영광을 더 돌리는 것을 보면서 질투하여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삼상22:5-6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그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 아래에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의 곁에 섰더니

 

다윗에게 환난 당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여들었는데400명가량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갓은 다윗에게 유다로 들어가라고 명령하고 다윗이 유다 땅 헤렛 수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에 사울이 다윗과 함께 있는 자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기브아 높은 곳에서 단창을 들고 에셀 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그럼 사울이 다윗이 유대 땅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기브아의 에셀 나무 밑으로 간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기브아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이곳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도시입니다. 에셀 나무는 브엘세바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최남단 광야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가 기브아에 있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이곳에서 자란 나무가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심어 놓은 에셀 나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울의 행동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진리가 무엇입니까? 다윗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워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사람이 인정한 왕입니다. 현재 육적인 권세는 사울에게 있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다윗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찾아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기브아 자신의 고향에 에셀 나무 밑에서 단창을 들고 앉아있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을 인위적으로 만나려고 한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에셀 나무의 개념이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자신의 고향인 에셀 나무 밑에 앉아있다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도 자연적으로 자란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고향에 심어놓은 에셀 나무 밑에서 육적인 왕의 권세를 보여주어 다윗과 함께 하지 말라는 무언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에셀 나무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헤렛 수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헤렛 수풀에 있는 다윗을 보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헤렛’ חרת(헤레트 2802) 헤렛, 이며 이 단어는 חרת(하라트 2801) 새기다, 조각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다윗은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것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돌 판에 글자를 새겨 넣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라는 것이 다윗의 심령 판에 완전하게 새겨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항상 사울 앞에서도 당당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현재 이스라엘의 왕이지만 다윗을 보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겉만 왕이지 속에는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내 심령의 판에 새겨져야 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에 당당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족속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워주신 것처럼 우리들도 구원받았다면 왕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하지만 사울과 같은 신앙을 하는 사람들은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빈 강정과 같아서 십자가 복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영적인 하나님의 왕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끝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워주셔서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삼상31:11-13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임의로 에셀 나무 밑에 앉아서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사울 왕은 길보아 전투에서 블레셋과 싸우다가 자결하여 죽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사울을 발견하고 머리를 베고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았습니다.

 

‘벧산’ בית שאן(베이트 쉐안 1052) 벧산, 이며 이 단어는 ‘평안한 집’ 이라는 뜻입니다. 블레셋 민족들은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의 장례는 그 날에 죽으면 바로 땅에 묻어주는 것이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원수인 사울에게 수치를 주기 위하여 벧산 성벽에 매달은 것입니다. 벧산의 뜻은 평안과 안식이 있는 곳이지만 사울에게는 절대 이런 영원한 평안과 안식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방 민족인 블레셋 사람들이 벧산 성벽에 매달은 것입니다.

 

이것을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화장을 해주고 그의 뼈를 야베스 에셀 나무 밑에 장사하였습니다. 그럼 사울을 야베스의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 지낸 것에 대한 영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야베스’ יבש(야베쉬 3003) 야베스, 이며 이 단어는 יבש(야베쉬 3001) 수치를 당하다, 부끄러움을 당하다, 시들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여 왕에서 폐위된 사람입니다. 육적으로는 왕이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폐위가 되었습니다. 이런 자가 억지로 에셀 나무에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육적으로 통치를 했더니 결국 전쟁에서 죽게 되고 죽고 난 이후에도 수치를 당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고 사울의 가문은 점점 쇠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도 억지로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고 자신의 행위를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다윗과 같이 영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하는 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왕이 되면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게 되고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에셀 나무를 통해서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영생하시는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주님과 함께하면 뜨거운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 그늘이 되어 주시고 쉼과 안식을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은 에셀 나무에서 영생하신 주님을 만난 것처럼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에셀 나무를 선포하여 구원의 은혜를 받게 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영생하시는 주님을 만남으로 기뻐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멘토링] 믿음의 여섯 단계가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멘토링 중에서 믿음의 여섯 단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믿음의 여섯 단계 릭 워렌 당신은 하나님께서 예측할 수 있는 단계를 따라 당신의 인격을 빚어가신

rhb-bible.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