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 원문 설교강해 자료

[사무엘하 원어성경 말씀] 다윗과 므비보셋의 구속사적 관계(삼하 9:1-8)

르호봇 2022. 5. 11. 11:06
반응형

우리는 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속사 관점에서 다윗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므비보셋은 성도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 본문을 묵상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과 므비보셋의 구속사적 관계(삼하 9:1-8)

 

오늘 하나님께서 다윗과 므비보셋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주고 있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주님의 은총이 임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이 시간 내가 전혀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존재인 므비보셋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므비보셋을 이야기하자면 사울과 요나단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손자인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내릴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쫓아다녔기 때문입니다. 사울 때문에 고향을 버리고 블레셋 땅에 들어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미친척하면서 목숨을 구걸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왜 사울의 가문에 남아있는 손자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윗과 요나단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막역한 사이로 다윗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입니다.

 

삼상18:1-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그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다윗이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죽이고 난 후에 사울 왕 앞에 서서 말을 마친 후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언약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단(예호나탄 3083)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의 뜻에는 여호와께서 주셨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한 것은 어떠한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너의 생명을 지켜주겠다는 언약을 한 것입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시기심에 다윗을 죽이려고 하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다윗의 생명을 끝까지 지켜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윗과 요나단이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지만 요나단 때문에 사울 가문에 남아있는 자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다윗과 므비보셋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인물로서 구속사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언약을 맺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에서 나올 것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 시간 다윗과 므비보셋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진리는 무엇일까요?

 

첫째, 므비보셋은 다리를 저는 사람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절 바요메르 하멜렉크 하에페스 오드 이쉬 리베이트 샤울 비에에세 임모 헤세드 엘로힘 바요메르 치바 엘 하멜렉크 오드 벤 리예호나탄 네케 라길라임

삼하9:3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다윗 왕이 시바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가문에 아직도 목숨이 살아남은 자가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요나단과의 언약 때문입니다. 이 언약을 절대 어길 수가 없습니다. 언약에는 가른다는 의미의 뜻이 있기 때문에 언약을 어기면 반드시 자신의 몸도 갈라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끝까지 다윗과의 언약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사울의 가문에 남은 자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다리 저는 므비보셋입니다.

 

삼하4:4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므비보셋의 다리가 절게 된 것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시바가 도망을 치다가 아이를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다리 저는 자니이다’ (나케 5223) 마음에 가책하는, 통회하는, 절름발이, 라는 뜻입니다. 므비보셋이 땅에 떨어져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지게 된 것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진리는 완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은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바로 죄를 지은 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개념에 장애가 없어야 만이 정상적인 사람인데 므비보셋은 이미 절름발이기 때문에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죄가 없어야 되는데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은 바로 죄인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하게 지어주셨는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음으로 죽었습니다. 정상에서 벗어나 비정상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의인이었는데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의 모습을 타락한 것입니다. 므비보셋을 통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나도 이와 같이 죽은 자 같이 비정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가 없습니다. 걷는 것도 불편하고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으며 남의 도움을 받아야 만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므비보셋의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아담 안에서 죽어있었기 때문에 불편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선택하셔서 나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고전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어 육적인 생명을 주었지만 이미 죄로 인하여 죽었던 영혼을 살리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므비보셋처럼 죄악으로 인해 영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것입니다. 내가 죄악의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주려는 은총을 깨닫게 되며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므비보셋이 은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므비보셋은 마길의 집에서 평생을 생활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4절 바요메르 로 하멜렉크 에포 후 바요메르 치바 엘 하멜렉크 힌네 후 베이트 마키르 벤 암미엘 빌로 디바르

5절 바이쉘라흐 하멜렉크 다비드 바이카헤ㅔ후 미베이트 마키르 벤 암미엘 밀로 디바르

삼하9:4-5 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다윗 왕이 시바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시바가 다윗 왕에게 말하면서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이 즉시 사람을 보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므비보셋을 데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깊은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왜 마길의 집에 므비보셋이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마길’ (마키르 4353) 마길,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마카르 4376) 노예가 되다, 팔리다, 바꾸다, 미혹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므비보셋이 마길의 집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길의 이름을 파고 들어가 보니 므비보셋이 마길에게 팔리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사람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들도 므비보셋처럼 죄악의 사망에 팔려 사망의 왕 노릇하면서 노예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탄의 미혹에 빠져 결국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죄로 팔리게 되었으며 생명을 사망으로 바꾸게 된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마길의 집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도 내 힘으로는 절대 사망의 왕 노릇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롬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담으로부터 모든 자들이 다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볼 수 있는데 내가 언제 아담이 따 먹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아담이 지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말씀처럼 아담의 범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들도 사탄의 속임에 꼬여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 죄 때문에 사망에 팔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영생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망에서 건져내 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 다윗이 므비보셋을 마길의 집에서 데려오고 있는 것처럼 나도 사망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는데 주님께서 직접 불러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를 데려오니(라카흐 3947 CW.VQIMZS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택하다, 데려오다, 옮겨가다, 찾아내다, 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을 찾은 것입니다. 다윗은 항상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여 므비보셋을 찾아 자신의 상에서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존재로 옮겨준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악에 팔려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었던 나를 선택하여 주시고 죄악의 자리에 있는 나를 찾아내어 죄악에서 끌어내어 주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골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우리 주님께서는 흑암의 권세에 팔려 있던 나를 건져내어 주셔서 영원한 천국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속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을 데려온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즉시 므비보셋을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조금의 시간이라도 죄악의 자리에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함께 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망을 싫어하시고 조금의 시간이라도 사망 안에서 있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즉시로 생명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다윗이 므비보셋을 데려오라고 한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 므비보셋은 다윗 앞에서 죽은 개와 같은 나를 돌보아 주신다는 고백을 깨달아야 합니다.

8절 바이쉬타후 바요메르 메 아비데카 키 파니타 엘 하켈레브 하메트 아세르 카모니

삼하9: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다윗이 마길의 집에서 므비보셋을 데려오고 난 후에 사울이 가지고 있었던 밭을 주면서 원래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항상 자신의 상에서 떡을 먹는 은총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은혜를 므비보셋은 받았습니다. 절름발이의 인생으로 끝날 것인데 다윗을 만나 원래의 자신의 가문의 영광을 회복받은 것입니다. 이때에 므비보셋은 죽은 개 같은 나를 돌보아주냐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이 자신을 죽은 개와 같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개 같은’ (켈레브 3611) 남자 매춘부, 주인 없는 개, 잔혹한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므비보셋은 자신을 표현하기를 죽은 개와 같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표현하기가 싶지 않습니다. 그럼 이렇게 자신을 죽은 개로 표현하는 것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진리는 무엇입니까?

 

빌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성경에 말씀하기를 개들은 율법주의자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주인 없는 개처럼 자신이 쓰레기를 뒤지며 먹고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잔혹한 개가 되어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고 혐오감을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벧후2: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그래서 성경은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로만 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잔혹하게 하나님을 비방하고 매춘부처럼 하나님 앞에 더러운 추한 우상을 섬기는 자로 타락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므비보셋이 다윗 왕 앞에서 자신을 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내가 율법 아래에서 완전하게 죽어 주인 없는 개의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이런 나에게 당신이 어떻게 은혜를 줄 수 있습니까?라는 므비보셋의 고백입니다. 자신이 은혜를 받을 만한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울의 가문이요 다윗의 원수일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다윗 왕의 식탁에서 함께 먹자고 말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므비보셋’ (메피보쉐트 4648) 므비보셋인데 우상 추방과 수치가 사라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윗을 만나 모든 죄악의 수치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추악한 죄악의 수치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는데 다윗의 절대적인 주권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것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나의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마침이 되었고 율법 아래에서 죽었던 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의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율법 아래에서 죽었던 개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주인 없이 인생을 배회하면서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주인이 없는 개를 상상해 보십시오. 병에 걸려도 고침 받을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하니 쓰레기 더미를 뒤지면서 살아야 합니다. 먹지 못하니 성격이 난폭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윗과 므비보셋을 통하여 깊은 영적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므비보셋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죄악의 장애로 인해 움직이지도 못하고 평생 마길의 집에서 살아야 했던 인생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망의 자리에서 영원히 살아야 했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나를 위해 죽으시고 강권적으로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나는 엄청난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던 자들이며 나의 의를 주장하던 자들입니다. 이렇게 사망이 왕 노릇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과 함께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영원한 주님의 생명의 진리의 복음이 떨어지지 않는 복을 받았습니다. 주인이 없는 개로 살았던 내가 이제는 주인이 있는 개로 변한 것입니다.

 

주인이 있는 개는 절대 굶지 않습니다. 먹을 것 때문에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인의 마음에 기쁨이 될까를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집에 들어왔을 때에 주인을 제일 먼저 반기면서 꼬리를 치면 정말 주인이 기쁘고 개를 키우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밥을 주는 주인도 몰라보고 으르렁 거리며 주인을 물어버리면 발로 차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얻었다면 충견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의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해 놓고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자신의 의를 나타내고 있다면 주인을 물으려고 하는 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개를 발로 차 버릴 것입니다.

 

이제부터 구원받은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가나안 땅에 정탐하러 들어간 갈렙처럼 충견이 되어야 합니다. 이 갈렙의 이름이 개이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최선을 다하여 주인의 뜻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충성스러운 개처럼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상 히브리어 설교말씀] 에벤에셀의 여호와 하나님(삼상 7:12-14)

 

[사무엘상 히브리어 설교말씀] 에벤에셀의 여호와 하나님(삼상 7:12-14)

사무엘상 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을 이기고 나서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돌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

rhb-bible.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