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에스더 히브리어 주일설교 중에서 율법 와스디와 복음 에스더의 신앙 비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구속사 관점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한 와스디는 율법의 신부의 모형이고 에스더는 복음의 신부의 모형입니다. 와스디는 자신이 잘난 척하다가 왕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결국 폐위가 되었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잘난 체하다가 구원받지 못합니다. 와스디가 폐위되는 것처럼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다릅니다. 왕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유다 백성도 지켜냈습니다. 하만의 음모를 지혜롭게 대처하여 하만이 결국 멸망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율법주의 신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복음주의 신앙을 하여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간 와스디의 신앙과 에스더의 신앙을 비교해 봄으로써 나는 지금 어떤 신앙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 와스디와 복음 에스더의 신앙 비교(에 1:11-12, 2:8-9)
우리가 에스더서를 읽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스더서를 정경에 넣을 수 없다고 주장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더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구속의 이야기가 녹아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섭리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페르시아에 있는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을 하만의 계략에서 구원해 주시는 이야기가 에스더서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남은 자를 남겨두시고 구원하십니다.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서 남은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인생을 살 때 하만과 같은 사탄의 계략에 빠져 억울하게 죽을 수 있는 상황에 놓였을 때 하나님은 사탄의 계략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현재 페르시아는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하고 있습니다. 이 왕은 주전 485년부터 464년까지 통치했습니다. 이 사람은 다리오와 고레스의 딸 아토사의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사람은 크세르크세스라는 인물입니다. 아하수에로라는 인물과 동일 인물입니다. 아하수에로 왕 때 영토가 인도로부터 구스까지 127 지방을 다스리던 왕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하던 시대는 평안했으며 이것을 알리기 위해 180일 동안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영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방의 왕이지만 아하수에로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의미합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하고 있을 때는 영토가 가장 넓었고 튼튼하며 평안한 시절을 보냈던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나라는 평안함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안락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나라가 언제입니까? 천년왕국입니다. 마지막 새 예루살렘은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5절 우비멜로트 하야밈 하엘레 아사 하멜렉크 레콜 하암 하니므체임 베슈샨 하비라 레미가돌 베아드 카탄 미쉐테 쉬브아트 야밈 바하차르 기나트 비탄 하멜렉크
에 1:5 이 날이 지나매 왕이 또 도성 수산에 있는 귀천 간의 백성을 위하여 왕궁 후원 뜰에서 칠일 동안 잔치를 베풀새
아하수에로 왕은 나라의 신료(臣僚)들을 모아놓고 180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나라의 위엄을 알리고 영화로운 나라라는 것을 많은 백성들에게 알렸던 잔치입니다. 이 잔치가 끝나고 왕은 도성 수산에 남녀노소 천민을 위하여 왕궁 후원 뜰에서 칠일 동안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따지지 않고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아니라 선택된 백성들만을 위해서 7일 동안 베풀었음을 말합니다.
‘수산에 있는’에서 ‘있는’이라는 단어가 (마차 4672 D.VNPPMP 정관사. 동사, 닢알(수동태), 분사수동, 남성, 복수) 찾아내다, 베풀다, 들어가다, 함께 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당시 수산은 페르시아의 수도입니다. 전체 나라의 백성들이 잔치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수산에 살고 있는 천민들이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지정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산 성에 거주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닢알, 수동태, 분사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수산 성에 살 수밖에 없는 환경과 여건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이 왕의 명령에 따라 베풀어진 잔치에 들어와 왕과 함께 즐기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마지막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잔치에 임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임하여 구원의 은혜를 받고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고백한 자들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동태를 통해서 보았듯이 만세전에 선택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모든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것이라면 7일 잔치에 들어온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와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수산 성에 있는 백성들만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6절 후르 카르파스 우테켈레트 아후즈 베하벨레 부츠 베아르가만 알 겔릴레 케세프 베암무데 셰쉬 미토트 자하브 바케세프 알 리츠파트 바하트 바셰쉬 베다르 베소하레트
에 1:6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대리석 기둥 은 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고
왕이 잔치를 배설(排設)해 놓고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대리석 기둥의 은 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게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마지막에 다가올 새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새 예루살렘의 잔치에 초청을 받아 들어가서 마음껏 왕과 하나가 되는 연회를 즐기고 있습니다.
19절 카이 호이 데멜리오이 투 테이쿠스 테스 폴레오스 판티 리도 티미오 케코스메메노이 호 데멜리오스 호 프로토스 이아스피스 호 듀테로스 사프페이로스 호 트리토스 칼케돈 호 테타르토스 스마라그도스
20절 호 펨프토스 사르도뉙스 호 헤크토스 사르디오스 호 헤브도모스 크뤼솔리도스 호 오그도오스 베륄로스 호 에나토스 포파지온 호 데카토스 크뤼소프라소스 호 헨데카토스 휘아킨도스 호 도데카토스 아메뒤스토스
계 21:19-20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 번째는 청옥이요 열두 번째는 자수정이라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시는데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며졌습니다. 각양 보석은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담황옥, 비치옥, 청옥, 자수정으로 새 예루살렘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아하수에로 왕이 차려놓은 잔치에 들어가듯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잔치를 만끽하게 됩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7일을 했지만 주님은 영원히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7절 베하쉐코트 비켈레 자하브 베켈림 미켈림 쇼님 베예인 말쿠트 라브 케야드 하멜렉크
에 1:7 금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아하수에로 왕은 금잔으로 마시게 하고 있습니다. 잔의 모양은 각기 다르나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새 예루살렘에는 구원받은 자가 받을 상급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주는 왕이 내리는 포도주를 말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41절 알레 독사 헬리우 카이 알레 독사 셀레네스 카이 알레 독사 아스테론 아스테르 가르 아스테로스 디아페레이 엔 독세
고전 15: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부활된 몸으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릅니다. 또한 별과 별의 영광도 다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잔의 모양이 다르다고 말씀하는 것처럼 마지막 때에 받을 영광도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름다운 잔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투박하고 천박한 잔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금잔이라도 똑같은 잔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끊임없이 마실 때 화려하고 좋은 잔을 가지고 마셔야 합니다. 많은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잔으로 주님 앞에서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이 세상에 살 때 주님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많은 상급을 하늘나라에 쌓는 신앙생활을 해야 만이 새 예루살렘의 주님 앞에서 큰 영광의 잔을 가지고 복음의 포도주를 끊임없이 마시게 됩니다.
이제부터 와스디와 에스더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와스디는 현재 왕후입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이방민족에 불과한 여인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잔치가 기뻐서 왕후인 와스디를 초청하여 많은 고관대작들과 백성들에게 보이기를 원했습니다.
11절 레하비 에트 바쉐티 하말카 리프네 하멜렉크 베케테르 말쿠트 레하르오트 하암밈 베하사림 에트 야페야흐 키 토바트 마르에 히
에 1:11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 와스디를 불러서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오게 하려고 했습니다. 왕후의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지방관들에게 보여서 왕의 위신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았기 때문입니다.
‘와스디’라는 단어는 (바쉐티 2060) 와스디이며,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와스디는 페르시아의 왕후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볼 때 너무나 아름답고 용모가 뛰어납니다. 그래서 왕은 잔치를 베풀고 많은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자신의 부인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신부가 이렇게 예쁘고 용모가 뛰어나니 와서 많은 사람에게 보이기를 원했습니다. 영적으로 와스디는 겉만 아름답고 속은 정제되지 않은 율법주의자를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는 겉은 화려하고 예쁘게 치장은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높이고 의롭게 하는 데는 앞장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높이는 데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입니다.
‘청하여’라는 단어는 (보 935 P.VHNG 전치사. 동사, 히필(사역능동), 부정사연계형) 이르다, 부르다, 청하다, 허락하다, 라는 뜻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잔치의 흥이 최고조에 달하자 갑자기 왕후인 와스디를 부르고 싶어 졌습니다. 가장 최고점에 잔치가 올라갔을 때 아름다운 왕후가 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왕을 높여주고 세워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레) ~을 위하여, 라는 전치사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신랑을 세워주고 높여주며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와스디는 왕의 신부로서 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왕을 세워주면 됩니다. 왕을 높여줄 때 자신도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와스디는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왕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자신이 높아져야 하는데 왕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교만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왕후이면서 아름답고 용모가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이 율법의 신부들입니다. 자신들이 받은 영광이 자신의 능력으로 받은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왕이 있기 때문에 왕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신랑이 있기 때문에 신부가 있습니다. 율법의 신부들은 자신의 능력과 권세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능력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와스디는 이미 초청받아 누리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왕후가 되었다는 것은 먼저 권세를 누리는 율법주의자들인 대 제사장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아 누렸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니 믿지 않고 죽였습니다. 와스디는 왕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살고 있음에도 왕이 나오라고 했지만 나오지 않습니다.
12절 바테마엔 하말카 바쉐티 라보 비드바르 하멜렉크 아쎄르 베야드 하사리심 바이크초프 하멜렉크 메오드 바하마토 바아라 보
에 1:12 그러나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마음속이 불붙는 듯하더라
왕의 명령에 왕후 와스디는 내시가 전하는 왕명을 따르기를 싫어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이 진노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처럼 타올랐습니다.
‘싫어하니’라는 단어는 (마엔 3985 CW.VPIFZS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강조능동), 미완료, 여성, 3인칭, 단수) 거절하다, 거부하다, 라는 뜻입니다. 왕후 와스디는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자신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꼭두각시 놀음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높아지는 자리가 아니라 왕이 높아지는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와스디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왕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가 피엘, 강조능동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왕이 직접 온다고 해도 나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는데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자신의 의로 구원받고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와스디와 같은 율법의 신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인 협력설(神人協力說)을 주장합니다. 구원은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 협동하여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주셨을 때 믿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혹시 내가 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신부를 자랑하고 싶어서 나오라고 하는데 자신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서 주님의 초청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받은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 신랑만 높이면 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신랑만 증거 하면 됩니다. 와스디는 어떻게 됩니까?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왕궁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19절 임 알 하멜렉크 토브 예체 데바르 말쿠트 밀르파나이브 베이카테브 베다테 파라스 우마다이 베로 야아보르 아쎄르 로 타보 바쉐티 리프네 하멜렉크 아하쉐베로쉬 우말쿠타흐 이텐 하멜렉크 리르우타흐 하토바 미메나
에 1:19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와스디는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조서를 내리게 됩니다. 자신이 예쁘고 용모가 아름다운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자만과 오만이 결국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게 했습니다. 이 왕후의 자리는 와스디보다 나은 사람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율법주의의 삶을 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권세와, 물질을 가지고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불복종하면 안 됩니다. 교회로 초청하여 새 예루살렘에서 함께 살자고 요청하고 있는데도 무시한다면 마지막은 지옥의 불 못이며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것들도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이 자리는 누구에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에스더에게 돌아갑니다.
9절 바티타브 하나아라 베에나이브 바티사 헤세드 리파나이브 바예바헬 에트 타메루케이하 베에트 마노테하 라테트 라흐 베에트 쎄바 하네아로트 호르우요트 라테트 라흐 미베이트 하멜렉크 바예샤네하 베에트 나아로테이하 레토브 베이트 하나쉼
에 2:9 헤개가 이 처녀를 좋게 보고 은혜를 베풀어 몸을 정결하게 할 물품과 일용품을 곧 주며 또 왕궁에서 으레 주는 일곱 궁녀를 주고 에스더와 그 궁녀들을 후궁 아름다운 처소로 옮기더라
왕의 내시 헤개가 에스더를 좋게 보고 은혜를 베풀어 몸을 정결하게 할 물품과 일용품을 주었습니다. 에스더는 헤개의 눈에 띄어 선택을 받았습니다. 에스더는 와스디와 비교할 때 비교도 되지 않는 여인입니다. 유대인의 이방인 여인으로서 왕후가 될 만한 재목감도 안 됩니다.
‘에스더’라는 단어는 (에스테르 635) 에스더이며, ‘별’이라는 뜻입니다. 에스더는 부모가 일찍 죽었습니다. 그래서 사촌오빠인 모르드개의 손에서 양육받았습니다. 모르드개의 신앙을 전수받았습니다. 에스더는 왕후가 된 것이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은혜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에스더는 별이라는 뜻입니다. 왕에게 선택되어 천박한 인생이 왕후가 되어 별이 되는 인생으로 바뀐 것을 말합니다. 에스더는 철저하게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중에 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병자와, 어부와,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구원받을 만한 조건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들을 만세전에 선택하셔서 구원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 에스더는 페르시아 민족으로 보면 이방인입니다. 왕후가 될 만한 조건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하여 구원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지만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우리들도 에스더처럼 부모를 일찍 잃은 자처럼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살았던 인생들입니다. 인정해주는 사람도 없고 이방 땅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가던 에스더처럼 원죄의 노예가 되어 괴롭게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헤개와 같은 사람의 눈에 띄어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접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것을 말합니다.
17절 바예에하브 하멜렉크 에트 에스테르 미콜 하나쉼 바티사 헨 바헤세드 레파나이브 미콜 하베툴로트 바야셈 케테르 말쿠트 베로솨흐 바야멜리케하 타하트 바쉐티
에 2:17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
아하수에로 왕은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했습니다. 에스더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서 더 은총을 받았습니다. 왕이 에스더의 머리에 관을 씌워주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았습니다. 율법의 신부인 와스디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이 자신의 능력으로 씌워진 줄 알고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초청할 때도 교만하여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아무런 능력도 없고 지위도 없고 볼품없는 이방인에 불과합니다. 이런 에스더에게 왕은 왕후의 관을 씌워주고 자신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왕후로 세워주었습니다. 이것이 값없이 받은 은혜입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은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내가 어떤 선한 행위를 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은혜받을 만한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에게 은혜를 허락하셔서 주님의 신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에스더와 같은 신부는 오직 주님만을 높이고 영광만 돌리면 됩니다. 신랑이 나오라고 하면 나오고 서라고 하면 서면 됩니다. 신랑 때문에 신부는 높아지게 됩니다. 자신이 능력이 있어서 높아진 것이 아니라 신랑이 세워주니 높아졌습니다. 율법의 신부는 있는 것도 빼앗기고 새 예루살렘의 영광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복음의 신부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있다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주님과 함께 잔치가 일어나서 함께 영원히 즐거움에 동참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왕후 와스디와 에스더에 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와스디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율법의 신부를 말한다면 에스더는 값없이 구원받은 복음의 신부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누구의 신앙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현재 와스디면서도 인정하기 싫어서 분노를 내고 있다면 이 사람은 와스디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을 나와 하나님이 함께 이루어나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에스더처럼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이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을 믿고 있다면 복음의 신부입니다.
율법의 신부는 주님이 나오라고 해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거부하고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밀고 나가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통제도 받기 싫어하고 오직 자신의 영광만 높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복음의 신부는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라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내 힘으로 내가 믿어서 된 것인지 하나님의 전적인 값없는 은혜인지를 생각하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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