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20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여리고의 두 맹인 치유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질병도 고쳐주셨습니다. 먼저 육체의 질병을 고쳐주시고 영혼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를 칩니다.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맹인은 부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 함부로 나설 수가 없습니다. 무리들은 잠잠하라고 말하지만 맹인들은 더 높이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예수님이 들으시고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냐고 했습니다. 그때 맹인들은 눈 뜨기를 원하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져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의 영안을 열어주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다면 아직도 영혼의 맹인이 되어 예수님의 진리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감사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여리고의 두 맹인 치유 사건(마 20:29-34)
29절 카이 에크포류오메논 아우톤 아포 히에리코 에콜루데센 아우토 오클로스 폴뤼스
마 20: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20:29
이 일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일어났다. 저주 가운데서 재건되었던 그 열성적인 장소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축복을 남겨 두셨다. 왜냐하면 그는 반역자를 위한 은사들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 일은 "그를 좇던 큰 무리들" 앞에서 행해졌다. 그리스도는 비록 호화스러운 자는 아니었지만 수많은 청중들을 거느리셨으며 비록 당당한 모습을 갖추시지는 못하셨지만 그들에게 선행을 베푸셨다. 그리스도를 따랐던 이 무리들은 여러 혼합된 무리였다. 어떤 사람은 떡을 먹으려고, 어떤 사람은 사랑 때문에, 어떤 사람은 제자들이 꿈꾸고 있었던 현세적인 통치를 기대하면서 그를 따랐다.
그러나 자신들이 할 임무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을 위하여 그는 많은 무리들 앞에서 이적을 행함으로써 그의 교훈을 확증하였다. 만일 그들이 그것들에 의해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은 더욱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두 소경은 그들의 요구에 있어서 일치하였다. 왜냐하면 합심하는 기도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기 때문이다(마 18:19). 이 함께 고통당하는 자들은 함께 청원하는 자들이었다. 동일한 시련 가운데서 동료가 되었으므로 그들은 동일한 간구에서도 동반자가 되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동일한 재난이나 또는 몸과 마음의 연약성 가운데 고통당하는 자들이 서로의 열심을 일깨우고 서로의 믿음을 격려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대해 똑같이 구원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유익하다. 그리스도에게는 모든 간구자들을 위한 풍성한 자비가 있다. 이 소경들은 흔히 소경 거지들이 하는 것처럼 "길가에 앉아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자비를 얻으려고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출입하시는 곳에 앉아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곳에서 그는 그를 찾는 자들에게 나타나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다니시는 길에 앉아 있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 여리고에서 두 소경을 치유하시는 이 사건은 제3차 수난 예고와 겸손과 섬김에 관한 교훈을 가르치신 17-28에 이어지는 내용이므로 원어 성경은 ‘그리고’ 란 뜻이 있는 ‘카이’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카이'가 소문자로 기록되어도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대문자로 시작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사건이지만 그 내용이 새롭게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한편 ‘떠나갈 때에’라고 번역된 ‘에크포류오메논’의 원형 ‘에크포류오마이’는 일반적으로 성이나 마을 같은 특정한 장소에서 밖으로 나온다는 공간적 이동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나오고 있는 상황을 분명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서 누가는 ‘엥기조’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한다(눅 18:35-43), 이 둘의 차이점은 전치사를 통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마태는 ‘~으로부터’란 뜻을 가진 ‘아포’라는 전치사를 누가는 ‘~안으로’란 뜻을 가진 ‘에이스’라는 전치사를 사용한다.
왜 복음서 기자는 같은 사건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표현을 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가장 지지받는 견해는 ‘2개의 여리고 설’이다(Robertson) 예수께서 구여리고를 떠나 거기서 1.5Km 떨어진 헤롯 대왕에 의해 신축된 신여리고에 이르렀을 때 소경을 고치셨다는 것이다.
마태, 마가는 구여리고에서 이 사건을 보았고 누가는 신여리고에서 이 사건을 바라본 것이다. 또 하나의 가능한 견해는 소경의 치유 청원과 실제 치유가 이루어진 것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Calvin) 이 견해에 따르면 누가의 기록은 치유의 청원으로 마태와 마가의 기록은 치유 청원에 대한 응답으로서 실제 이루어진 치유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여리고로 들어올 때 예수는 간절한 소경의 치유 호소를 들었지만 그때 그들을 고쳐주지 않았으며 삭개오 집에서 하룻밤을 머문 후 여리고 성을 나올 때 소경을 고쳐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견해가 더 신빙성을 갖는지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이 같은 공관복음서의 미묘한 상이점은 사건 자체의 실제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사건의 역사성을 확고하게 하며 생동감 있게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게 한다.
30절 카이 이두 뒤오 튀플로이 카데메노이 파라 텐 호돈 아쿠산테스 호티 이에수스 파라게이 에크락산 레곤테스 엘레에손 헤마스 퀴리에 휘오스 다비드
마 20: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20:30
"그들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들었다." 비록 그들은 소경이었지만 귀머거리는 아니었다. 보고 듣는 것은 배우는 감각기관(the learning senses)이다. 그중에 하나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실로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중 하나의 결핍은 다른 것을 더욱 예민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소경이면서 귀머거리로 태어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본보기라고 말해 왔다. 어쨌든 모든 사람은 여러 수단을 통하여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소경들은 청각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눈이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였다.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들었을 때 그들은 누가 그와 함께 있으며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지 않고 즉각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현재의 기회를 활용하거나 지금 손안에 있는 돈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것을 한번 놓치게 되면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경들은 그렇게 하였으며 지혜롭게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여리고에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 받을 만한 때이다."
길 가에 앉았다가 - ‘앉았다가’로 번역된 ‘카데메노이’의 원형 ‘카데마이’는 자기들의 직무를 이행하면서 앉아 있는 자들에 대해 사용된다(막 2:14). 소경들은 보통 경제적 능력을 잃어버린 자들로서 다른 사람들의 동정에 의해서 살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큰길에서 동냥하는 것이 이들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대로에 앉아서 신분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으로 주어진 현재의 삶에 충실한 소경의 모습을 잘 묘사한다. 한편 ‘카데메노이’는 ‘카데마이’의 직설법 현재분사이다. 그리고 2명의 소경이 예수께 치유를 간절히 청원하며 사용한 단어인 ‘불쌍히 여기소서’란 뜻의 ‘엘레에손’은 명령법 과거이다.
헬라어에서 현재분사는 주동사와 동일한 시간에 일어난 동작을 나타낸다. 즉 본문은 2명의 소경이 구걸을 하는 자신의 현재라는 삶의 자리에 앉아 있었을 때 치유의 기회가 그들에게 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비록 소경이라는 소외되고 버려진 상태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복음의 소식은 그들의 삶 속에도 들려졌고 소경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구원은 특별히 정해진 어떤 장소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언제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구원의 복된 소식을 일상적인 삶 속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
소리 질러 - ‘에크락산’의 원형 ‘크라조’는 ‘공공장소에서 소리 높여 외쳐 부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 단어는 예수와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는 공공장소에서 신앙 고백적 차원으로 예수의 선지자적 권위를 선포할 때 사용되었다.
귀신에 사로잡힌 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쳤고 (8:29) 가나안 여인(15:22)과 본문의 소경은 ‘다윗의 자손’이란 외침으로써 예수가 메시아임을 고백했다. 따라서 소경이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리를 지른 것은 소경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것은 바로 단순히 치료받기 위한 겉치레적 발언이 아니라 예수의 소문을 듣고 생겨난 소경들의 신앙 고백적 외침이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불쌍히 여기소서’로 번역된 ‘엘레에손’은 ‘연민을 가지다’, ‘도움을 주다’ 등의 뜻을 지니는 ‘엘레에오’의 부정 과거 능동태 명령형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 단어는 비록 명령형으로 쓰였으나 치료를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간구’하는 소경들의 모습을 강조적으로 보여 주기 위하여 사용된 표현이다.
본래 이 단어는 그리스 시인 호머 이후에 사용되었으며 다른 사람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고 동일한 감정이 자신에게 경험되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였다. 이것이 성경에 들어와 구약 성경 헬라어 번역본인 칠십 인 역 (LXX)에서 ‘헤쎄드’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구약 성경에서 ‘헤쎄드’는 인간의 불행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구할 때 사용되었으며 신약에서 ‘엘레에오’ 는 예수의 이적 기사에서 인간 세상의 고통에 대한 메시아의 신적 자비를 구할 때 사용되었다 (8:27; 15:22 ; 17:15). 그러므로 소경이 예수께 ‘엘레에손’이라고 말한 것은 먼저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서 자비를 구하는 그들의 겸손을 잘 보여 준다.
31절 호 데 오클로스 에페티메센 아우토이스 히나 시오페소신 호이 데 메이존 에크라존 레곤테스 엘레에손 헤마스 퀴리에 휘오스 다비드
마 20: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20:31
그 청원의 말이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를 두 번씩이나 반복하였다(31절). 이 청원에서 우리는 4가지의 모범적인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육신의 눈은 어두웠지만 마음의 눈은 진리와 의무와 중대한 문제에 대해 밝게 떠 있었다.
(1) 여기에서 기도의 지속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열심 있는 사람처럼 부르짖었다. 싸늘한 소원은 거절당할 수밖에 없다. 설득될 수 있는 기도를 드리려고 하는 자는 의무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굳게 붙잡으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들은 잠잠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열심의 시냇물은 중단이 될 때 더욱 높이 불어날 것이다. 이것이 기도로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자비를 받기에 더 합당한 자로 만든다. 왜냐하면 자비를 구하면 구할수록 그것은 더욱 보상이 되고 감사함으로 인정이 되기 때문이다.
(2) 기도의 겸허 성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즉 그들은 그 긍휼이 어떤 것이라고 구체화하거나 그것이 어떤 것이라고 말하거나 더욱이 자신들의 공로를 진술하지 않고 다만 그의 기쁘신 대로 중보자의 긍휼에 모든 것을 맡기고 즐거움으로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만 긍휼을 베푸소서." 그들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은이나 금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다만 긍휼, 긍휼만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긍휼 하심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히 4:16; 시 130:7) 우리의 마음이 목표하는 바가 되어야만 한다.
(3) 기도의 믿음을 찾아볼 수 있다. 즉, 그들이 그리스도께 붙인 명칭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애원과 비슷한 것이었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시며" 따라서 그들의 구원을 명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고백하였다. 분명히 그들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른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었다(고전 12:3). 이와 같이 그들은 기도함으로써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용기를 얻었으며, 다윗의 자손이라 부름으로써 그의 선하심으로 말미암은 용기를 얻었으며, 즉 많은 긍휼과 자비 특히 가난하고 빈곤한 자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미리 예언된 메시야(시 72:12, 13)인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름으로써 용기를 얻었다. 기도 가운데서 메시야의 은혜와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특별히 유익이 있다. 즉 그가 돕고 구원하며 간구 하시는 다윗의 자손임을 기억하는 것은 특별한 유익이 있다.
(4) 실망하지 않고 계속하는 기도의 인내성을 찾아 볼 수 있다. "그 무리들"은 시끄럽고 버릇없는 것처럼 "그들을 꾸짖고, 잠잠 하라"고 하였으며, 그 주님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 아마도 주님은 맨 처음엔 그들에게 유의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보여진다. 기도로써 그리스도로 따를 때 우리는 안팎으로부터 장애물과 여러 가지 실망된 일들을 만나게 될 것을 각오해야만 하며 또한 우리를 잠잠하라고 하는 여러 가지 들에 직면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각오해야만 한다. 신앙과 열심, 인내와 오래 참음이 연단되기 위하여 이러한 책망들을 인정되고 있다.
이 가련한 소경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에 의해 책망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문에 있는 참되고 진지한 거지들은 대개 거짓과 위선으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서 극심한 책망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로 말미암아 떼어버림을 받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긍휼을 구하고 있는 그대야말로 아첨을 하거나 나약한 동정을 꾀할 때는 아니었다. 아니, "그들은 더욱 소리를 질렀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사람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만 한다." 즉 끝까지 기도해야만 한다(눅 18:1). 다시 말하면 굳게 결심하고 기도를 계속해야만 하며 반대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32절 카이 스타스 호 이에수스 에포네센 아우투스 카이 에이펜 티 델레테 포이에소 휘민
마 20: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20: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 ‘머물러 서서’로 번역된 ‘스타스’의 원형 ‘히스테미’는 주어에 따라 두 가지 용례가 있다. 첫째는 사람이나 천사 같은 피조물이 주어일 경우에는 현존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존재 앞에 서 있는 연약한 모습을 묘사한다(계 7:11).
둘째는 창조자 자신이 주어일 경우에는 특정한 목적을 갖고 행하시던 일을 잠깐 멈출 때 사용된(눅 7:14). 따라서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신 것은 단순히 소경과 소란한 무리들을 바라보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눈길을 돌린 것이 아니라 창조주로서 소경들의 눈을 고쳐주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신 움직임이었다.
본문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머물러 서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무리들의 강력한 저지에도 불구하고 간절하게 예수님의 치유를 호소하는 소경의 믿음이었다. 간절한 소경들의 외침은 예수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기도 응답을 위해서 자신의 걸음을 멈추시는 분이시다.
그들의 청원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 무리들은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격려하였다. 만일 주님이 무리들보다 더 친절하시거나 온유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슬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책망을 받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 자들을 특별한 호의로써 후원해 주시기를 좋아하신다. 주님께서는 그의 겸손한 자들을 넘어지게 하시거나 돌보는 일을 배제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부르셨다"(32절). 그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도중이었으며, 또한 거기에서 그의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서는 서둘러 가셔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소경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서 계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서둘러 행하려고 할 때에라도 우리는 선을 행하기 위하여 기꺼이 서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들을 부르셨다." 이는 그가 멀리서 그들을 치유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일을 친절하고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행하시며 또한 연약하면서도 자발적인 병자들과 간구자들에게 호의를 베풀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즐거워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초청하신다. 우리들에게 황금으로 된 홀(忽)을 내미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그 끝을 잡기 위해 나아오라고 명령하신다.
33절 레구신 아우토 퀴리에 히나 아노이크도신 헤몬 호이 오프달모이
마 20:33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20:33
주님께서는 더욱이 그들의 처지를 질문하셨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1) 매우 정중한 제언. "내가 여기에 있다. 너희가 가지고 싶은 것을 내게 말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그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더 원할 것인가? 그는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있으며 또한 기꺼이 하실 수 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 이 제언과 연관된 조건. 그것은 매우 쉽고 합리적인 것으로써, 즉 그들은 그가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해 주시기를 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물론 이를 충분히 알고 계셨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서 그들이 일반적인 사람에게 자선을 구하는 것처럼 하는가 또는 메시아에게서 치료를 구하는 것처럼 하는가를 알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매사에 기도나 간구로 그에게 우리의 요구를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다. 갈고리를 가지고 해안에 배를 매어 둔 어부는 그것으로 해안을 배로 끌어당기지 않고 배를 해안으로 끌어당긴다. 이와 같이 기도에서 우리는 자비를 우리들에게로 끌어당기지 않고 우리를 자비에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들은 결코 누구에게 요구해 보지 않은,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들의 요구를 그에게 즉시 알렸다. 우리는 우리 몸의 결점과 고통을 즉시 느낄 수 있으며 쉽게 말할 수 있다. Ubi dolor, ubi digitus─즉 손가락은 신속하게 아픈 곳을 가리킨다. 오, 우리가 영적인 질병에 대해 걱정하며 그것에 대해 아프다고 하며 특별히 우리의 영적인 소경에 대해 한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것인가! 주여, 우리 마음의 눈을 뜨게 하옵소서!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소경이 되었으면서도 그들은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요 9:41). 만일 우리가 우리의 어두움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즉시로 오직 유일하게 안약을 가지고 계신 그에게 "주여 우리가 눈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요구할 수가 있을 것이다.
34절 스플랑크니스데이스 데 호 이에수스 헵사토 톤 오프달몬 아우톤 카이 유데오스 아네블렙산 아우톤 호이 오프달모이 카이 에콜루데산 아우토
마 20: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20:34
주님께서는 그들을 낫게 해 주셨다. 그가 그들에게 자기를 찾으라고 격려를 하실 때 그는 "헛되이 찾으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가 행하신 것은,
(1) 그의 긍휼의 본보기였다. "예수께서는 저희를 민망히 여기셨다." 불행은 자비의 대상이다. 가난하고 소경 된 자는 "곤고하고 가련하며"(계 3:17) 또한 동정의 대상이 된다. 흑암에 앉은 자들에게 빛과 시각을 주신 것은 우리 하나님의 온유하신 자비이다(78, 79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이러한 불행 가운데 있는 자들을 도울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하며 우리의 영혼을 그에게 접근시켜야 한다.
(2) 그의 능력은 본보기였다. "눈을 만드신 자가 그것을 고치지 못하겠느냐?" 그렇다. 그는 할 수 있다. 그는 그것을 쉽게 하였다. 그는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그는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셨다. "곧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심으로써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입증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보내심을 받으셨는가를 보여 주었다. 즉 그 목적은 영적으로 소경 된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키시며, "그들을 흑암에서 빛 가운데로 돌이키시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소경들은 시력을 되찾았을 때 "그를 따랐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누구든지 눈을 가리고 그리스도를 따를 수는 없다. 그는 먼저 그의 은혜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그를 따르게 하신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그에게서 배우기 위하여 그를 쫓았으며 또한 그의 증인, 목격자로서 그와 그의 능력과 선하심에 대해 증거 하기 위해 그를 쫓았다. 영적인 광명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우리 주시요,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꾸준히 떨어지지 않고 따라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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