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팔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우리는 팔복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안에서 복 받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산상수훈 중에서 팔복 강해(마 5:1-12)
1절 이돈 데 투스 오클루스 아네베 에이스 토 오로스 카이 카디산토스 아우투 프로셀돈 아우토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성 경: [마5: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무리를 보시고 - '무리들'은 4:23-25에 언급된 '허다한 무리'를 가리킨다. 예수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이키신다. 이때의 예수의 사역은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지만 사역의 내용은 단편적인 교훈을 포함한 병 고침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 복음'(4:23)의 세밀한 내용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이다.
산에 올라가 - 마 5-7장을 '산상 수훈'이라고 일컫게 한 구절이다. 누가복음에는 이 장소가 평지(눅 6:17)로 되어 있어 '평지 수훈'이라 불리는 바 이러한 차이에 의하여 두 설교를 완전히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눅 6:17 주석, 강해 참조). '산'(토 오로스)과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단순히 '산악지역', '산이 많은 지방'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평지'가 산아래 평원(平原)이 아니라 산에 있는 평평한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전승은 가버나움과 디베랴 사이의 한 언덕을 산상 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의 산으로 전하고 있으며 갈릴리에 내려오는 한 전설은 그 산 이름을 핫틴산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한편 고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일부러 산에 올라가셨으며 그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모세와 새로운 계명을 가르치는 자신과의 유사함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산을 흔히 '신약의 시내산'이라 일컫기도 한다(Carr and Delitsch). 실로 예수의 메시지는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이었고 예수께서는 모세보다 위대하신 새로운 모세의 실체이셨던 것이다.
앉으시니 - 유대의 랍비들이나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교수 태도이다(13:2;23:2;24:3; 눅 4:20). 예수께서는 전도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친근하면서도 위엄 있는 한 스승의 모습을 보인다.
제자들이 - (호이 마데타이). 선택된 12제자들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동안 예수를 추종하며 교제하던 무리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Alford). 마태는 의도적으로 10:1 이전까지는 12제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이 말은 완전히 성장한 신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도 이 말이 사용되기 때문이다(11:2).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도 '제자의 허다한 무리'라는 표현과 동시에 '많은 백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눅 6:17). 이는 4:25 내용과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특별히 당신을 진실히 따르기로 소원하는 무리들을 따로 불러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나아온지라 -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시내산에서와 같이'(출 19:12) 백성들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일은 이 산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와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6)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계명을 듣고 지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2절 카이 오노익사스 토 스토마 아우투 에디다스켄 아우투스 레곤
성 경: [마5: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입을 열어 - 그리스도의 말씀의 엄숙한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13:35; 행 8:35;10:34)으로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였다(욥 3:1;33:2; 단 10:16). 이 표현은 주로 격식이 갖춰진 상황이나 계시 전달의 장면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입이 열렸으니 '떡으로만 살던'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4:4).
가르쳐 - (에디다스켄). 이것은 미완료 과거형이며 동작의 시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예수의 사역에는 가르침과 전파함과 치료함이 포함되어 있었다(4:23). 본문의 예수께서 행하신 '가르침'(디다스코)의 최종 메시지는 천국'복음'(유앙겔리온; 4:23)이었으며, 이 '천국 복음'이야말로 산상 수훈의 중심 주제인 것이다.
3절 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호티 아우톤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성 경: [마5: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이 구절은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헬라어 '프토코스'(가난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중 가장 중요한 '아나임'(가난한 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시 37:14;40:17;69:29; 잠 16:19). 이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들과 연관되어 있다(사 57:15;66:2). 더욱이 사 61:1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눅 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파탄(破綻)을 솔직이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시 69:29;70:5;74:21; 사 61:1; 습 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 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시 37:14;86:14), 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이다(시 34:6, 18;51:17; 사 66:2). 복이 있나니(마카리오스) - 이 단어는 70인 역(LXX)에서 히브리어 '아쉬레'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으나 여기서는 주. 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축복받는 상태를 묘사한다. 이 단어의 배후에는 모든 불행한 환경(예를 들면 '가난', '애통', '주리고 목마름', '핍박 받음'등)의 원천(origin)인 죄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불행을 완전하고도 효과적으로 치유(治癒)할 수 있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는 메시아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나타낸다. 이는 메시아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 준다. 천국은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입어 메시아의 통치를 향유하고 그가 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이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다(Alford).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 하심에서 비롯한 선물(present)이다. 한편 첫 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 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첫 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되어 있어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다(4:17;8:29;12:28).
4절 마카리오이 호이 펜둔테스 호티 아우토이 파라클레데손타이
성 경: [마5: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애통하는 자(호이 펜둔테스) -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사 61:1의 반영이다. 70인 역(LXX)에서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Mc Neile).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다.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들의 개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 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신다(4:17).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온다. 여기서 '위로'(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주(內住) 하시고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아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 14:16)가 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 7:17;21:4)가 될 것이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이다.
5절 마카리오이 호이 프라에이스 호티 아우토이 클레로노메수신 텐 겐
성 경: [마5: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온유한 자(호이 프라 에이스) - '온유한'이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 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온유'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11:29; 약 3:13).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 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 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한편, 본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Wellhausen)하거나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아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인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땅'(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 지역(4:15;9:26, 31;11:24;27:45), 하늘과 땅 (천지) (5:18, 35),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6:10;9:6), 지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 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본문의 땅은 시 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여기에서 땅을 은유적으로만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아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계 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시 37:1, 11, 22, 34).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17).
6절 마카리오이 호이 페이논테스 카이 딥손테스 텐 디카이오쉬넨 호티 아우토이 코르타스데손타이
성 경: [마5: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심령이 가난함'(3절), '온유함'(5절) 그리고 '애통함'(4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신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시 42:2;63:1;107:9; 암 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 3:3,5) 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Alford).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의'(稱義)라고 주장한다(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반대한다(Przybylski, pp.96-98).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로움(Hill, Greek Words pp.127 ff;S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Ridderbos, pp. 190 ff).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이다(벧후 3:13)
배부를 것임이요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는 푸른 잔디(막 6:39)를 뜻하는 '코르토스 클로로스'와 마찬가지로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미이다(요 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平安)함이 있으며, 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7절 마카리오이 호이 엘레에모네스 호티 아우토이 엘레에데손타이
성 경: [마5: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엘레에모네스'는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특히 70인 역에서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와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의 변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감정이나 성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그리고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 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긍휼히 여길 대상은 바로 이 죄악 된 세상이며, 성도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즉 성도에게만이 이 세상의 회복자로서의 자질이 주어져 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죄악 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든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이다(클레멘트 1서 13:2).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causal ground)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occasional ground) 계기가 된다는 의미이다(6:14, 15). 실로 긍휼은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 세상의 죄악 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또한 본절은 긍휼 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 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진다(약 2:13).
8절 마카리오이 호이 카다로이 테 카르디아 호티 아우토이 톤 데온 옵손타이
성 경: [마5: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마음이 청결한 자 -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란 그리이스인들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이 용어는 70인 역(LXX)에서 히브리어 '레브'나 '레바브'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1) 문자적으로 '가슴', (2)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삼상 12:12)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 정. 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7:21; 눅 21:14; 요 16:6 등). 또한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써 도덕적, 종교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 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 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의 교제를 돈독(敦篤) 히 하는 자를 의미한다(히 10:22-25 참조).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볼 것임이요'의 헬라어 '옵손타이'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의 미래형이다. 특히 '호라오'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인 '블레포'와 '눈여겨보다'라는 뜻인 '데아오마이'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라는 뜻이다. 한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 19:21;33:20; 삿 6:22 등). 이는 죄악 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이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 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9절 마카리오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호티 아우토이 휘오이 데우 클레데손타이
성 경: [마5:9]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화평케 하는 자 -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에이레니코스)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한다. '화평'(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과 견줄 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 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한다(사 54:10;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 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실로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다(사 9:6, 7; 눅 2:14; 요 14:27). 화평케 하는 것은 단순히 분쟁 등을 완화(緩和)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 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엡 2:15-17; 골 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신 14:1; 호 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inheritor)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Broadus).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Morison).
10절 마카리오이 호이 데디오그메노이 헤네켄 디카이오쉬네스 호티 아우톤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성 경: [마5:1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 본절의 설명 구에 해당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 없이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 당하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 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이다(요 15:18-25; 행 14:22; 벧전 4:13, 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딤후 3:12).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복과 같은 것이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 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이다. 즉 왕이신 메시아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들의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11절 마카리오이 에스테 호탄 오네이디소신 휘마스 카이 디옥소신 카이 에이포신 판 포네론 카드 휘몬 프슈도메노이 헤네켄 에무
성 경: [마5:1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나를 인하여...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이 구절에서는 10절의 핍박을 모욕과 박해와 비방(slander)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키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증오도 포함하고 있다(눅 6:22, 23).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라는 것이 핍박의 이유였으나 여기에서 예수는 '나를 인하여'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삶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동시에 제자들과 예수의 행하신 의를 동일시함으로써, 의로 가득 차지 않고는 예수께 충성을 고백할 수없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기독론적인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과 비교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충성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지자에 비견(比肩)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12절 카이레테 카이 아갈리아스데 호티 호 미스도스 휘몬 폴루스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후토스 가르 에디옥산 투스 프로페타스 투스 프로 휘몬
성 경: [마5:1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상이 큼이라 - 여기서 먼저 '기뻐하다'(카이로)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좋은 감정, 벅찬 기쁨의 상태를 의미하며, '즐거워하다'(아갈리아오)란 외부로 넘치는 기쁨, 억제할 수 없는 역동적인 환희 등의 뜻으로서 '카이로'보다는 좀 더 점층 된 기쁨의 상태를 암시한다(눅 1:47;10:21; 요 5:35).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핍박 중에 있더라도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그들의 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의 받을 '상'(미스도스)이란 무엇일까? 혹자는 이에 대해 '합당한 보상이란 단순히 그것을 목표로 하는 행동에 항상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국에는 그 행동 자체가 합당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Lewis)고 한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역설하는 보상의 개념은 대부분 이런 범주(範疇)에 속한다. 진정 우리가 천국의 규범 아래서 살게 되면 자연히 천국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에서 넘쳐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박해와 반대를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제자들은 전에 박해받았던 예언자들과 같은 계열에 서 있는 것이다(대하 24:21; 느 9:26; 렘 20:2; 행 7:52; 살전 2:15).
선지자들을...핍박하였느니라 - 구약성경은 엘리야,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느헤미야 등 위대한 선지자들을 말한다. 한 예로 예레미야는 채찍을 맞기도 했으며(렘 20:2),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돌에 맞았고(대하 24:21), 유대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가 므낫세 치하 중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Alford).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사도들에 대한 핍박을 위시하여 핍박의 역사는 중단된 적이 없다. 이 구절들은 박해받기를 자칭하라고 권장하는 것이 아니며 박해에서 도피하거나 그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거나 보복하려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구속사('예언자들')와 영원('하늘에서의 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구절들은 합당한 신앙의 응답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행 5:41; 고후 4:17; 벧전 1:6-). 실로 제자직이란 고난 받은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으로 부름 받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고난은 기쁨이며 은총의 표시이다(Bonhoeffer).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새로운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불합리한 것도 아니'(Bonnard)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면서 특히 10장과 24장에서 다시 언급할 박해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Carson).
[사사기 히브리어 설교말씀] 삼손의 외침 엔학고레의 샘(삿 15: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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