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사사기 11장 히브리어 설교 말씀 중에서 사사 입다의 서원 기도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사 입다는 암몬 자손과 싸우러 나갈 때에 서원을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자신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그를 여호와께 돌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암몬 자손을 이기고 돌아왔을 때 자신의 무남독녀 나오면서 소로를 잡고 춤을 추면서 영접했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대할 때 어떻게 보면 난제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신 제사를 성경에서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우상들은 인신 제사를 받지만 하나님은 절대 인신 제사를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입다가 정말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신 인신 제사를 드렸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인신 제사를 드렸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상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성경 히브리어를 보면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사사 입다의 서원 기도”(삿 11:29-40)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입다의 서원에 대하여 말씀을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이 본문은 보통 난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입다가 암몬 족속들과 싸우기 전에 하나님께 서원하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입다는 암몬 족속을 자신의 손에 넘겨주시면 자신을 제일 먼저 영접하는 그를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서원을 받으시고 암몬 족속들을 입다의 손에 붙여주시고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올 때에 자신의 딸이 기뻐서 소고를 치고 춤을 추며 아버지를 영접하게 됩니다. 이렇게 됨으로 입다는 자신의 딸을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드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 때문에 입다가 자신의 딸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입다의 서원을 통하여 정확한 하나님의 의도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속사 관점에서 입다의 서원과 자신의 딸의 행동들을 통하여 주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영적으로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입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을 암몬에서 구원하고 있습니다. 입다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첫째, 입다는 길르앗 사람이며 기생의 아들입니다.
1절 베이프타흐 하길르아디 하야 깁보르 하일 베후 벤 이솨 조나 바욜레드 길르아드 에트 이프타흐
삿 11:1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성경은 입다를 소개하면서 길르앗 사람이라고 명시하면서 기생이 길르앗이라고 하는 사람에게서 낳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길르앗 사람’이라는 단어는 (길아디 1569) 길르앗 자손,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증거 하다, 증언하다, 라는 뜻과 옮기다, 떠나게 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입다는 길르앗 사람이며 천한 기생의 자식으로 부정하여 버림을 받았습니다. 정부인에게서 나온 아들들에게 버림을 받아 쫓겨나게 됩니다. 이것을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이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6절 디오 카이 페리에케이 엔 테 그라페 이두 티데미 엔 시온 리돈 아크로고니아이온 에클레크톤 엔티몬 카이 호 피스튜온 에프 아우토 우 메 카타이스퀸데
7절 휘민 운 헤 티메 토이스 피스튜우신 아페이두신 데 리돈 혼 아페도키마산 호이 오이코도문테스 후토스 에게네데 에이스 케팔렌 고니아스
8절 카이 리도스 프로스콤마토스 카이 페트라 스칸달루 호이 프로스코프투신 토 로고 아페이둔테스 에이스 호 카이 에테데산
벧전 2:6-8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는데 건축자들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이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럼 입다가 길르앗 사람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릿돌이 되어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심으로 인하여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죄를 굴려 떠나게 하시고 죄악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시고 선언하셨습니다. 길르앗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입다’라는 단어는 (이프타흐 3316) 입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פתח(파타흐 6605) 열다, 빼다, 베풀다, 해방하다, 자유롭게 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입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것이 이름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입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암몬 족속들에게 고통과 고난을 당하고 있는 곳에서 해방시켜 주는 인물입니다. 이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나의 모든 죄악의 고통에서 빼내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 죄악의 몸에서 해방시켜 주셔서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자유롭게 하여 주셨습니다. 입다가 아니면 암몬 족속들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절대 죄악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가 어떻게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가 있습니까?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둘째, 입다는 전쟁에 나가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30절 바이다르 이프타흐 네데르 라아도나이 바요마르 임 나톤 티텐 에트 베네 암몬 베야디
31절 베하야 하요체 아쎄르 예체 미달테 베이티 리크라티 베슈비 베솰롬 미베네 암몬 베하야 라아도나이 베하알리티후 올라
삿 11:30-31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입다는 암몬 족속들과 싸우기 전에 승리의 확신을 위해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올 때에 자신을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본문을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진짜로 입다가 잘못 서원하여 자신의 딸을 죽였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원어에 근거하여 풀어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인간을 제물로 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입다가 내가 그를 드린다고 했는데 히필 사역 능동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남성 3인칭 단수를 사용합니다.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입다는 무남독녀를 하나님께 드리려고 서원하지는 않았습니다.
21절 우미자르아카 로 티텐 레하아비르 라몰렉크 베로 테할렐 에트 솀 엘로헤이카 아니 아도나이
레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자신의 자녀를 몰렉에게 바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신 제사를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절대 하지 말라는 로(3808) 강한 부정 부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인신 제사를 받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하지 말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인신 제사를 받으면 안 됩니다.
6절 베헤에비르 에트 베노 바에쉬 베오넨 베니헤쉬 베아사 오브 베이드오님 히르바 라아쇼트 하라 베에네 아도나이 레하케이스
왕하 21:6 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
므낫세 왕은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여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 하는 일을 므낫세 왕이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사 입다의 서원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있었고 기뻐하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딸을 바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입다의 딸이 제일 먼저 나와서 반겨줄 사람은 무남독녀 자신의 딸밖에는 없다는 것을 이미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입다는 서원할 때 남성 3인칭 단수를 사용했지만 여성 3인칭 단수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딸을 바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입다의 딸이 제일 먼저 나와서 영접할 것도 알고 있습니다. 입다가 집에 들어올 때 딸이 하나밖에 없는데 그럼 누가 제일 먼저 나와서 입다를 반길까요? 당연히 딸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드리겠나이다’라는 단어는 (알라 5927 CW.VHACXS.MZS 와우접속사 동사 히필(사역 능동) 완료 공성 1인칭 단수. 남성 3인칭 단수) 올라가다, 상달하다, 기도하다, 끌어내다, 라는 뜻입니다. 입다가 번제로 하나님께 올려드리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상달되는 서원이며 기도하여 암몬 족속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서원을 받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했던 것에서 끌어내어 주셔서 자유의 몸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깊은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입다의 서원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서원이 정말 자신의 딸을 인신 제사로 바친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입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입다가 서원하는 것은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을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직접 번제물이 되어 주실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입다의 딸은 성도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번제의 제물이 되어 성도들을 죄악에서 구원하시는 것을 의미해 줍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풀어보겠습니다.
34절 바야보 이프타흐 하미츠파 엘 베이토 베힌네 비토 요체트 리크라토 베투핌 우비메홀로트 베라크 히 예히다 에인 로 미메누 벤 오 바트
삿 11: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에 제일 먼저 나온 자가 입다의 딸입니다.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입다를 영접하고 있습니다.
‘미스바’라는 단어는 (미츠파 4709) 미스바,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צפה(차파 6822) 빛나다, 감찰하다, 보살피다, 지키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미스바는 입다의 집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입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면 딸은 성도의 모형입니다. 입다의 집인 미스바에서 자신의 딸은 하나님의 보살핌과 감찰 속에서 지켜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알고 기뻐서 제일 먼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를 제일 기뻐할 자들은 바로 구원받은 성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심령을 감찰하시고 생활을 감찰하시며 모든 삶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빛나게 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셋째, 입다는 자신의 옷을 찢고 있습니다.
35절 바예히 키르오토 오타흐 바이크라 에트 베가다이브 바요메르 아하흐 비티 하케레아 히케라에티니 베아트 하이트 베오케라이 베아노키 파치티 피 엘 아도나이 베로 우칼 라슈브
삿 11: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입다는 자신의 딸이 제일 먼저 나와서 영접하자 자신의 옷을 찢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참담하게 하는 자며 괴롭게 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으니 돌이키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입다의 고백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진리는 무엇입니까?
‘자기 옷을 찢으며’라는 단어는 (카라 7167 CW.VQIMZS 와우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찢다, 잘라내다, 떼어버리다, 갈라지다, 라는 뜻입니다. 입다는 자신의 딸이 제일 먼저 영접한 것을 보고 즉시로 자신의 옷을 찢어버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옷을 찢은 것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입다가 하나님께 대한 서원을 하기 싫어서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성도들의 죄를 잘라내며 자신의 몸이 갈라짐으로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죽음에서 떼어내어 생명으로 접붙여 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4절 엔 데 호세이 호라 헤크테 카이 스코토스 에게네토 에프 홀렌 텐 겐 헤오스 호라스 엔나테스
45절 카이 에스코티스데 호 헬리오스 카이 에스키스데 토 카타페타스마 투 나우 메손
46절 카이 포네사스 포네 메갈레 호 이에수스 에이펜 파테르 에이스 케이라스 수 파라데소마이 토 프뉴마 무 카이 타우타 에이폰 엑셀프뉴센
눅 23:44-46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통을 당하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이 휘장은 성전에 있었는데 황소 3마리가 양쪽에서 끌어도 찢어지지 않는 아주 단단하게 만든 천입니다. 그런데 이 휘장이 찢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서원하신 모든 것을 이루어주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찢어지더라는 단어가 입다가 옷을 찢는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 히브리어는 카라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20절 헨 에네카이니센 헤민 호돈 프로스파톤 카이 조산 디아 투 카타페타스마토스 투테스틴 테스 사르코스 아우투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하여 휘장이 찢어졌는데 이 휘장은 곧 주님의 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 열린 것입니다. 입다가 옷을 찢어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예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자신의 딸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말씀으로 풀어드리겠습니다.
‘참담하게 하는 자요’라는 단어는 (카라 3766 VHAFYS.CXS 동사 히필 완료 여성 2인칭 단수. 공성 1인칭 단수) 엎드리다, 경배하다, 무릎을 꿇다, 라는 뜻입니다. 입다는 자신의 딸을 보면서 참담하게 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입다의 마음이 참담한 것이지만 자신이 딸을 대신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엎드리고 경배하여 무릎을 꿇을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41절 카이 아우토스 아페스파스데 아프 아우톤 호세이 리두 볼렌 카이 데이스 타 고나타 프로세위케토
42절 레곤 파테르 에이 불레이 파레넹케인 토 포테리온 투토 아프 에무 플렌 메 토 델레마 무 알라 토 손 게네스도
눅 22:41-42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단어가 신약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카라’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입다가 참담하다고 고백했던 단어와 같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경배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모습의 예표입니다. 자기의 딸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고민하고 번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대신 자신이 번제의 희생이 되겠다는 고백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나의 죄를 위하여 고민하셨고 번민하셨습니다.
넷째, 딸은 처녀로 죽음을 애곡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7절 바토메르 엘 아비하 예아세 리 하다바르 하제 하르페 미메니 쉐나임 호다쉼 베엘카 베야라드티 알 헤하림 베에브케 알 베툴라이 아노키 베라이티
38절 바요메르 레키 바이쉘라흐 오타흐 쉐네 호다쉼 바텔레드 히 베레오테이하 바테브크 알 베툴레이하 알 헤하림
39절 바예히 미케츠 쉐나임 호다쉼 바타솨브 엘 아비하 바야아스 라흐 에트 니드로 아쎄르 나다르 베히 로 요드아 이쉬 바테히 호크 베이스라엘
삿 11:37-39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입다의 딸은 아버지에게 말하면서 자신에게 두 달의 시간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친구들과 산에 가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다는 허락 해 주고 있습니다. 두 달 동안 이들은 처녀로 죽는 것을 인하여 애곡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입다는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였다고 하면서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의 원문에는 번제물로 죽여 드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입다의 딸은 성도의 모형입니다. 이 딸이 두 달 동안 처녀로 죽는 것을 애곡 하겠다고 했습니다. 2의 숫자적 의미는 분할, 증인, 연합, 이라는 의미입니다. 입다의 딸은 두 달 동안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하여 시간을 할애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삶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할 증인의 삶으로서의 각오를 갖추어 세상과 분리되어 오직 주님께만 헌신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처녀로 사는 것을 애곡 하기 위하여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라는 단어는 (베투림 1331) 처녀성, 처녀성의 징표들,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בתל(바탈) 분리시키다, 격리시키다, 떼어놓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딸이 애곡 했다는 것은 이제부터 세상과의 분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번제물이 되어 죽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추악한 삶에서 분리되어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만 충성되게 살 것을 두 달 동안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었더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동정녀처럼 깨끗하고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순수한 상태로 주님께 헌신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8절 바야아스 에트 하키요르 네호쎄트 베에트 카노 네호쎄트 베마르오트 하초베오트 아쎄르 차베우 페타흐 오헬 모에드
출 38:8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22절 베엘리 자켄 메오드 베솨마 에트 콜 아쎄르 야아순 바나이브 레콜 이스라엘 베에트 아쎄르 이쉐케분 에트 하나쉼 하초베오트 페타흐 오헬 모에드
삼상 2: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성막에는 제사장들만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 아닙니다. 여인들도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입다의 딸은 죽음으로 번제물이 된 것이 아니라 평생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 남자와 동침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입다의 딸이 남자를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딸이 죽는데 왜 남자와 동침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겠습니까? 이렇게 기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통곡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도의 회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께 드려진 삶을 사는 자들은 회개해야만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막에서 봉사하는 자들은 아무나 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자만 들어갈 수 있고 선택받은 자만 들어가서 봉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입다의 딸은 두 달 동안 회개하고 자신의 죄악에 있었던 때를 슬퍼하며 앞으로 하나님께 평생 드려지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12절 호데 휘포모네 톤 하기온 에스틴 호데 호이 테룬테스 타스 엔톨라스 투 데우 카이 텐 피스틴 이에수
계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성도는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십자가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자가 성도입니다. 입다의 딸은 이제부터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입다의 서원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 입다는 서원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인하여 성도를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인간을 제물로 받지 않습니다.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순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에도 숫양을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입다의 딸처럼 하나님께만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고 신랑 되신 주님만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남자를 몰랐다는 것은 다른 신랑을 맞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랑으로 삼아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입다의 딸은 이렇게 서원에 응답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입다의 서원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서원이었으며 하나님은 이 서원을 통하여 성도들의 삶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니엘 5장 히브리어 설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뜻”(단 5: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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