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삼위일체 성경공부자료 중에서 삼위일체 증거에 관한 잘못된 견해들이라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기독교 교리 중에 삼위일체 교리는 중요한데 잘못된 삼위일체 교리를 알고 있으면 안 됩니다. 정확한 삼위일체 교리를 알아야 올바른 신앙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삼위일체의 잘못된 견해들을 통해서 이런 것들이 잘못된 증거라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 증거에 관한 잘못된 견해들
1. 오리겐(Origenes)
오리겐은 185년경에 알렉산드리아(Alexandrian)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기독교인으로서 202년 레오니데스(Leonides)의 대 박해 시에 순교하였고, 오리겐은 어머니와 6인의 제매(弟妹)의 생활을 위하여 필경(筆耕)도 하고 학생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8세 때 스승인 클레멘트의 뒤를 이어서 신학교를 주관하게 되자 암모니어스 삭카스(Ammonius Saccas)에게서 철학을 배웠다. 오리겐은 일생동안 성경 연구에 노력을 기울였고, 성경을 중히 여겨 성경을 신학의 기초로 하였다. 다만 그는 우화(寓話)적인 해석법(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잘 썼다.
특히 오리겐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고자 스스로 상하여 고자가 되었고 그는 자신 스스로의 준엄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학 사상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 그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는 종속설(從屬說)을 세웠고, 영혼 선재설(靈魂 先在說)을 주장했으며, 십자가 구원 외에 구원의 다방면을 생각하였다.
또한 죽기 전에 깨끗하게 되지 못한 영혼은 내세(來世)에 가서 영혼(靈魂)을 깨끗하게 하는불이 있어 깨끗해진 후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상(思想)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오리겐의 사상은 연옥설과 비슷하여 연옥설(煉獄說)의 시초가 될 수 있었다. 오리겐은 악인도 사후(死後)에 시련을 통하여 그 길이 멀기는 하나, 마침내는 다 깨끗하게 되어서 만민이 다 같이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다.
오리겐은 말하기를 ‘로고스는 아버지와 하나이며 같은 본질을 가지고 계시나, 다른 한 편으로는 그는 하나의 존재하시는 분이며, 특별한 인격이시다. 아버지와 로고스는 두 인격이시며 한 하나님이시다. 같은 뜻을 가지시고, 같은 일을 하신다’ 오리겐은 아버지와 로고스는 성품이 같은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리겐은 성품이 같은 아버지와 로고스 사이에 있어서 차별을 말하며 종속설(從屬說)을 세웠다.
즉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났으므로 아버지에게 복종하며 아버지에 속한다는 것이다. 오리겐은 아버지와 아들 외에 제3의 인격으로서 성령을 더했다. 그렇지만 오리겐은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논중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서 미루어 성령을 생각하게 하였다. 성령이 아들에게 종속(從屬)되었음을 말했는데 이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종속됨과 같다고 했다. 또한 성령은 아버지가 아들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지으신 것이며, 이 삼위(三位)의 하나님은 그 지배하는 영역(領域)이 다르고, 원리(原理)가 되는 것은 성부(聖父)하나님이시며, 이성이 나오는 곳은 로고스 성자(聖子)이고, 성결케 하는 것은 성령(聖靈)이라고 한다. 오리겐의 삼위일체론은 종속론(從屬論)이다. 이러한 오리겐의 주장은 두 위(二位)의 본질적(本質的) 신성(神性)을 떨어뜨렸다.
2. 사벨리안주의(Sabellianism)
A.D. 2-3세기의 사벨리안주의의 선구자들은 노에투스(Noetus), 프락세우스(Praxeus), 에피고누스(Epigonus), 그리고 클레오메네스(Cleomenes)이다. 사벨리안주의는 하나님의 독재 (獨裁)혹은 독점적 지배를 옹호하는 독재론자들이다.
독재론은 동적 독재론(Dynamistic Monarcanism)과 양식적 독재론(Modalistic Monarchianism)의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1) 동적 독재론 (同的 獨裁論)
그리스도를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되고 영감(靈感)되고 높임을 받은 단순한 인간이었으며 그리스도는 동정녀(童貞女)에게서 나서 세례를 받을 때에 영이 임하여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으며 부활하므로 높임을 받게 된 것이다. 동적 독재론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이는 시리아 안디옥 감독이었던 사모사타 바울이었다. 사모사타(Samosata)는 안디옥의 동북 유브라데스 강변에 위치한 곳에서 출생하여 260년 이래 안디옥의 감독을 지냈다.
그는 하나님은 온전한 한 인격이라고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고스 혹은 아들, 지혜 혹은 성령은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신적 이성 혹은 로고스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에게 속해 있던 것이며 비 인격적인 세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동정녀에게서 탄생한 예수는 하나님의 로고스적 세력을 충만히 받은 한 인격이었다. 이처럼 위로부터 내려온 신적 지혜의 내주(內住)로 말미암아 인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이러한 지혜의 내주는 예언자들에게서도 올 수 있으나 하나님의 성전이신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독특(獨特)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도덕적(道德的) 결합을 나타내는 데 불과한 것이다. 예수는 성령에 감화(感化)와 의지의 일치에 의해서 확고하게 하나님과 긴밀한 연합을 이루었으며 그리하여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구속자(救贖者)로서의 자격을 확보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의 항구적(恒久的)인 일치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사모사타 바울의 가르침은 이상과 같다. 그는 자기의 견해를 보급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찬미하는 찬송의 노래를 제거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264-269년 사이에 세 차례의 종교 회의가 개최되는 동안에도 정죄를 면하고 존속되었다. 왜냐하면 사모사타 바울은 자기 견해의 이단적 성격을 교묘히 은폐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종교 회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능숙한 변론가요, 수사학자였던 장로 말키온(Malchoin)은 논쟁에서 사모사타 바울의 정체를 폭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동질(Homoousios)이라는 말이 배격되었는데, 그 이유는 사모사타 바울이 하나님과 로고스를 한 인격으로 지칭하는데 이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사모사타 바울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인간적 인격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으로 전략(轉落)시켰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神性)을 단순한 능력(能力) 혹은 세력(勢力)으로 간주하여 예수의 인성(人性)이 신격화(神格化) 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동적 독재론자들은 역사적 그리스도의 인격성(人格性)을 보존하고 그의 본질적인 신성(神性)을 희생시켰다.
2) 양식적 독재론(樣式的 獨裁論)
양식적 독재론자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양식(mode) 흑은 현현이라고 생각하였다. 사벨리우스(Sabellius)는 모든 양식론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일의 진정한 양식론자였다. 사벨리우스는 기원 215년 경에 로마에서 가르쳤다. 그는 삼위일체론적 개념(槪念)에 있어서 그의 체계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단일한 실체(μονας)이다. 하나님의 존재 안에는 구별이 없으며, 단일체(單一體)인 하나님은 세 가지의 상이(相異)한 양식(樣式) 혹은 형태(形態)로 자기를 나타내신다. 자기를 창조주(創造主)로 나타내신 것은 아버지요, 구속자(救贖者)로 나타내신 것은 아들이며, 정결(精潔)한 자로 나타내신 것은 성령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 실체(三實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한 인격에 의에서 행하여진 세 가지 역할(力活)이라고 하겠다. 다른 말로 하면 이들 삼자(三者)는 모두가 하나이며 동일(同一)한 인격(人格)인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무대의 배역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도 있다. 즉 한 사람은 연극 배우자가 관중 앞에서 세 가지의 다른 성격 혹은 역할을 맡아 출연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진짜 인격은 오직 하나뿐인 것이다.
사벨리우스의 삼위일체 체계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것은 가정(假定)된 동일성이다. 결국에 가서 사벨리우스는 파문을 당하고 그의 가르침은 배격되었다. 그러므로 사벨리우스주의의 하나님은 세 가지의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단일(單一)한 실체(實體), 단일(單一)한 인격이었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신의 신성을 확인하나 삼위 간에 모든 구별(區別)을 사라지게 했다.
양식적 독재론자들은 위격(位格)의 삼위성(三位性)을 부인(否認)하고 연속되는 계시의 삼위 성으로 대치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 자신이 태어났고, 고난당하셨으며, 죽으셨다고 함.
성부, 성자, 성신은 같은 하나님 같은 하나이고 같은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이름이라고 한다. 이 이름을 세 개의 연속적인 에너지 또는 양태들에 차례로 다 적용했다. 하나님은 처음에 창조주와 입법자(立法者)로는 성부의 위격, 성부의 나타남, 또는 성부의 양태(樣態)로 나타났다가 그는 후에 성유신(成肉身)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는 구속주(救贖主)로서 성자의 위격과 얼굴로 나타났으며 마지막으로서는 생명(生命)을 주시는 이로써 성신의 위격과 얼굴로 나타났다고 함.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기독교적인 유일신앙을 유지하는 일이 그들의 관심이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성부와 동일시하거나 하나님의 자기 현현의 한 양식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한편 성부 자신의 고난을 당하고 죽었다고 하는 성부 수난설(聖父受難說)에 이르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현설(假現說)에 이르게 되었다.
3. 아리우스(Arius)
아리우스는 리비아 사람으로서 신학자 루씨안(Lucianus-312년경에 죽음)에게 배우고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바우칼리스(Baucalis)라는 교회를 담임한 장로가 되었다. 아리우스는 325년 콘스탄티 대제에 의해 소집된 니케아 회에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와 신학적 논쟁 기독론에 관한 그리스도의 신성(神聖)과 인성(人性)을 부인함으로 이단으로 정죄되어 일리아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아리우스는 성자는 성부의 최초(最初)의 피조물(被造物)로, 성령은 성자의 최초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여 성자와 성령의 신성(神性)을 모두 부정한다. 아리우스는 성부만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성자는 만물 중 첫째가는 분이자 가장 위대한 분으로 무에서 창조되었고 성령은 성자에 의해 존재하게 된 모든 피조물 중 첫째이자 가장 위대한 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성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이므로 성자는 신적 본질을 취하지 않았으므로 성자는 성부와 동일 본질(同一本質)이 아니고 좀 수정된 의미에서 하나님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자는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으며 성자는 성부의 창조로 지상에 내려와 친히 인간의 몸을 취하신 제이의(弟二位) 존재자라 주장하므로 성자의 신성을 부정하고 또한 성자는 그의 몸에서 ‘로고스’가 인간의 지성(知性)이나 영적인 원리(原理)를 취하셨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는 완전 신(完全神)도 아니고 완전인(完全人)도 아니라고 했다. 이는 성자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만일 아리우스가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등한 영원성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고 또 진정한 인간도 아니라면, 그는 노스틱 주의의 창조신(demiurge)과도 비교할 수 있는 중간적 존재 혹은 반신 반인간의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피조물을 경배하는 결과가 된다. 이러한 중간적 존재가 어째서 전능하신 창조주에게 필요했던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과 직접 접촉하기에는 너무나 오만했기 때문이었던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일 그가 중간적 존재 없이는 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다면, 중간적 존재 없이 아들을 창조하는 일도 불가능한 일이다.
2. 잘못된 삼위일체 유추(類推)의 예증(例證).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해 보려고 초대교회부터 여러 가지 원천에서 인출된 유추(類推)에 의하여 모순 없이 밝혀보려고 여러 예증(例證)들로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유추들은 삼위일체의 논의에 약간의 이해와 도움은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모두가 다 불안전하며 불충분하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고 하며, 무슨 형상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분만 아니라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자연계나 인간의 정신 구조에서 찾아 설명하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지 못하고 헛된 일에 불과하다.
1. 나무의 뿌리, 줄기, 가지의 유추
‘성부는 나무의 뿌리고 성자는 나무의 줄기이고 성령은 가지이다. 따라서 한 나무이지만 뿌리, 줄기, 가지가 있는 것처럼 삼위일체 하나님도 그러하다’. 성경에 내 아버지는 농부이고, 나는 포도나무라고 한 곳은 있어도, 그러나 성령은 그 가지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우리 신자들이 그 가지라고 하였다(요 15:1-8).
하나님의 신격에는 삼위가 계신다.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고 본체도 하나이시고 권능과 영광도 동등하시다. 그러나 뿌리, 줄기, 가지는 기능이 다르다. 뿌리의 기능이 다르고, 줄기의 기능이 다르며, 가지의 기능이 다르다. 줄기가 뿌리의 일을 할 수 없고 뿌리가 줄기와 가지의 일을 할 수 없다. 그리고 뿌리, 줄기, 가지는 동질이 아니다.
2. 태양의 유추
태양의 열과 빛은 동등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열과 빛은 인격적인 존재일 수도 없고, 태양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예증을 위한 비유이기 때문에 인격 또는 무인격을 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약간의 비슷한 비유는 있어야 한다. 더욱이 이것은 성경 어느 곳에도 언급한 곳이 없기 때문에 타당하지 못하다. 성경에 “나는 빛이요”라는 말은 있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태양이고 성령은 열과 같다는 말은 없다.
3. 물의 유추
물질계에서 취해온 삼위일체에 대한 유추들이 많이 있다.
특히 물의 운동에 있어서 샘물, 시내, 강 또는 습기, 구름, 비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증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어둡게 만들고 있다. 무엇 때문에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물, 얼음, 기체와 같다고 설명할까? 성부가 물이고 성자가 얼음이고 성령이 기체와 같다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나 세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는 양식적 단일 신론(單一神論)을 후원하기 쉽다.
4. 크로버(Clover) 잎의 유추
아이랜드에서 성 패트릭은 크로버 잎과 같은 토끼풀로 삼위일체 교리에 사용했다.
그는 그것을 청중 앞에 들고서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청중들은 ‘토끼풀이요’라는 대답을 했다. 다음에 그는 토끼풀의 한 판을 따버리고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였다. 청중들은 ‘토끼풀이요’라는 대답이 다시 나왔다. 세 판이 각각 같은 대답으로 묘사되었다.
이것은 한 명사(名詞)가 한 의미로 하나인 것에 관설(關說)하고 다른 의미로 셋인 것에 관설할 수 있다. 그러나 토끼풀 예증은 이보다 더 멀리 예증으로 추진(推進) 되어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머리가 셋 달린 괴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진리는 사람의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三人格이 一體란 것은 우리 이성으로 인식하기에는 불가 사이하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설명을 우리 주위에 있는 자연계나 정신계(精神界)의 구조에 의하여 예증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하고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나 비슷한 것은 전연 없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며 무슨 형상으로 비기리요”사 40:18.
성부도 참 하나님, 성자도 참 하나님, 성령도 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 하나님으로 있음이 아니고 하나님은 유일하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느 유추로 예증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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