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1장에서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노래가 기록되었다. 술람미 여인의 사랑 고백 노래가 기록되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나에게 살과 피를 주신 분이다.
솔로몬 왕의 아가라(아 1:1-17)
포도주보다 나은 사랑 (1-4)
• 1:1 솔로몬의 아가라
※ 왕의 말 (1)
아가(雅歌)의 히브리 원어 (쉬르 하쉬림)은 “노래 중의 노래”라는 뜻으로, “노래 중 가장 뛰어나고 귀한 노래”를 말한다. 솔로몬이 지은 노래가 일천 다섯이나 되는데(왕상 4:32) 아가서는 그 가운데 일부라고 한다.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말씀한 것이다. 아가서는 영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육적으로 이용하면 거룩한 것을 속(俗)되게 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우리는 솔로몬왕과 술람미 여자의 관계를 통하여 예수님과 성도와의 신령한 관계를 배워야 한다.
• 1:2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 술람미 여자의 말 (2-4)
술람미 여자는 “신령한 성도”를 가리키고, 예루살렘 여자는 “보통 성도” 혹은 “육신에 속한 성도”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신자 중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고린도전서 3:1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 했다.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입 맞춰 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님과 더불어 접촉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술람미 여자(신령한 성도)는 예수님을 가까이 하며 영적 교통을 하며 교제하기를 원한다. 예수님도 성도가 멀찍이 따라다니는 것을 원치 않고 좀 더 가까이 나아와서 신령한 교통을 하는 것을 원하신다.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예수님의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는 말이다. 포도주는 달콤하여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삿 9:13; 시 104:15), 사람으로 하여금 취하게 한다. 이처럼 예수님 의 사랑은 달고 성도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그 사랑에 도취가 되게 한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도 그 목적은 주님이 하시는 구원운동(생명운동)은 변화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요 2:1-11).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기쁘고 즐겁게 하고, 달고 도취가 되게 만들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그 사랑 속에 깊이 들어간 성도라야 신령한 성도이다. 그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속에 깊이 들어가서 그 사랑의 단맛을 알고 즐거워하며 그 사랑에 이끌리어 따라가는 생활을 해야 한다.
• 1:3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자랑하는구나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이것은 예수님이 기름부음 받은 것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그것이 참으로 향기롭다는 뜻이다.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예수님의 이름은 향기롭다. 그 향기는 모든 더러운 냄새를 제거하며 썩어져 가는 것을 방지하고 좀이나 벌레가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더러운 마귀는 예수님의 이름에 놀라서 도망친다. 또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의 심령 속에서도 향기가 넘쳐 나오게 된다. 처녀들이 너를 자랑하는구나 처녀들은 모든 성도를 가리킨다(마 25:1-13; 고후 11:2).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지극히 큰 사랑을 깨닫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사모한다.
• 1: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예수님이 술람미 여자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였다는 말이다. 예루살렘 여자(보통 성도)는 침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왕을 따라 다니면서 섬길 뿐이다. 그러나 술람미 여자(신령한 성도)는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침궁에까지 들어간다. 침궁에 들어간다는 것은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더불어 신령한 교통을 하며 동거동락하는 생활을 가리킨다.
술람미 여자는 영적 세계에 들어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생활을 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자는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세계 밖에서 예수님을 섬긴다. 우리도 좀더 신령한 자리, 은밀한 골방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자리에까지 들어가는 믿음을 가져야겠다. 마태복음 6:6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했다.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계시고 또 거기서 보시고 거기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너는 나를 인도하라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의 인도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성도들이 예수님을 사랑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외모를 보지 알고 중심을 보는 사랑 (5-7)
• 1: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계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 술람미 여자의 말 (5-7)
예루살렘 여자들아 술람미 여자가 예루살렘 여자들을 부르는 말이다. 술람미 여자가 외적으로는 아무 보잘것이 없으나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 영적으로 주님과 교통하며 동행하는 신앙의 비밀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간증하려는 것이다.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술람미 여자가 얼굴이 검지만 예수님 보시기에는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가 얼굴이 검게 된 원인은 일광에 쬐었기 때문이다(6절). 일광에 쬐어서 얼굴이 검어졌다는 것 은 세파에 시달려 얼굴이 보잘것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술람미 여자는 믿음을 지키며 예수님을 바로 따라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환난과 핍박을 받는 동안에 겉모습이 보잘것없이 된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사모하여 들로 산으로 헤매며 다니느라고 얼굴이 검어졌다. 그래도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아름답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도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그 중심과 속사람을 보신다. 술람미 여자가 외모는 보잘것 없으나 그 중심과 속사람은 실로 아름답다.
계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계달”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인데 그 족속은 검은 염소털로 만든 장막을 치고 유목생활을 하였다(창 25:13; 사 21:17). 그러므로 계달의 장막같다는 것은 염소털같이 검고 너저분하여 아무 모양이나 광채나 볼 만한 것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술람미 여자가 외모로는 아무 보잘것 없으나 예수님 보시기에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호화 찬란하다는 것이다.
믿음 지키기 위해서 환난받는 성도가 비록 외모는 이렇게 계달의 장막같이 변변치 못하고 보잘것이 없으나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이 아주 호화롭고 아름답게 보아주신다. 이와 반대로 외모를 아무리 아름답게 단장하고 호화로이 꾸몄을지라도 믿음을 잘 지키지 못하는 성도는 예수님의 눈에 계달의 장막과 같이 추하게 보여진다. 우리는 외모를 꾸미지 말고 속사람을 단장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많이 닮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신령한 세계(침궁)까지 들어가 예수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 1: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 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술람미 여자가 일광에 쬐어서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미의 아들들이 그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기 때문에 그 포도원에 가 있는 동안 일광에 쬐어서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된 것이다.
일광(日光)에 쬐어서는 세상 풍파에 시달린 것을 가리킨다. 술람미 여자가 포도원지기를 하면서 여러 가지 시련 가운데 얼굴이 검게 되었다. 흘겨보지 말 것은 업신여기지 말라는 뜻이다. 어미의 아들들 육신의 친척들과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나를 노하여 세상 사람들은 술람미 여자가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안 하고 주님만 따라가고 주의 말씀만 따라가므로 노하였다.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이것은 육신의 친척들이 술람미 여자를 세상의 이용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술람미 여자를 세상의 이용물로 삼아서 세상 일에 이용하였기 때문에 술람미 여자가 그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많은 환난을 받았다. 또 세상의 모든 일로 시달리는 동안에 얼굴이 거무스름해졌고 외모가 보잘것없이 되었다. 그러나 술람미 여자는 그 가운데서 신앙을 잘 지켰다. 술람미 여자가 포도원을 지키면서도 마음은 예수님께가 있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 주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하며 예수님의 명령을 잘 지켰다. 술람미 여자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을 첫째로 하고 포도원 지키는 것은 둘째, 세째로 했다. 그러므로 포도원은 잘 지키지 못하였다. 성도가 비록 세상 일을 맡아서 일해 나가면서도 믿음을 잘 지켜 속사람을 아름답게 단장해야 한다. 그런 성도를 예수께서 기뻐하신다.
욥기 23:10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했다. 욥이 그 많은 재산이 다 없어졌고, 아들 일곱, 딸 셋이 한꺼번에 다 죽었고, 또 몸에는 병이 나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으며, 심지어 아내에게 배척을 당했다. 그렇게 많은 시련을 당한 것이 곧 일광에 쬐어 거무스름해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욥은 믿음을 지켰고 모든 시험을 믿음으로 다 통과했다.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믿음 지키느라고 세상 일을 제대로 다 못했다는 것이다. 성도가 마땅히 부모를 공경해야 하지만 믿음 지키는 문제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거나 하면 부모 공경을 제대로 못하고 또 가정도 제대로 잘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갈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부친을 작별하고 따라갔다(마 4: 18-22). 그것이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 일이 잘못되는 경우도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가정에서 자기 할 일을 잘해야 되고, 부모를 잘 공경해야 되고, 또 자녀를 잘 길러야 되고, 직장에도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위반되는 것까지는 할 수 없다. 그로 인하여 세상 일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만 잘 따라 갔다고 하면 대성공이다.
• 1:7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 술람미 여자가 예수님을 부르는 말이다.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술람미 여자는 예수님이 양떼를 어디서 먹이는지, 어디서 쉬게 하시는지, 그곳을 알아서 자기도 거기에 가려고 찾는다. 성도는 어떻게 하여야 주님의 신령한 양이 되고 어떻게 믿어야 주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는가, 진리가 어디에 있는가, 어디서 주님이 생명 운동을 하시는가, 그곳에 가려고 애쓰며 찾아야 한다. 어디가서 배워야 바로 배우며 어느 곳에 가야만 주님과 같이 안식할 수 있는지 애쓰며 찾아야 한다. 성도는 생명의 꼴을 먹을 만한 곳에 가서 꼴을 먹고 그 생명이 살고, 안식할 곳을 찾아 안식을 누려야 한다.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이 그 시대에 필요한 꼴을 먹이셨고, 초대 교회 시대에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필요한 양식을 공급했고, 이스라엘의 아합왕 시대에는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서 양떼들을 먹였고, 종교 개혁 시대에는 루터와 칼빈을 통해서 참된 양식을 먹였고, 일정 말기 신사참배의 환난 때에는 주기철 목사, 이기선 목사등을 통해서 참된 양식을 먹였다. 우리는 오늘날 이 시대에 양떼를 바로 먹이는 곳(바른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 어디인가, 또 생명을 살리는 곳이 어디인가를 찾아 그곳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고 자기 생명이 살아야 한다.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부끄러울 때 얼굴을 가리운다. 성도가 신랑되신 예수님을 잃어버렸거나 신령한 꼴을 먹지 못하고 자기 영적 생명의 역사가 중단되면 주님 앞에 부끄럽다. 하나님의 진리가 예수 믿는 사람 속에서 영적 양식이 되어야 하고, 또 그 시대에 바른 진리를 세워나가며 영적 생명의 역사가 있어야 기쁘고 떳떳하게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참된 양식(꼴)을 먹지 못하고 새 생명의 역사가 없으면 동무 양떼 곁에서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부끄러운 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자기 신랑을 잃어버린 신부가 무엇이 떳떳하겠는가? 예수님의 양떼 먹이는 곳에 가서 신령한 꼴을 먹지 못하고 오정에 쉬게 하는 곳에 가서 영적 안식을 누리지 못하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술람미 여자는 이런 자가 되지 않으려고 그 곳을 애써 찾는 것이다.
앞서 간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랑 (8-11)
• 1:8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 왕의 말 (8-11)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예수님은 당신을 애써 찾는 술람미 여자를 어여쁘게 보신다.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예수님을 바로 따라가 신령한 꼴을 먹고 안식을 누리던 성도, 순교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6:16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했다. “옛적 길”은 옛날 믿음의 선진들이 바른 진리대로 믿은 길이다. 시대와 사상과 사람은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13:8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다. 옛적 믿음의 선진들이 어떤 길을 걸어 갔는가? 아브라함, 다니엘, 스데반이 어떤 길을 걸었는가? 초대 교회 성도가 어떤 길을 걸었는가? 바로 믿던 성도들이 걸어간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바른 진리와 주님의 안식처를 찾는 길이다. 앞서간 양떼들이 걸어간 발자취를 살펴보면 현재 우리가 바로 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환하게 드러난다. 만일 우리가 믿음이 없고 육신 중심과 세상주의로 기울어져 있다면 거기서 회계하고 앞서 간 양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염소는 양의 종류 가운데 들어가지만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이것은 양 가운데 염소 새끼 노릇하는 양을 잘 인도하라는 것이다. 양을 치는데는 염소도 필요하다. 양떼 가운데 염소를 한 마리 넣어 놓으면 다른 양떼들에게 유리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양들이 밤에 잘 때에 추우면 가운데로 서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가운데 힘이 없는 양은 치어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가운데에 염소 새끼를 하나 넣어두면 뿔로 받아서 .헤치기 때문에 추워도 가운데로 많이 모이지 못하고 그대로 지내므로 양들이 깔려 죽지 않는다고 한다.
교회에도 염소 새끼같은 신자가 있다. 교역자는 그 염소 새끼를 잘 먹일 줄 알아야 한다. 염소 새끼를 잘못 먹이면 다른 양떼들도 잘 먹이지 못한다. 염소 새끼를 잘 먹여야 다른 양을 잘 인도할 수 있다. 염소 새끼가 말을 잘 않 듣는다고 내어 쫓으면 다른 염소 새끼가 또 나온다. 염소 새끼에게 받히지 아니하면서 잘 다스려야 능력있는 교역자가 되고 양을 잘 먹일 수가 있다. 또 성도가 염소 새끼와 같이 순종하지 않는 자기 몸을 쳐서 잘 복종시켜 나가야 자기 영을 잘 길러 나갈 수가 있다. 고린도전서 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다.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염소 새끼를 잘 먹이면 예수님을 만날 희망이 있다.
• 1:9-10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바로의 병거의 준마는 아주 좋고 뛰어난 말이다. 신랑되신 예수께서 선한 싸움을 잘 싸우는 성도를 볼 때에 바로의 병거의 준마와 같이 훌륭하고 씩씩하고 장하고 위대하게 보아주신다.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성도의 뺨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나타나 있으므로 주님께서 그 뺨을 아름답게 보아주신다.
“머리털”은 권세 아래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고린도전서 11:10에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고 했다. 구속의 은혜에 감격해서 순종하는 성도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아름답게 보아주신다. 네 목은 구슬 꿰미로 아름답구나 목의 구슬은 순종을 가리킨다.
잠언 1:8-9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고 했다. 아비의 훈계와 어미의 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을 떠나지 않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은 그 목에 금사슬과 같이 보배롭고 아름답다.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금”은 믿음을 가리키고 “은”은 행위를 가리킨다. 연단받은 믿음은 금보다 귀하다(벧전 1:7). 그 연단받은 믿음에 행위가 따르면 예수님께서 금사슬에 은을 박은 것과 같이 보배롭고 아름답게 보아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받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열매가 맺히면 금사슬에 은을 박아 만든 것같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다.
향기와 생명이 있는 사랑 (12-17)
• 1:12 왕이 상에 않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 술람미 여자의 말 (12-14)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왕이 즐거운 연회석상에 앉은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님과 같이 먹고 마시는 생활을 가리킨다.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나도 기름”은 기름 가운데도 귀중하고 가장 값진 기름이다(막 14:3-9, 요 12:3). 이것은 술람미 여자(신령한 성도)가 예수님에게 마음과 뜻과 사랑과 생명 전체를 쏟아붓는 것을 말한다. 성도가 참으로 예수님과 한자리에 앉아 있을 때에 이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온다. 그것이 또한 예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향기가 되는 것이다.
• 1: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예수님은 성도의 품 가운데 몰약 향 주머니이다. “몰약 향“은 악취를 제거하며, 방부제로 사용했다. 성도가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시면 언제나 향기가 가득하고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게 된다. 그리하여 가는 데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와 모든 악취가 제거되고 부패가 방지되고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긴다.
고린도후서 2:14-16에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했다. 그리스도가 믿는 사람 속에 와서 내주할 때에 믿는 사람 속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계속하여 나오게 된다. 자기 속에는 악취가 없어지고 부패가 제거되며 언행을 통해서 향기가 계속 나타나게 된다. 좋은 일을 당해도 향기가 나오고 환난과 고통과 핍박이 올 때에도 향기가 나타나게 된다. 최 권능 목사는 항상 기쁨과 즐거움으로 “예수 천당”을 외치며 다니셨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그의 속에 향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속에 모시지 못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지 못한다. 말 한마디를 해도 향기가 없는 말을 하게 되고, 마음의 생각도 향기가 없는 더러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술람미 여자와 같이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성도는 가시밭에 백합화 같아서 가시가 찌를수록 향기가 더욱 잘 나오게 된다(2:2). 다니엘은 사자굴 시험이 왔을 때도 감사하는 기도를 했다. 조금 있으면 사자굴에 던져지겠는데 어떻게 감사가 나왔을까? 그것은 다니엘이 하나님을 심령 속에 모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 생명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한 것이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에 원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것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그 속에서 나온 것이다.
•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술람미 여자는 예수님을 엔게디 포도원의 고별화 송이라고 했다. 엔게디는 아름다운 수풀이 많고 포도로 유명한 지방이라고 한다. 고벨화는 팔레스타인과 애굽에 많이 나는 식물로 봉선화와 비슷한 꽃인데 그 크기는 3m쯤 된다고 한다. 엔게디 들과 같은 넓은 들판에 높이 솟아나 피어 있는 고벨화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고 그 모양이 아름답기 짝이 없다. 그 꽃으로 인하여 그 포도원 전체가 아름다와 보인다. 참으로 예수님은 엔게디 포도원에 고벨화 송이와 같이 뛰어나며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포도원은 교회를 상징한다(사 5:1-7). 교회에도 예수님이 계셔야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가정에도 예수님을 모셔야 아름다운 가정이 된다. 교회에 예수님이 떠나면 사탄의 교회가 되고 예수님이 계셔야 아름다운 교회가 된다.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하나님의 이적으로 나았다는 말을 바벨론 왕이 듣고 사자를 유다에 보냈다. 그때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자들에게 하나님만 보여주고 하나님만 자랑했어야 될 것인데 하나님을 보여주지 않고 무기창고, 내탕고, 보물창고 등을 보여주며 자랑했다(사 39:1-4). 그것들은 바벨론 나라에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후 바벨론이 유다를 업신여겨 군사를 이끌고 와서 유다를 함락 시켜 버렸다. 히스기야왕이 그 때에 하나님만 보여주었더라면 바벨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유다를 침략하지 못했을 것이다.
• 1: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 왕의 말 (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예수님이 성도를 향해서 “내 사랑”이라고 불러 주시며 어여쁘게 보아주신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성도가 신령한 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 보시기에 그 눈이 비둘기같이 보인다. “비둘기”는 온유하고 순결하고 정결한 짐승으로 구약 시대에는 비둘기를 제물로 드리기도 했다. 신령한 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도는 정결하고 순진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제물이 되고 예수님께서는 아름답게 보아주신다. 우리는 항상 신령한 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생명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 1: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 술람미 여자의 말 (16-17)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화창하다”는 것은 마음이 시원하고 즐겁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 분이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참으로 아름답고 마음이 시원하다.
우리의 침상 예수님과 술람미 여자가 교제하는 곳이다. 술람미 여자만 왕의 침궁에 들어갈 수 있고(4절) 침상에서 동거동락(鬧居同樂)할 수 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침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예수님을 멀찍이 바라보고 수종을 드는 성도들이다. 성도가 침궁에 까지 들어가 침상에서 예수님과 교통 해야만 생명이 산다. 술람미 여자와 같은 성도는 주님께 마음과 사랑과 정성과 목숨을 전폭적으로 쏟아붓는다(12절). 요한복음 12:1-8에 마리아는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며 전폭을 쏟아붓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푸르고 “푸른 빛”은 생명의 빛으로 푸른 침상은 생명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본이시므로 푸른빛을 좋아하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산천 초목과 하늘과 바다도 푸르게 만드셨다.
• 1: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우리 집은 성도가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신령한 집이다. 백향목 들보 “백향목”은 좀이 먹지 않고 후패(朽敗)하지 않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나무이다. 예수님과 더불어 침궁에 들어가는 영적 생활 하는 성도는 악취가 제거되고 좀이 못 먹고 향기만 난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가 되고 거기에 향기가 가득해진다. 최 목사는 조그마한 오두막에 살면서도 예수님을 모시고 살았으므로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렸다. 한번은 미국 선교사가 심방을 오겠다고 하니까 사모님이 “이런 누추하고 조그만 집에 어떻게 선교사가 오겠읍니까?”하니 최 목사는 “우리 집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선교사가 왜 못오시겠는가”고 하며 선교사를 기쁘게 모셨다고 한다. 잣나무 석가래 “잣나무”는 사시장철 늘 푸르고 창성하는 나무이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집은 언제나 백향목 향기가 나고 푸른 침상같이 생명이 있고 잣나무와 같이 계속 발전하고 창성해 나간다.
[역대하 3장 강해 성경말씀] 솔로몬의 성전 건축의 착공(대하 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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