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3장 히브리어 설교 중에서 아담이 입었던 무화과 옷과 가죽옷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전에는 수치를 느끼지 못했지만 눈이 밝아진 후에는 수치를 느끼고 자신이 직접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이것은 구속사 관점에서 율법의 옷을 상징합니다. 이것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죄인은 의의 옷을 입어야 하는데 자신 스스로 만들어 죄를 덮으려고 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의의 옷을 직접 만들어 아담에게 입혀주었습니다. 이것이 가죽옷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없이는 인간이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내가 직접 만들어 입은 율법의 옷을 입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가죽옷을 입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인 가죽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담이 입었던 무화과 옷과 가죽옷”(창 3:7; 창 3:21)
사람에게는 옷이 중요합니다. 옛날에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었다면 지금은 옷을 통해서 그 사람의 성격과 지위까지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공직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의 옷을 보면 무슨 일을 하는지 대략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제복이라는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이렇게 옷이라는 존재는 떨어지려고 해도 떨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 옷의 원조가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고 있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인류의 옷의 시작은 죄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 나서 자신의 몸을 가리기에 바빴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육신의 몸을 가리기 위하여 옷을 만들어 입는 것처럼 영혼의 몸을 위하여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때에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고 했습니다. 영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몸을 가지고 부활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부활된 몸도 옷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옷이 십자가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옷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육적인 몸을 가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아담이 직접 만들어 입은 옷과 하나님께서 지어 입혀주신 옷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자가 아니라 옷을 입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럼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7절은 바티파카흐나 에네 쉐네헴 바예데우 키 에루밈 헴 바이트페루 알레 테에나 바야아슈 라헴 하고로트입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동산으로 이끌어주시고 부탁을 한 가지 하셨습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는 따 먹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절대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만약에 이것을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하신 것은 선과 악을 분별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직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먹으면 자신의 생각대로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뱀의 계략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먹기 전에는 자신들이 벗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부끄럽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의 열매를 먹고 난 후에는 자신들이 부끄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몸이 벗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의 옷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인간이 옷을 해 입은 이유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죄지은 죄를 속죄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수치를 당하시고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인간은 죄를 감추기 위하여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옷을 모두 빼앗기고 하나도 걸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나의 벌거벗음의 수치와 죄를 모두 담당하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인간은 이때부터 모두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옷을 입는 것도 자신의 단점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적으로 죄를 감추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열심히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 있습니다.
‘눈이 밝아져’라는 단어는 (파카흐 6491 와우접속사, 동사, 닢알, 미완료, 여성, 3인칭, 복수) 눈이 열려지다, 밝히다, 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죄에 관하여 눈이 열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과 정욕에 눈이 열려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벗은 줄을 깨닫고 감추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이들은 선악과를 따 먹음과 동시에 즉시 눈이 열려졌고 이 눈은 다시 닫혀지지 않았습니다. 와우접속사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와우접속사 문법은 시제를 바꾸어 해석하는 문법입니다. 시제가 미완료이니 완료로 해석하면 계속해서 죄의 상태로 눈이 열려진 것을 말합니다. 아담의 눈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육적인 눈이 열리면서 영적으로는 맹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눈은 영적으로 눈이 밝아지려고 해도 더 이상 밝아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닢알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눈이 열려졌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죄악의 눈이 열려졌기 때문에 영적인 눈은 닫혀버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대한 눈은 멀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과 다른 현상입니다.
18절은 카이 유데오스 아페페손 아포 톤 오프달몬 아우투 호세이 레피데스 아네블렢센 테 파라크레마 카이 아나스타스 에바프티스데입니다.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육신의 눈이 멀었습니다.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가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습니다. 사울은 육신의 눈이 멀고 예수님 때문에 영의 눈이 열렸습니다. 이때부터 사울은 영의 눈으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영의 눈으로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살다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육신의 눈이 열려 결국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눈이 다시 보게 되었는데 헬라어 아나블레포 308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쳐다보다 look up, 보다 look at, 다시보다 see again.라는 뜻입니다. 문법은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단수 3인칭입니다. 직설법 문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울의 눈이 멀어 있다가 실제로 눈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과거 시제는 사울의 눈이 지금 열리는 것은 현재인데 과거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그릇으로 선택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아니고는 절대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울에게 직접 개입하셔서 율법주의 신앙에서 복음으로 돌아서게 했습니다.
우리들도 원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아담처럼 육신의 눈이 열려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다 보니 육신의 것을 감추기 위하여 화려한 옷을 입었습니다. 자신의 외모에만 치중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결국 이런 자들은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벗은 줄을’이라는 단어는 (에롬 5903) 벌거숭이, 벌거벗긴, 이라는 뜻이며 어근은 ערם(아람 6191) 간계를 꾀하다, 발가벗게 하다, 교묘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을 때에는 절대 벌거벗은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뱀의 간계한 꼬임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나서 발가벗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수치가 인간에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교묘하게 우리의 옷을 벗겨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발가벗겨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수치스러워 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의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입니다.
‘치마’라는 단어는 (하고르 2290) 띠, 허리띠, 허리덮개, 라는 뜻이며 어근은 חגר(하가르 2296) 허리띠를 졸라매다, 묶다, 감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 스스로 무화과나무의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과 같아질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 스스로 하나님과 연합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연합되어 있을 때가 행복했다는 것을 죄를 짓고 나서 알아버렸습니다. 때늦은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의 허리띠를 띠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의 허리띠를 띠어야 하는데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하여 율법의 행위의 띠를 띠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들도 아담과 하와처럼 율법의 행위의 띠를 띠고서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이 옷으로는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저주를 받게 됩니다. 아담으로 인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아담이 자신의 행위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원죄 가운데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구원하기 위하여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십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죽옷을 입지 않고 있다면 죽은 것입니다. 행위의 옷을 자랑하려고 하는 자들은 아간과 같은 자들입니다. 여리고 성주가 입고 있던 시날 산의 외투를 욕심냈습니다. 자신이 이 옷을 쟁취함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아간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21절은 바야아스 아도나이 엘로힘 레아담 우레이쉐토 코트노트 오르 바얄레비솀입니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죽을 것을 아시고 살릴 것도 준비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죽을 것도 이미 하나님은 아셨고 또한 살릴 것도 준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가죽옷’이라는 단어는 (케토네트 3801) 무릎까지 내려오는 옷, 속옷 같은 긴 옷을 의미합니다. 어근은 כתן(카탄) 덮다, 숨기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만들어 준 옷은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상징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의로 아담과 하와의 죄를 덮어주고 숨겨주는 것을 말씀합니다. 자신들 스스로는 절대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옷은 요셉이 입었던 옷이며 대제사장이 입었던 옷입니다.
3절은 베이스라엘 아하브 에트 요세프 미콜 바나이브 키 벤 제쿠님 후 로 베아사 로 케토네트 파심입니다.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야곱이 요셉을 다른 아들들보다 사랑하여 채색 옷을 만들어 입혀주었습니다. 우리는 채색옷을 생각하기에 색깔이 들어간 옷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문에서 채색옷은 그런 색깔 있는 옷이 아닙니다. 옷 소매가 긴 옷입니다. 보통 긴 옷은 왕이 입었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요셉을 특별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이 있었던 옷이 가죽 옷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 특별한 자녀로 선택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애굽에 팔려가 주님의 길을 평탄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39절은 베쉬바체타 하케토네트 셰쉬 베아시타 미체네페트 셰쉬 베아브네트 타아세 마아세 로켐입니다.
출 28:39 너는 가는 베 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 가는 베 실로 관을 만들고 띠를 수 놓아 만들지니라
대제사장을 위하여 반포 속옷을 만들라고 했는데 이것이 가죽 옷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죄를 지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만들어 입혀주심으로 대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이 옷은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 입혀주신 옷입니다. 모든 죄악을 덮어주시는 옷을 최초로 만들어 주신 것이 가죽옷입니다. 우리도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 옷을 입을 자격이 생겼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모두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14절은 알르 엔뒤사스데 톤 퀴리온 이에순 크리스톤 카이 테스 사르코스 프로노이안 메 포이에이스데 에이스 에피뒤미아스입니다.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만들어 주신 옷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이 옷을 우리가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엔뒤오 1746 동사입니다. 동사 엔뒤오는 '옷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옷을 입히다. 옷을 입다'를 의미한다. 문법은 동사 명령법 과거 중간태 복수 2인칭입니다.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반드시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과거 시제는 아무나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만이 옷을 입게 된다는 말입니다. 중간태는 이 옷을 입은 자는 원죄의 죄가 가려져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 우리는 어떠한 옷을 입고 있습니까?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를 입고 있다면 자 범죄만 회개하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온전하게 살면 자 범죄의 수치는 가려집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기 때문에 무화과나무 잎의 치마로 자신의 수치를 가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자 범죄를 해결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원죄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아담이 입었던 가죽옷을 입어야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온전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이 옷은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옷이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이신 사건이 바로 가죽옷입니다. 이 가죽옷을 입는 것은 100% 주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나의 수치가 예수님께 전가되고 예수님의 의가 나에게 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가죽옷을 만들어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죽옷입니다.
8절은 카이 프로스퀴네수신 아우토 판테스 호이 카토이쿤테스 에피 테스 게스 혼 우 게그랖타이 타 오노마타 엔 테 비블로 테스 조에스 투 아르니우 에스파그메누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입니다.
계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이 가죽옷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의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은 창세전에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율법의 의의 옷을 입고 있는 자들은 짐승에게 경배하게 됩니다. 이들은 자 범죄만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지옥의 불 못으로 떨어지는 것은 원죄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자 범죄는 얼마든지 짓게 됩니다. 하지만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지지 않는 것은 바로 십자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보고 의롭다 말씀하시는 것이지 나의 행위를 보고 의롭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헬라어 그라포 1125 동사입니다. 기록하다, 쓰다는 뜻입니다. 문법은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단수 3인칭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책입니다.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완료로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죽어보아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시제가 미래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완료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구원받은 자들은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끝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동태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지 인간의 어떤 의도 필요가 없음을 말합니다. 내가 생명 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꼭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생명 책에 구원받은 백성들은 이미 완료로 기록이 끝났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내 이름이 생명 책에 지금 완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이미 나는 자 범죄를 짓는 죄인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이 죄인이 구원을 얻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공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예복을 임금이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이 옷을 입지 않고 혼인잔치 집에 들어가면 쫓겨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만세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더 이상 구원이 취소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옷을 절대 벗기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 입혀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의의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옷은 왕의 옷이며 신부의 거룩한 옷입니다. 나의 행위로 입은 옷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면서 찬양하게 됩니다. 신부의 의로 이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영원히 주님의 의의 가죽옷을 입었으니 영원한 천국이 저와 여러분들의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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