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산상수훈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인 성도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시고 소금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냐고 말씀합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힐 뿐입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으면 마귀에게 짓밟히게 됩니다. 교회가 현재 짠맛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짓밟히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이 사라지니 교회가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초대교회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넘쳐나니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교회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을 발산해야 합니다. 주님은 성도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세상의 빛이라고 합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전파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착한 행실을 세상에 전하여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인 성도(마 5:13-16)
13절 휘메이스 에스테 토 할라스 테스 게스 에안 데 토 할라스 모란데 엔 티니 할리스데세타이 에이스 우덴 이스퀴에이 에티 에이 메 블레데나이 엑소 카이 카타파테이스다이 휘포 톤 안드로폰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소금'(할라스)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라는 혹자(Pliny)의 말처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처(Schweizer)가 지적한 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 것이 '노새의 태(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 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여야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Tasker).
그 맛을 잃으면 - 동사 모라이노 3471은 모모스(3470: 비난, 불명예, 치욕, 결점, 오점)에서 유래했으며, '어리석게 하다(만들다), 수동태로 '어리석다, 어리석게 행동하다'를 의미한다.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의미는 미련하고 어리석게 된다는 의미다. 성도가 진리를 모르면 어리석게 된다. 복음을 깨닫고 알 때 지혜롭게 된다. 문법은 동사 가정법 과거 수동태 단수 3인칭이다. 가정법은 소금이 맛을 잃을 수도 있고 잃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과거 시제는 소금이 맛을 잃어버렸다는 의미다. 수동태는 맛을 잃기 싫어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우리는 성도이기 때문에 진리의 맛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구원받은 자는 복음을 잃어버릴 수 없다.
14절 휘메이스 에스테 토 포스 투 코스무 우 뒤나타이 폴리스 크뤼베나이 에파노 오루스 케이메네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 받는 종 한 분뿐이다(사 42:6; 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 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 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 49장; 54장; 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15절 우데 카이우신 뤼크논 카이 티데아신 아우톤 휘포 톤 모디온 알르 에피 텐 뤼크니안 카이 람페이 파신 토이스 엔 테 오이키아
마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비취느리라 -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에 다 같이 나오는 기사이다. 눅 8:16에는 씨 뿌리는 비유 다음에 오고, 막 4:21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눅 11:33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이 기사는 문자적으로 유사해서 그중 어느 것도 독립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 누가의 구절(눅 8:16)은 서로 간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중 특히 눅 11:33은 마태의 것을 닮았고, 막 4:21의 기사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련의 이러한 일치성은 본문의 확신성을 더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선택한다면 다른 구절에 비해 눅 11:33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The Pulpit Commentary).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모디오스)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 그릇으로 보통 8.25리터의 양을 담을 수 있는 용기로 알려졌다. 혹자는 이 말의 용도에 대해 등을 마루에 두고 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하려고 곡식을 재는 용기로 그것을 덮어두면 얼마 동안은 효과가 있다(Tholuck)고 한다.
그리고 이에 비해 '등경'은 복음서에 4회, 그 외에 8회 정도 등장하는데, 그 대부분은 촛대가 아니라 '등불 받침대'를 뜻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옥 구조상 이 등경은 방 하나에 한 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등경이 빛을 멀리 비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지만, 말은 빛을 비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말 아래 둔다는 것은 빛을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형식주의, 금욕주의, 전통주의의 제한성(制限性)에 연결된다(Lange). 그리고 등경은 성도와 교회의 개방적 특성과 연결된다(계 1:20). 실로 복음 사역자 들은 마치 산 꼭대기에 선(사 2:2) 자처럼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행실과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를 널리 전해야 한다.
16절 후토스 람프사토 토 포스 휘몬 엠프로스덴 톤 안드로폰 호포스 이도신 휘몬 타 칼라 에르가 카이 독사소신 톤 파테라 휘몬 톤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여기에서 예수는 이 비유를 더 심화시키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의(義)를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 한다. 독사조 1392 동사이다. 문법은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복수 3인칭이다. 성도의 옳은 행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 가정법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돌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내가 열심히 진리의 빛을 비추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과거 시제는 성도가 열심히 진리의 빛을 비치어 주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혹시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10-12절). 그러나 박해를 두려워해서 빛을 감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이 빛을 비추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理由)이다(고후 4:6; 벧전 2:12).
또한 '증거 한다'라는 말에는 말뿐 아니라 행동도 포함되는 것이다. 실로 선행이 따르지 않는 선한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Stier). 이같이 천국의 규범(3-12절)은 천국의 상속자들의 삶 속에서 작용하여 천국에 대한 증거를 만들어 낸다(13-16절).
'소금'(13절)이 부패를 늦추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제자들이 세상을 따라가거나 타협하게 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빛'(14-16절)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적극적인 면을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제자들이 세상에서 물러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본회퍼(Bonhoeffer)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출애굽기 2장 히브리어 설교말씀] “르우엘과 이드로”(출 2:18; 3:1)
[마태복음 22장 히브리어 설교말씀] “천국의 혼인잔치비유”(마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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