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서 1장에서는 여호와의 경외와 부모의 훈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말씀하는 훈계를 들어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라(잠 1:7-9)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영생을 주는 책이기 때문에 영혼을 살리는 책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지식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면 초점을 잘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주님 안에서 영혼의 지식을 키워나가는 책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주님과 더 친숙해 주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잠언 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이 충만해져 가고 구원의 확신이 생겨야 합니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히브리어 음가 : 이르아트 아도나이 레쉬트 다아트 호크마 우무사르 에빌림 바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미련한 자는 율법의 의를 고집하여 영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의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게 됩니다.
‘경외하는 것이’ (이르아 3374) 경외함, 무서움, 두려움, 이라는 뜻이며 (야레 3373) 두려워하다, 경외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야차르’의 몸으로 무서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라’의 속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면 주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존경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서면 그분의 능력과 존엄함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본이거늘’ (레쉬트 7225) 처음, 첫째, 시작, 이라는 뜻이며 (로쉬 7218) 우두머리, 근원, 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지식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가 첫째가 되고 태초에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의 삶에 우두머리가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성경에 제일 먼저 나오는 ‘태초에’ 라는 단어가 (레쉬트)입니다. 지식의 근본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화론을 믿고 있으면 주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시작하실 때에 창조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도 함께 하셨습니다. 내가 창조를 믿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입니다.
‘멸시하느니라’ (부즈 936 VQACZP 동사, 칼, 완료, 공성, 3인칭, 복수) 멸시하다, 모욕하다, 경멸하다, 라는 뜻입니다. 미련한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자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는 주님의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고 경멸하여 욕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 주님을 모욕하여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무시합니다. 그 이유는 칼형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완료 시제를 사용하여 이들은 주님의 지혜와 훈계를 듣지 않고 귀를 닫아버려 믿음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70인 역은 (엑수데노오 1847 VIFAP3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복수, 3인칭) 멸시하다, 거부하다, 무시하다, 업신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무시하면서 주님이 이루신 속죄의 사역을 업신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면 멸시하고 거부해 버립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반드시 미래에도 자신들 스스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미래 시제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막 9:12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변화 산에서 부활의 모습으로 변화된 후에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질문했을 때에 한 말씀입니다. 엘리야가 먼저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회복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인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기록되기는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멸시를 당하리라’ 라는 단어가 (엑수데노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예언되기를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한다고 했는데 율법주의자들은 이것을 믿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거부하여 자신의 행위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천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으로 미련한 자가 되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무시하고 주님의 지혜의 말씀과 훈계를 거부하게 됩니다.
잠 1: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히브리어 음가 : 쉐마 베니 무사르 아비카 비알 티토쉬 토라트 임메카
구원받은 백성들은 아비의 훈계를 듣고 어미의 법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영적인 부모의 말씀을 잘 들으라는 의미입니다.
‘훈계를’ (무사르 4148) 훈계, 징계, 교훈, 이라는 뜻이며 (야사르 3256) 훈련하다, 징계하다, 가르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의 아버지는 잘못하면 밖에 나가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호되게 교육시켰습니다.
히 12:8-9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구원받은 백성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징계를 내려 훈련을 시킵니다. 만약에 징계가 없다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닙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나를 징계해도 공경하는데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께 더욱 복종하면서 살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징계는’ 이라는 단어가 (무사르)입니다. 우리는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의 말씀에 교육받고 성화의 삶을 살면서 이 세상에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성화의 삶을 제대로 살지 않는데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징계를 내리지 않는다면 나는 사생자입니다.
‘떠나지’ (나타쉬 5203 VQIMYS 동사, 칼, 미완료, 남성, 2인칭, 단수) ~한 상태로 놓아두다, 버리다, 허락하다, 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어머니도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 잘못된 삶을 살지 못하도록 붙잡습니다. 세상의 죄악 된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악인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하물며 성령 하나님은 어떨까요? 구원받은 자가 자 범죄를 지으면서 살면 속에서 탄식하게 됩니다. 육신의 어머니는 율법의 계명을 통해서 올바르게 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떠나지 않도록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행동을 올바르게 살아서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구원받은 우리들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성령 하나님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탄식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 범죄를 짓지 않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성령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탄식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원죄에서 해방되어 구원받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자 범죄를 회개함으로 성령 하나님을 근심하게 만들면 안 됩니다.
잠 1:9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히브리어 음가 : 키 리비야트 헨 헴 리로셰카 바아나킴 리가리기로테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버지의 훈계와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않는 자들은 머리에 아름다운 관을 씌움 받고 목에 금 사슬을 걸게 됩니다.
‘관이요’ (리베야 3880) 화환, 화관, 이라는 뜻이며 (라바 3867) 결합하다, 연합하다, 함께 있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머리에 화관을 쓴 사람입니다. 이런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화관은 아무나 쓰지 못합니다. 주님과 연합되어 있는 자가 쓸 수 있습니다. 내가 쓰고 싶다고 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씌워주셔야 쓸 수 있습니다. 70인 역은 (스테파노스 4735) 왕관, 화관, 이라는 뜻입니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이 땅에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환난을 당하고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여기에서 ‘면류관을’ 이라는 단어가 (스테파노스)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까지 주님과 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생명의 면류관을 나에게 허락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머리에 아름다운 관을 쓴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라는 것을 표시합니다. 우리의 머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여호와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목의’ (가르게로트 1621) 목, 이라는 뜻이며 (가라르 1641) 잡다, 잡아채다, 되새김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따르고 하나님의 훈계와 성령 하나님의 탄식의 소리를 듣는 자들은 목의 금 사슬과 같다고 했습니다. 목에 금 사슬을 걸쳐다는 것은 영광을 의미합니다.
창 41:42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애굽의 바로 왕은 요셉에게 자신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워주고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바로 왕의 권위를 요셉에게 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구원받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소가 되새김질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되새김질하면 금 사슬과 같은 영광을 나의 목에 걸어주십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구원받았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원죄에서 회복되었으니 자 범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매일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에 금 사슬을 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을 아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십자가를 멸시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유대인과 로마인들에게 멸시를 받으셨고 모욕을 당했습니다. 나의 원죄 때문에 고통당하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내가 멸시하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육적인 부모의 말씀도 듣는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면 안 됩니다.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서 탄식하는 소리도 거역해서도 안 됩니다. 성령 하나님은 지금도 내가 잘못된 삶을 살면 내 속에서 탄식합니다. 지식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 성경인물 히브리어 설교말씀] 이세벨의 딸 아달랴(왕하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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