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갈라디아서 헬라어 설교말씀 중에서 성령의 열매 온유 겸손 희락 화평 온유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았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시작입니다. 이제 하늘로부터 태어났으니 성장해야 합니다. 바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화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유와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절제를 하지 못하면 악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면 결국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절제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 온유 겸손 희락 화평 온유”(갈 5:22-23)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이요, 또 하나는 복음입니다. 성경이 계속해서 율법과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율법은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요,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의로 만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무법 방종 주의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자신 스스로 율법을 폐기시켜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구원받았다고 인간 스스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혼구원이 된 자들은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성화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이 어렸을 때에는 아버지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 멋대로 살면서 아버지 속을 많이 타게 했습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다음부터는 공부도 열심히 하여 세상에서 좋은 직업과 아주 훌륭한 인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당당하게 자식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린아이와 같았을 때에는 늘 투정하고 시기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속을 썩게 했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의를 경험한 장성한 자의 신앙이 되었으니 행동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져 주님의 성품을 닮아간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 구원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나를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뭐라고 해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자이며 아버지의 뜻대로 열심히 성화의 삶을 살아가니 당당하게 나에 대하여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현재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자가 되었습니까?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니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따라 성령으로 힘입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구원받은 자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의 힘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내 힘으로는 절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맺게 해 주셔야 합니다.
11절 바요메르 엘로힘 타드셰 하아레츠 데쎄 에세브 마즈리아 제라 에츠 페리 오세 페리 레미노 아쎄르 자르오 보 알 하아레츠 바예히 켄
12절 바토체 하아레츠 데쎄 에세브 마즈리아 제라 레미네후 베에츠 오세 페리 아쎄르 자르오 보 레미네후 바야르 엘로힘 키 토브
창 1:11-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께서는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종 씨까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나왔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시고 좋아하셨습니다.
‘내니’라는 단어는 (야차 3318 CW.VHIFZS 와우접속사. 동사, 히필, 미완료, 여성, 3인칭, 단수) 나오다, 돋다, 자라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창조하시고 각종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땅에서 열매 맺는 나무의 싹이 돋아나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점점 자라나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열매를 맺을 때에 하나님도 보시기에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에서 열매 맺는 나무가 나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로 땅에서 나와서 계속적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와우접속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 스스로 열매를 맺는 나무가 나온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나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히필 사역능동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인생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 나무는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셔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19절 판 덴드론 메 포이운 카르폰 칼론 에크코프테타이 카이 에이스 퓌르 발레타이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주님께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로 구원받은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의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못된 나무로써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나무들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마지막 날에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붙어있으면 됩니다.
5절 에고 에이미 헤 암펠로스 휘메이스 타 클레마타 호 메논 엔 에모이 카고 엔 아우토 후토스 페레이 카르폰 폴륀 호티 코리스 에무 우 뒤나스데 포이에인 우덴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있으면 사람이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 열매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은 모습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의 열매를 열심히 맺으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와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으면 많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주님 안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자신 스스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나무로부터 영양분을 먹고 때가 되매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가 열려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주님 안에 있는가? 있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제부터 성령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 보겠습니다.
22절 호 데 카르포스 투 프뉴마토스 에스틴 아가페 카라 에이레네 마크로뒤미아 크레스토테스 아가도쉬네 피스티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가페 26) 사랑, 자비, 존경,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열매를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합니다.
42절 알르 에그노카 휘마스 호티 텐 아가펜 투 데우 우크 에케테 엔 헤아우토이스
요 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증언하시면서 예수님은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나서 다만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랑하는’이라는 단어가 (아가페 26)입니다.
신약 히브리어 성경으로 사랑은 אהבה(아하바 160)입니다. 그럼 히브리적으로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아하바를 모두 합치면 숫자가 13이 나옵니다. 히브리어 중에 אחד(에하드 259)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합치면 13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주님 안에 있으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은 것입니다.
‘아하바’의 히브리적 의미는 전능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었던 자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셔서 살려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집에 거주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영원히 죽을 인생을 하나님께서 살려주셔서 영원한 천국에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와 같이 주님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희락’이라는 단어는 (카라 5479) 기쁨, 즐거움, 유쾌함, 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희락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으로 기쁨이 찾아오고 즐거움이 있으며 항상 인생을 유쾌하게 살 수가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주님으로 인하여 인생이 기뻐지는 것입니다. 이것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10절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호 앙겔로스 메 포베이스데 이두 가르 유앙겔리조마이 휘민 카란 메갈렌 헤티스 에스타이 판티 토 라오
눅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 천사가 목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좋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구속하신 주님이 탄생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여기에서 ‘기쁨’이라는 단어가 (카라 5479)입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면 나는 항상 기쁨이 넘치고 즐거운 것입니다. 내 영혼이 기뻐지니 내 육체가 즐겁고 유쾌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히브리어로는 שמחה(쉬므하 8057)입니다. ‘쉬므하’의 히브리적 의미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보내주셔서 십자가 복음의 말씀으로 운명이 전환되어 영육으로 고통과 괴로움에 붙잡혀 있던 자들에게 숨을 쉬게 하셔서 기쁨을 주시고 예배를 드리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영원한 원죄에서 살아났기 때문에 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살아난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3절 베차디킴 이세므후 야알레추 리프네 엘로힘 베야시슈 베시므하
시 68:3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의인은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여 뛰놀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뻐하고’라는 단어가 שמחה(쉬므하)입니다. 이제 우리는 영원한 저주에서 살아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내 안에 기쁨만이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희락의 열매입니다. 이것도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기쁨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화평’이라는 단어는 (에이레네 1515) 평화, 휴식, 번영, 안정, 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화평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으로 안정과 휴식을 얻는 것입니다. 먼저는 내가 안정을 얻을 때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해줄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괴롭고 고뇌에 차있으면 육적인 일도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고요하여 안정이 될 때에 가정이 잘 되고 사업이 잘 되고 교회가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 있는 가정마다 잘 되지 않고 문제 있는 교회마다 부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화평은 진정 무엇입니까?
14절 독사 엔 휩시스토이스 데오 카이 에피 게스 에이레네 엔 안드로포이스 유도키아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평화’라는 단어가 (에이레네 1515)입니다. 그럼 성령의 열매인 화평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임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자체가 평화이며 화평입니다. 이것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으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שלום(샬롬 7965)입니다. ‘샬롬’의 히브리적 의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의로운 자로 운명이 전환이 되어 말씀으로 통제를 받아 치리함을 받고 가르치고 배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분쇄하여 씹어 나의 것으로 소화한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적 개념의 평안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같이 읽고 배우고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말씀을 묵상하고 매일같이 배우는 것입니다.
165절 솰롬 라브 레오하베 토라테카 베에인 라모 미크숄
시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며 이런 자들에게는 인생 가운데 장애물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평안’이라는 단어가 שלום(샬롬)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자들의 앞에 장애물을 놓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장애물을 놓으면 맹인들이 지나가다가 넘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으면 눈이 열린 자가 되어 인생 가운데 장애물을 보고 피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평안이 내 안에 임하면 인생의 장애물을 하나님께서 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당할 쯤에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이라는 단어는 (마크로뒤미아 3115) 인내, 오래 참음, 참을성 많음, 이라는 뜻입니다. 오래 참는 것도 성령의 열매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인내하여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나를 위해 오래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을성이 없었던 존재인데 주님 안에서 참을성이 많아진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나도 참을성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15절 카이 텐 투 퀴리우 헤몬 마크로뒤미안 소테리안 헤게이스데
벧후 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늦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는 아직도 구원받을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택받은 자들이 모두 돌아오기 전까지는 주님은 심판을 하지 않으시고 인내하시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오래 참으심’이라는 단어가 (마크로뒤미아 3115)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을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변화되지 않은 형제, 자매들도 기다려줄 때에 주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신약 히브리어 성경은 ארך רוח(오레크 753 루아흐 7307)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길게 참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심판할 존재들을 기다리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6절 아크 토브 바헤세드 이르드푸니 콜 예메 하야이 베샤브티 베베이트 아도나이 레오레크 야밈
시 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자신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자신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영원히’라는 단어가 바로 ארך(오레크 753)입니다. ‘오레크’의 히브리적 의미는 힘의 전능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인생의 우두머리가 되시고 첫째가 되어주셔서 영원한 죽음에서 생명으로 탄생되게 하시고 영혼과 육신이 가난하고 비참하게 파괴될 인생에서 살아나게 해 주시고 진리의 말씀을 먹고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천국에 거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도 교회 안에서 인내하면서 참아야 합니다. 분노를 참고 성격이 급함을 참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심판하셨다면 벌써 했을 것입니다. 나의 모습과 행동과 말을 보면 벌써 진노를 받아야 될 인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지금까지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래 참음이 있으니 이제부터 힘들고 지쳐도 참아내면 마침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단어는 (크레스토테스 5544) 선함, 친절함, 우정, 인자함, 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자비는 정직하고 친절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우정을 나타내 주고 인자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고 용서하여 선으로 대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7절 히나 엔데익세타이 엔 토이스 아이오신 토이스 에페르코메노이스 톤 휘페르발론타 플루톤 테스 카리토스 아우투 엔 크레스토테티 에프 헤마스 엔 크리스토 이에수
엡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친구가 되어주셔서 우정을 과시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자비하심’의 단어가 (크레스토테스 5544)입니다. 주님이 나를 친구 삼아 주셨고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13절 메이조나 타우테스 아가펜 우데이스 에케이 히나 티스 텐 프쉬겐 아우투 데 휘페르 톤 필론 아우투
14절 휘메이스 필로이 무 에스테 에안 포이에테 호사 에고 엔텔로마이 휘민
요 15:13-14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내가 명령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명령을 지키면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히브리어는 חסד(헤쎄드 2617)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시고 인자하심을 보여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를 받게 해 주셨습니다. ‘헤쎄드’의 히브리적 의미는 원죄의 울타리에 갇혀 고통을 당하고 사방이 막힌 인생을 살아갈 때에 버팀목이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주님을 의지하고 인생이 주님의 구원의 문을 통과하여 영원히 은혜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받게 됩니다.
6절 베오세 헤세드 라알라핌 레오하바이 우레쇼므레 미차오타이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천 대까지 은혜를 받게 됩니다. 사방이 막혀 고통당하던 인생이 뻥 뚫리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비도 내가 열매로 맺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내 안에 들어오니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주님 안에만 있으면 이런 자비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양선’이라는 단어는 (아가도쉬네 19) 선함, 선행, 곧음, 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양선은 성령의 은혜로 주님의 뜻대로 곧장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선행 행실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선한 행위를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양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직진하셨습니다. 옆으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주님은 주저하지 않으시고 골고다에서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24절 토테 호 이에수스 에이펜 토이스 마데타이스 아우투 에이 티스 델레이 오피소 무 엘데인 아파르네사스도 헤아우톤 카이 아라토 톤 스타우론 아우투 카이 아콜루데이토 모이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럼 우리가 양선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를 부인하고 주님이 메어주신 나의 십자가를 메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육적으로 열심히 선한 행실을 하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있다면 이것은 양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양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선입니다. 주님을 부인하면서 열심히 하나님의 선을 행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내 안에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십니까? 그리고 나의 율법의 요구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메고 따라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양선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윤리적으로 선을 행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안에 양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며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8절 에테 가르 포테 스코토스 뉜 데 포스 엔 퀴리오 호스 테크나 포토스 페리파테이테
9절 호 가르 카르포스 투 프뉴마토스 엔 파세 아가도쉬네 카이 디카이오쉬네 카이 알레데이아
엡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가 전에는 원죄에 빠져있던 어둠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주 안에서 빛이 되었고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여기에서 ‘착함’이라는 단어가 (아가도쉬네 19)입니다. 빛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움입니다. 선한 행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9절 페리 하마르티아스 멘 호티 우 피스튜우신 에이스 에메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세상에서 선한 행실을 한다고 하는 자들은 죄인들입니다. 이것은 양선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의 열매를 맺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있으니 내 안에 양선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양선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נדיב(나디브 5081) 자진하여, 자발적인, 고결한, 고귀한,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거나 섬기는 것을 말씀하는 단어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고귀한 분으로 섬기는 자들이 선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분은 아무 죄가 없으신 고결하신 분으로서 내 안에서 자발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기뻐하며 내 모든 것을 주님께 자진하여 드리는 것을 말씀합니다.
5절 케후 메이트켐 테루마 라아도나이 콜 네디브 리보 예비에하 에트 테루마트 아도나이 자하브 바케세프 우네호쎄트
출 35:5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이스라엘 백성 중에 누구든지 자신의 소유 중에서 여호와께 드릴 것을 선택하여 마음에 원하는 자들은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원하는 자는’이라는 단어가 נדיב(나디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께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 바로 양선입니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은 양선이 아닙니다. 자원하여 기쁨으로 드릴 때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나디브’의 히브리적 의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문을 통과하여 들어온 자들은 구원의 은혜를 받고 죄악에서 탈출하여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을 예표하고 있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자원하여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거룩한 산 제물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물질이 필요하다고 하면 나의 것을 자원하여 드릴 수 있는 믿음이 있을 때에 양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나의 욕심만 채우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드리지 않는 것은 양선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자원하여 교회가 필요한 것을 드릴 수 있는 양선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모든 성도들이 양선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교회가 힘들고 어려운 핍박 속에서도 존속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양선의 열매를 맺어 주님께 칭찬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충성’이라는 단어는 (피스티스 4102) 믿음, 신앙, 확신, 충성, 신뢰, 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충성이 있습니다. 충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확실한 신앙을 말합니다. 믿음이 확실한 자들은 주님께 충성을 다하여 주님만을 신뢰하게 되어 있습니다. 중간에 세상으로 돌아가서 배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만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9절 아쿠사스 데 타우타 호 이에수스 에다우마센 아우톤 카이 스트라페이스 토 아콜루둔티 아우토 오클로 에이펜 레고 휘민 우데 엔 토 이스라엘 토사우텐 피스틴 휴론
눅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자입니다. 끝까지 충성하여 주님만을 따르겠다는 결단을 보인 것입니다. 백부장은 종이 병들어 죽어갈 때에 믿음을 세워 종의 병을 예수님께서 치유하게 했던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피스티스 4102)입니다. 또한 충성이 무엇입니까?
7절 카이 호 로고스 투 데우 에욱사넨 카이 에플레뒤네토 호 아리드모스 톤 마데톤 엔 히에루살렘 스포드라 폴뤼스 테 오클로스 톤 히에레온 휘페쿠온 테 피스테이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초대교회에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제자의 수가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또한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들도 주님의 복음의 말씀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도’라는 단어가 (피스티스 4102)입니다. 그렇다면 충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다른 행실은 모두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도의 복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의 열매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אמונה(에무나 530) 견고함, 확고부동, 신실함, 성실,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맡은 직분에 관하여 최선을 다함으로 하나님께 성실하게 믿음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다면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확고부동하여 견고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교회에 성실하게 충성한다는 것은 주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12절 비데 모쎄 케베딤 바이크후 에벤 바야시무 타흐타이브 바예쎄브 알레이하 베아하론 베후르 타므쿠 베야다이브 미제 에하드 우미제 에하드 바예히 야다이브 에무나 아드 보 하솨메쉬
출 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 군대가 아말렉과 싸울 때에 모세와 아론과 훌은 르비딤에 올라가 모세가 손을 들면 여호수아 군대가 이기고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 군대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붙들어 올렸더니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군대가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려오지 아니한지라’라는 단어가 אמונה(에무나)입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과 훌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자신의 직분에 최선을 다했더니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내가 교회에서 맡은 직분이 하찮다고 생각하여 충성하지 않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직분만 눈에 들어와서 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에 발이 자신은 매일같이 걸어 만 다니고 냄새나는 일만 한다고 하찮게 생각하여 일을 하지 않으면 결국 몸이 상하게 되고 몸이 상하게 되니 결론적으로 자신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내가 맡은 하나의 직분은 하찮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을 건강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맡은 직분에 감사하시고 최선을 다하여 충성의 열매를 맺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3절 프라오테스 엥크라테이아 카타 톤 토이우톤 우크 에스틴 노모스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다음으로 성령의 열매는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 같은 것들은 금지할 법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맺는 것입니다.
‘온유’라는 단어는 (프라위테스 4240) 온유, 친절, 겸손, 동정심, 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헬라어의 온유는 마음이 착하고 친절하여 겸손한 것을 말합니다. 동물에 관하여 사용할 때에는 길들일 때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온순하지 못한 짐승을 고삐에 매어 온순하게 만들어서 주인의 말을 잘 들을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사람에게 사용할 때에는 화를 내지 않고 매정하지 않으면서 온유하고 온순한 사람을 말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온유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5절 마카리오이 호이 프라에이스 호티 아우토이 클레로노메수신 텐 겐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처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천국의 기업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유한 자가 되어 마음을 겸손하게 하면 마음에 평안함을 얻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나 사람에서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온유’라고 하는 단어가 (프라위스 4239)입니다. 이 단어는 온유하다는 단어와 어근을 같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또한 세상의 사람들을 그렇게 대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전파될 것입니다.
히브리어는 ענוה(아나바 6038) 겸손, 온유, 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개념의 온유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나의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에게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온유의 표본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28절 호스페르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 우크 엘덴 디아코네데나이 알라 디아코네사이 카이 두나이 텐 프쉬켄 아우투 뤼트론 안티 폴론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선택받은 자들에게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유이며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인 온유가 있다는 것은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열매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나바’의 히브리적 의미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을 눈으로 목격하고 죄악에서 탈출하여 영원히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가 숨을 쉬고 새로운 영적 경험을 통해서 주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우리가 겸손해졌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의를 죽이고 주님께 복종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세상에서 망아지처럼 자신 뜻대로 살았던 인생이 주님의 은혜를 받고 교회로 들어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온유의 열매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높은 직급에 있고 많은 재물을 집에 쌓아 놓고 있어도 예배에 충성하지 않고 예배에 나오지 않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온유도 아니며 겸손도 아닙니다. 우리가 온유와 겸손을 주님께 배우기 위해서는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말씀도 듣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이제부터 하나님 앞에 예배를 회복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3절 이르아트 아도나이 무사르 호크마 베리프네 카보드 아나바
잠 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훈계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또한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겸손’이라는 단어가 ענוה(아나바)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겸손하게 나와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교만한 자들은 예배를 무시하고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 앞에 온유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말씀하심으로 겸손한 자와 온유한 자를 부르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예배로 나와서 온유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절제’라는 단어는 (엥크라테이아 1466) 자제, 극기, 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절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두가 중요하지만 절제의 부분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절제를 하지 못함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음 가운데 강하게 억제하여 자신이 육적으로 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6절 엔 데 테 그노세이 텐 엥크라테이안 엔 데 테 엥크라테이아 텐 휘포모넨 엔 데 테 휘포모네 텐 유세베이안
벧후 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하나님께서는 지식에도 절제를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것을 절제하고 마음에 억누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절제’라는 단어가 (엥크라테이아 1466)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잘 보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보다 많은 재물이 있으면 재물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1절 바에트 하히 솰라흐 미로다크 발아단 벤 발아단 멜렉크 바벨 세파림 우민하 엘 히즈키야후 바이쉐마 키 할라 바예헤자크
2절 바이세마흐 알레헴 히즈키야후 바야르엠 에트 베이트 네코토 에트 하케세프 베에트 하자하브 베에트 하베사밈 베에트 하쎄멘 하토브 베에트 콜 베이트 켈라이브 베에트 콜 아쎄르 니므차 베오츠로타이브 로 하야 다바르 아쎄르 로 헤르암 히즈키야후 베베이토 우베콜 메므숄토
사 39:1-2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은지라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고침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때에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에게 사절단을 보내 글과 예물을 보냈습니다. 히스기야는 사절단들로 말미암아 기분이 좋아져 그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물들을 보여주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궁중의 소유된 것과 국내의 소유물들을 모두 적군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바벨론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싫어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사람에게 자랑하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많은 복을 받아 재물이 모아졌어도 자랑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두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절제의 은사를 받아 자랑하고 싶은 것을 억눌러야 합니다. 자식 자랑할 것도 없고, 집과 차량과, 지식과, 직업과, 남편과 아내를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내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랑하지 않아도 주님이 알아주시고 사람들이 알아주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פרש(파라쉬 6567) 구분하다, 나누다, 규정하다, 명확히 보여주다, 라는 뜻입니다. 절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정확하게 구분하여 이것이 내가 행동할 일인지 아니면 신앙의 양심에 꺼리는 일인지를 규정하여 나누는 것을 말씀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내 행동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으면 반드시 빈틈을 타고 들어와 나를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32절 아하리토 케나하쉬 이솨크 우케치프오니 야페리쉬
잠 23:32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술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 술을 정확하게 끊지 않으면 마침내 뱀 같이 물고 독사 같이 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가지고 명확하게 나의 행동을 표명하여 먹지 않겠다고 하면 세상의 사람들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확실하게 규정하지도 않고 술에 술탄 듯이 물에 물탄 듯이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뱀 같이 물고 독사 같이 쏠 것입니다. 여기에서 ‘쏠 것이며’라는 단어가 פרש(파라쉬)입니다. 술을 절제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의 인생에 들어와 독사 같이 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망가지게 하고 결국은 패망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파라쉬’의 히브리적 의미는 나의 입술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여 하늘로부터 거듭난 것을 인정하고 거룩한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여 말씀을 항상 되새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우리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현대 시대에는 많은 절제가 필요할 때입니다. 육적으로는 먹는 것을 많이 절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만에 걸리게 됩니다. 비만에 걸리면 건강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는 행동의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영적으로는 더러운 비 진리를 듣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스턴트와 같은 세상적인 설교를 듣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혼적인 것만 즐겁게 하여 영적인 것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들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세상의 것들을 절제하고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내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저절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결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 가지는 열매를 맺지 않으려고 해도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삶을 살아야 하며 구원의 확신을 얻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자들은 자연스럽게 주님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화 구원의 결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여 성화의 결과인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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