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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히브리어 설교말씀] 구약 사울 왕과 신약 사울(바울) 비교(삼상 10:1; 행 9:17-18)

르호봇 2021. 8. 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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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무엘상 히브리어 설교말씀 중에서 구약 사울 왕과 신약 사울(바울) 비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구약의 사울 왕은 율법주의 신앙을 상징하고 신약의 사울은 복음주의 신앙을 상징합니다. 두 관점에서 비교할 때 우리는 어떤 신앙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사울 왕과 신약 사울(바울) 비교(삼상 10:1; 행 9:17-18)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율법에 빠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나는 사람들을 보면 율법주의자들이 있고 복음주의 자들이 있습니다. 구약의 사울은 율법에 빠져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예표이고 신약의 사울은 율법주의에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와 복음을 따라가며 신앙생활하는 자의 예표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어떠한 자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말씀으로 점검하여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구약의 사울과 신약의 사울의 신앙을 비교하면서 나의 신앙도 함께 거울처럼 비춰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의 사울과 신약의 사울은 똑같이 베냐민 지파의 사람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요? 똑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 중에 율법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고 십자가 복음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예표 적으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똑같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1절 바이카흐 쉐무엘 에트 파크 하쎄멘 바이초크 알 로쇼 바이솨케후 바요메르 할로 키 메솨하카 아도나이 알 나할라토 레나기드

삼상 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 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왕을 요구하자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의 기스의 아들 사울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추며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에게 기름을 부으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입 맞추며’라는 단어는 (나샤크 5401 CW.VQIMZS.MZS 와우접속사.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남성 3인칭 단수) 입 맞추다, 복종하다, 갖추다, 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사명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입을 맞추어 복종의 삶을 살아가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사무엘이 사울에게 입을 맞추었다는 것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영적 지위를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즉시로 입을 맞추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입맞춤은 존경의 표시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입을 맞춤으로 너는 백성들에게 존경받을 자라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명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17절 아펠덴 데 아나니아스 카이 에이셀덴 에이스 텐 오이키안 카이 에피데이스 에프 아우톤 타스 케이라스 에이펜 사울 아델페 호 퀴리오스 아페스탈켄 메 이에수스 호 오프데이스 소이 엔 테 호도 헤 에르쿠 호포스 아나블렙세스 카이 플레스데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18절 카이 유데오스 아페페손 아포 톤 오프달몬 아우투 호세이 레피데스 아네블렙센 테 파라크레마 카이 아나스타스 에밥티스데

9:17-18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신약의 사울은 아나니아를 통하여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라는 단어는 (아나니아스 367)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라는 뜻입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직가라는 곳의 유다의 집에서 사울에게 안수를 하게 됩니다. 이 안수를 통하여 사울의 눈에 있던 비늘 같은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이름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신약의 사울에게 임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명을 받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늘 같은 것이’라는 단어는 (레피스 3013) 비늘, 이라는 뜻입니다. 껍질을 벗긴다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사울은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눈에 있는 비늘 같은 껍질이 벗겨진 것입니다. 율법의 눈으로 보았던 눈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눈으로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에 있을 때에는 자신의 뜻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뜻대로 인생을 사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 히브리어로는 רגע(레가 7281) 매우 짧은 시간, 순식간,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רגע(라가 7280) 휘젓다, 뒤흔들다, 평안함을 얻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신약의 사울은 율법주의자인데 하나님께서 불러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눈이 멀어있는 동안에 사울의 마음은 온통 파도가 요동을 치듯이 뒤숭숭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마음이 요동을 치니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생각이 온통 뒤죽박죽 흔들려 생각들이 수저로 휘저은 물처럼 된 것입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순식간에 생각들이 정리가 되고 매우 짧은 찰나의 순간에 영적 눈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구원의 은혜도 순간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며 영적인 깨달음도 순간의 찰나에 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순간에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 속에 있는 비늘 같은 것을 벗겨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순간에 깨달음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울은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지 않았지만 신약의 사울은 율법의 비늘이 벗겨졌습니다. 현재 나도 내 눈에 있는 율법의 비늘이 순간의 찰나를 통하여 벗겼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함부로 서원하는 사람입니다.

28절 바야안 이쉬 메하암 바요메르 하쉐베아 히쉐비아 아비카 에트 하암 레모르 아루르 하이쉬 아쎄르 요칼 레헴 하욤 바야아프 하암

삼상 14:28 그 때에 백성 중 한 사람이 말하여 이르되 당신의 부친이 백성에게 맹세하여 엄히 말씀하시기를 오늘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울 때에 음식을 먹지 못하여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들에 있는 꿀을 발견하고 먹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사울이 맹세했던 일 때문에 꿀을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임의대로 서원했기 때문입니다.

 

맹세하여’라는 단어는 (샤바 7650 VHAMZS 동사 히필(사역능동)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맹세하게 하다, 엄명하다, 서원하다, 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함부로 서원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에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백성들을 죽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자신 스스로의 서원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강제로 맹세시켜 엄히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이 음식을 먹지 말라고 맹세시킨 것은 하나님의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서원입니다. 그것도 자신 스스로 완전하다고 믿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히필형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권세를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과는 무관한 서원을 하고 사람들을 고통 가운데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서원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을 서원하여 저주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잘못된 서원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저주를 받고 고통 가운데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함부로 하나님께 서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서원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단어는 (아라르 779 VQPPMS 동사 칼(능동태) 분사수동 남성 단수) 저주하다, 저주받다, 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께 맹세하여 전쟁 중에 음식을 먹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전쟁 중에 배고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것 같아서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백성들의 목을 죄어 죽이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배고프고 전쟁 중에 고통이 있음에도 자신만 생각하여 백성들을 사지로 몰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든지 말든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만 잘되면 되고 자신의 의만 드러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선포가 남에게 저주가 임하든지 말든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이 바로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신약의 사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20절 카이 유데오스 엔 타이스 쉬나고가이스 에케륏센 톤 크리스톤 호티 후토스 에스틴 호 휘오스 투 데우

21절 엑시스탄토 데 판테스 호이 아쿠온테스 카이 엘레곤 우크 후토스 에스틴 호 포르데사스 엔 히에루살렘 투스 에피칼루메누스 토 오노마 투토 카이 호데 에이스 투토 엘렐뤼데이 히나 데데메누스 아우투스 아가게 에피 투스 아르키에레이스

9:20-21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신약의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고 혈기왕성하게 돌아다니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개하여 주님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각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사람에서 복음의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소의 사울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에 놀라고 있습니다. 사울은 전의 모습이 아닙니다. 전에는 생명을 죽이는 사역을 했다면 이제는 생명을 살리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전파하니’라는 단어는(케륏소 2784 VIIAS3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단수 3인칭) 전파하다, 가르치다, 설교하다, 외치다, 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주님을 만난 후에 사람이 달라져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각 회당에 가서 외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놀라고 있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을 핍박하여 감옥에 잡아넣었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면서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사람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신약의 사울도 율법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달라진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말씀을 전파했던 사실이 실제로 있습니다. 사울은 죽음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습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자신이 죽을 때까지 복음을 외친 것입니다. 직설법과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신약의 사울처럼 율법에 빠져있던 나였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어 복음을 외치는 자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생명의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끝까지 복음을 외쳐야 합니다. 사울은 다시는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사울은 질투의 화신이 되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8절 바이하르 레솨울 메오드 바예라 베에나이브 하다바르 하제 바요메르 노트누 레다비드 레바보트 베리 노트누 하알라핌 베오드 로 아크 하멜루카

삼상 18: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다윗이 블레셋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 많은 사람들이 사울을 환영하면서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를 하자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70인 역의 헬라어로 보면

 

불쾌하여’라는 단어는 οφθαλμος(오프달모스 3788 NDMP 명사 여격 남성 복수) , 안목, 영적 이해력,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οπτανω(옵타노 3700) 나타나다, 보다, 보이다, 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백성들이 다윗에게 자신보다 더 큰 공적을 돌리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질투심이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울이 영적 이해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자격지심에 눈이 멀어버린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영적인 것으로 백성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육적인 눈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다윗을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혹시 나도 모든 사건들을 율법의 눈으로 보면서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결국 신하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사울은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입니다.

 

노하여’라는 단어는 φαινω(파이노 5316 VIAPS3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 나타나다, 보이다, 명백하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백성들이 다윗에게 만만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다윗의 공적이 명백하게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이것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본 것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이 행동하는 것이 악하다고 생각하여 본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악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가 πονηρος(포네로스 4190) 악한, 사악한, 흉악한, 이라는 뜻의 단어를 앞에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인들이 다윗에게 만만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사울의 눈에는 악하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실제로 화가 나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으며 이것은 결국 율법에 눈이 멀어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율법에 눈이 먼 자들은 이와 같은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울의 눈에 보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율법으로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눈을 가렸기 때문에 자신보다 다른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면 시기와 질투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자의 신앙생활이 율법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신약의 사울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5절 페리토메 오크타에메로스 에크 게누스 이스라엘 퓔레스 베니아민 헤브라이오스 엑스 헤브라이온 카타 노몬 파리사이오스

6절 카타 젤론 디오콘 텐 에크클레시안 카타 디카이오쉬넨 텐 엔 노모 게노메노스 아멤프토스

7절 알르 하티나 엔 모이 케르데 타우타 헤게마이 디아 톤 크리스톤 제미안

8절 알라 메눈게 카이 헤구마이 판타 제미안 에이나이 디아 토 휘페레콘 테스 그노세오스 크리스투 이에수 투 퀴리우 무 디 혼 타 판타 에제미오덴 카이 헤구마이 스퀴발라 에이나이 히나 크리스톤 케르데소

3:5-8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신약의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사람으로서 할례를 받은 사람이며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공부한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입니다. 율법으로는 능통한 자가 되어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두 해로 여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울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예수그리스도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흠이 없는 자라’는 단어는 (아멤프토스 273) 책망할 것 없는, 흠 없는, 결백한, 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의 사울은 자신이 고백하기를 율법의 의로는 자신을 흠잡을 때 없는 자라고 고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가지고 말하지만 자신을 책망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율법을 잘 지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니라는 것을 사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율법의 의를 나타내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구약의 사울은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했지만 신약의 사울은 회개하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낮추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 해로 여길뿐더러’라는 단어는 (헤게오마이 2233 VIRNS1 동사 직설법 완료 중수디포 단수 1인칭) 생각하다, 확신하다, 숙고하다, 라는 뜻입니다. 신약의 사울은 자신의 세상적 유익을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기고 있습니다. 영적인 신앙을 위하여 세상의 권세는 모두가 방해만 될 뿐이라고 심사숙고하여 확신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사울과 다릅니다. 구약의 사울은 어떻게 하면 세상의 영광을 얻을까 생각했다면 신약의 사울은 어떻게 하면 세상의 유익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취할까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율법의 사람들은 세상의 유익과 육체의 탐심을 가진 신앙생활을 하지만 복음을 가진 자들은 영적인 유익을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약의 사울은 실제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상의 부와 영화를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버렸습니다. 실제로 버리고 나니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버렸다고 생각하다가도 때가 되면 아쉬움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모두 버리고 다시 세상의 욕심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완료 시제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세상적 유익을 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데 해로 여김으로 인하여 사울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영적인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육적으로는 고생도 했지만 마지막은 하나님께 큰 상급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저와 여러분들은 어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유익들을 해로 여기고 있습니까? 영적인 눈을 열기 위하여 세상의 욕심의 눈을 닫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복음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라는 단어는 (제미오오 2210 VIAPS1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단수 1인칭) 손실을 당하다, 손해보다, 해를 입다, 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예수님 때문에 많은 재산을 잃고 명예를 잃고 손해 보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지 않았다면 세상에서 부와 명예와 영광을 누리면서 살았던 인생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부름을 받고 주님의 사역의 길로 들어서면서 세상적인 것은 모두 손해를 보았습니다. 또한 육신도 해를 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많이 가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결국 신약의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것을 모두 잃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세상의 지위와 권세와 재산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 사실이며 이것은 결국 예수님을 만나 사라질 수밖에 없도록 계획되었던 일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직설법과 과거 시제를 통하여 우리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이와 같이 세상의 것은 사라지지만 영적인 것은 얻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세상의 것을 가지고 버틴다고 해도 이것은 나에게 남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세상으로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의 권세를 움켜잡아도 사라집니다. 물질을 붙잡아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붙잡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고’라는 단어는 (켈다이노 2770 VSAAS1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단수 1인칭) 이익을 얻다, 받게 하다, 이익을 보다, 라는 뜻입니다. 신약의 사울은 자신의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이익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선택하여 이방인의 그릇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사울 입장에서는 힘들고 고통스럽고 모든 것이 버려진 인생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큰 이익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큰 사역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현재 하나님께서는 나도 이와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큰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면 하나님께 큰 이익을 끼쳐드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면 내가 세상의 것을 버리고 포기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버리면 그리스도를 얻을 수가 없고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버리면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선택한 사람들은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붙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얻은 것입니다. 나는 현재 세상의 것을 얼마나 버렸습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직도 세상의 욕심을 위하여 주님을 믿고 있습니까? 세상의 권세와 명예와 물질을 위하여 힘을 다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께 아무런 유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손해만 끼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버리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소유가 되고 하나님께 큰 유익을 끼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큰 유익을 끼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사울과 신약의 사울을 통하여 율법적인 신앙과 복음적인 신앙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구약의 사울은 철저하게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신약의 사울은 철저하게 주님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구약의 사울은 하나님께 해만 끼치는 신앙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신 멋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런 율법의 사람은 하나님께 유익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의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약의 사울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율법적인 삶에서 복음적인 삶으로 바뀐 사람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 큰 유익과 이익을 남기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손해를 끼쳤던 사람이 큰 소득을 남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사울처럼 율법에 빠져 나를 높이는 신앙을 하여 하나님께 손해만 끼치고 문젯거리가 되었다면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지금 듣고 회개하고 복음의 사람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큰 유익을 남기는 자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적인 삶을 살 때는 사용하실 수가 없습니다. 결국 자신을 높이는 신앙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사용하더라도 결국 마지막은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적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신약의 사울처럼 마음껏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누구처럼 쓰임 받고 싶습니까? 저는 신약의 사울처럼 쓰임 받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구약의 사울처럼 율법적인 삶을 살아가실 것입니까? 결국 하나님께 손해만 끼치는 인생으로 마감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결단을 내리십시오. 신약의 사울처럼 세상의 유익들을 똥처럼 여기고 오직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시고 이익을 얻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고 난 후에 하나님께 쓰임 받아 장사를 열심히 하여 하나님께 100배의 이익을 남겨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민수기 히브리어 설교말씀] 아론의 대제사장 축복 선언(민 6:22-27)

 

[민수기 히브리어 설교말씀] 아론의 대제사장 축복 선언(민 6:22-27)

안녕하세요. 오늘은 민수기 히브리어 설교말씀 중에서 아론의 대제사장 축복 선언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인 아론을 통해서 축복을 선언하게 하셨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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