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산상수훈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재물관은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열심히 일하여 재물을 모았기 때문에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여 땅에 쌓아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재물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주셨기 때문에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하늘에 쌓아두는 것은 동록도 없고 도둑도 없다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땅에 쌓아두었습니다. 결국 영생을 얻지 못했습니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 영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가지고 이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마태복음 6:19-24)
19절은 메 데사우리제테 휘민 데사우루스 에피 테스 게스 호푸 세스 카이 브로시스 아파니제이 카이 호푸 클레프타이 디오뤼수신 카이 클레프투신입니다.
마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6:19
보물 - 데사우로스라는 이 말은 본래 소중한 물품을 보관해 두는 장소라는 뜻이었으나, 그 의미가 발전하여 그 장소에 보관해 둔 물품, 그 자체를 가리키게 되었다(2:11). 여하튼 이 보물은 값비싸고 귀중한 귀금속을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훗날 최고의 가치를 발하게 될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편 본문의 장면은 은행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 팔레스틴인들이 자기의 소중한 물품을 땅속에 묻어두었던 전통에 입각해 제시된 것이라 할 수 있다(13:44).
땅에(에피 테스 게스) - 하늘과 반대되는 장소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상징적으로 영원한 미래가 없는 순간적이며 변화무쌍한 이 세상을 의미한다고 본다.
쌓아 두지 말라(메 데사우리제테) - 이는 명령법 현재 시상으로서 '쌓아두기를 그만 두라'(stop storing up)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다(Turnur, Syntax, p. 76).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으니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릇된 행위를 단호히 끊어버릴 때가 왔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현세적으로 보이는 것에 최선의 가치와 행복을 두지 말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재물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땅에 쌓인 재물과 보화가 최상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겼다가는 훗날 큰 화(禍)를 만날 수 있다.
(2) 탐욕이 가득한 자들은 지상의 재물에 애착을 느끼고 그것을 위해 살고 있으나 신자(信者)는 하늘의 것을 사모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때 이런 것이 우리를 구할 수 없다. (4) 재물이 그리스도인에게도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을 풍족히 소유해야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에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좀과 동록(세스 카이 브로시스) - 먼저 '좀'(moth)은 옷이나 음식을 해치는 벌레들, '동록'(rust)은 금속의 부식(corrosion)을 가리 킬뿐 아니라 간혹 쥐들이나 곰팡이에 의해 입게 되는 해를 가리키기도 한다.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와 반대되는 일시적 재물이나 명예, 보물 등이 이것들에 의해 잠식되고 파괴된다고 기록한다(사 51:8; 약 5:2, 3).
도적이 구멍을 - 당시 팔레스틴에 건축된 가옥들은 대개 진흙벽이나 흙색 돌을 쌓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도적들은 주택의 출입구를 통과하지 않고 그 흙 벽에 구멍을 뚫음으로써 그 집의 귀중품을 훔쳐갈 수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바로 앞 문구에서는 재물의 내적인 파괴 원인이 언급되었으나 여기서는 외부의 손길에 의해 이 땅의 재물이 안전하지 못함을 밝히고 있다.
20절은 데사우리제테 데 휘민 데사우루스 엔 우라노 호푸 우테 세스 우테 브로시스 아파니제이 카이 호푸 클레프타이 우 디오뤼수신 우데 클레프투신입니다.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6:20
하늘에 쌓아 두라 - 데사우리조라는 동사인에 명령법 현재 능동태 복수 2인칭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이니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함을 말한다. 지상의 보물에는 여러 가지 위험 요소가 뒤따른다(19절).
본절에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면 안전하다는 내용이 서술되고 있다. 특별히 '땅'에 대비되는 '하늘'은 그 안전성의 차이뿐 아니라 그 영원 '지속성과 거룩성 및 무한한 가치성에 있어서 땅에 쌓아 둔 보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하다(눅 12:33; 유대 문헌중 M. Peah 1:1;Pss Sol 9:9).
한편 '하늘의 보물'이란 이 땅 위에서 행한 선한 일로서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면 그 무엇이나 해당된다. 즉 의(義)로운 일을 행하는 것,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 남을 용서해 주는 것 등, 이 모든 것들은 보상이 뒤따른다는 점에서 하늘에 쌓아둔 보물이 된다(5:12; 고후 4:17).
또한 남들에게 친절을 베풀거나(10:42; 25:40), 자기 소유를 타인을 위해 기꺼이 투자하는 것 등도 하늘의 보물이라 할 수 있다(딤전 6:17-19).
21절은 호푸 가르 에스틴 호 데사우로스 휘몬 에케이 에스타이 카이 헤 카르디아 휘몬입니다.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6:21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 신앙인의 영원한 경구(警句)인 본문의 요지는,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인 그 사람의 인격의 중심, 즉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지(知). 정(精), 의(義)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그의 마음에 틈타서 반드시 그의 행동의 방향과 그의 가치관을 결정짓고 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명예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는 분명 야망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고, 돈을 최고로 여기는 자는 돈의 노예가 되며, 쾌락을 제일 좋아하는 자는 필연코 방탕에 빠지게 된다'라고 가르친 바 있다.
그러나 위의 것을 늘 생각하고(골 3:1, 2) 천국의 법에 지배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항상 선한 일에 힘쓰게 되며 또한 그들의 행적(行蹟)이 언제까지나 남아 그에게 영원한 기쁨이 될 것이다(계 14:13).
마음도 있느니라 - 에이미 동사인데 직설법 미래 중간 디포 단수 3인칭이다. 직설법의 해석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면 실제로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미래 시제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사람은 앞으로 계속해서 마음이 하늘에 있을 것을 의미한다. 중간 디포는 중간태와 능동태가 합쳐진 문법이다. 내가 직접 보물을 하늘에 쌓았더니 나의 마음이 하늘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22절은 호 뤼크노스 투 소마토스 에스틴 호 오프달모스 에안 운 호 오프달모스 수 하플루스 헤 홀론 토 소마 수 포테이논 에스타이입니다.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6:22
눈은 몸의 등불 - 눈을 통해 몸이 갈길을 찾고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눈은 '몸의 등불'이 된다. 물론 본문에서는 이 '눈'이 은유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지칭하는 것임이 분명하다(Philo).
그러나 이 '눈'을 단지 상징적 의미로서 뿐 아니라 실제적인 육체의 눈 그 자체의 역할에 대해서도 간과(onerlooking)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육체의 '눈'이 보는 바는 '마음'이 보는 바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육체의 눈이 세상의 것에 심취한다면 그 마음 역시 타락의 늪으로 빠져들 것이며, 반면 육체의 눈이 하늘의 것을 바란다면 그 마음은 신령한 것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성하면(하플루스) - 이 말은 원래 '주름 없는'이란 뜻으로서 일차적으로는 '건강한', 이차적으로는 '진실한'(고후 11:3), '단일한', '풍부한', '관대한' (약 1:5) 등의 복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하튼 이 말은 빛을 받아들이는 '눈'의 상태를 지칭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눈과 마음은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하면'이란 적어도 육체와 마음에 궁극적으로 유익을 얻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건전하다'(is sound, RSV)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두 개의 물체(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를 동시에 바라보는 혼란하고 난시안적인 상태가 아니라 오직 한 방향으로 '단일한'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진실하고 성실한 상태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온몸이 밝을 것이요 - 에이미 동사로서 직설법 미래 중간 디포 단수 3인칭을 사용했다. 건전하고 진실한 눈을 통하여 얻어진 밝은 빛으로 인하여 몸은 바른 판단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유익을 얻게 하는 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실로 밝은 빛 되신 하나님의 신령한 진리를 굴절 없이, 혼선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참으로 신령한 것과 속된 것을 바로 구분할 뿐 아니라 그 빛 안에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진리 그대로 분별하고 평가하며, 또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혜가 아니겠는가?
23절은 에안 데 호 오프달모스 수 포네로스 헤 홀론 토 소마 수 스코테이논 에스타이 에이 운 토 포스 토 엔 소이 스코토스 에스틴 토 스코토스 포손입니다.
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6:23
나쁘면(포네로스) - 이 말은 분명 22절의 '성하면'과 대조되는 표현으로서 흔히 '악한'의 뜻을 가진다. 그리고 유대인의 관용적 표현에서 '악한 눈'은 이기적이고 인색(吝嗇)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런 의미에서 '눈이 나쁘다'는 어구는 문맥상 하나님과 재물 양자에다 관심을 나누어서 하나님의 뜻과 영적인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온몸 - 앞 구절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빛을 받아들이는 물질적 몸을 가리킴과 동시에 도덕적 차원의 전 인격을 상징하기도 한다.
어두울 것이니(스코테이노스) - 어둡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빛이 없는 암흑 속에서 대상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즉 세상 재물에 현혹(眩惑)되어 영적 세계와 참된 진리를 보지 못하는 눈은 온몸에 진리의 세계를 전달해 주는 기능이 마비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온몸으로 상징되는 그의 전 인격과 영혼은 아무것도 분간치 못하는 흑암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네게 있는 빛 - 여기서 '빛'은 헬라어로 '토 포스'로서 태양 빛과 같은 일반적인 빛(light)을 가리키지만 문맥상 이는 22절의 등불로 번역된 '호 뤼크노스'와 동일한 뜻의 빛(lamp)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따라서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영적인 진리의 세계를 밝혀주는 마음의 등불이 어두우면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 여기서 '어두움'은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쁜' 눈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실로 본래의 기능이 밝은 빛을 받아들여야 하는 눈이 어두움만을 받아들인다면 그 온몸의 상태는 얼마나 치명적이며 절망적이겠는가! 진정 '성한' 눈을 통해 진리의 세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는 이방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죄와 악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24절은 우데이스 뒤나타이 뒤시 퀴리오이스 둘류에인 헤 가르 톤 헤나 미세세이 카이 톤 헤테론 아가페세이 헤 헤노스 안덱세타이 카이 투 헤테루 카타프로네세이 우 뒤나스데 데오 둘류에인 카이 맘모나입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 예수께서는 앞에서 우리가 과연 어디에다 보물을 쌓아야 할 것인지 또는 우리의 눈을 그 무엇에 고정(fixation)시켜야 할 것인지 하는 선택적 문제를 제시하였다(J. Stott, Sermon on the mount, p. 158).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누구를 주인으로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선택의 문제를 제시한다.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누가는 불의(injustice)한 청지기 비유를 설명한 다음 이와 동일한 내용의 기사를 싣고있다(눅 16:13). 이는 우리의 마음이 단순해야 하고 또 목적이 분명해야 함을 가리킨 내용이다.
사실 '종'이란 오직 한 주인에게 전적으로 매인 바 되어 그 주인의 명령에 자신의 전 의지를 동원해 순종해야 한다(Tasker). 따라서 그 종이 진실하다면 결단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게 된다.
만약 그가 두 주인을 섬긴다고 한다면 그는 그들을 자신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얻는 한 수단으로써 그 주인들을 섬긴 것이 된다.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 한 주인을 섬기게 되면 다른 사람을 섬길 수가 없다. 즉 두 주인을 섬기려 하는 것은 한 주인도 섬기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미움'과 '사랑'은 인간이 지닌 본성적 감정을 뜻하기보다 어떤 구체적인 목적성을 지닌 마음의 현상을 뜻한다. 어찌 되었든 이 양자는 엄밀히 말해 겸비(兼備)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은 우리가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든지 또는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든지 하게 된다고 말한다(롬 6:16).
이를 중히 여기며(헤 헤노스 안덱세타이) - 직설법 미래 중간태 단수 3인칭을 사용했다. '중히 여기다'란 말은 그에 대해 변함없이 성실하다란 뜻이다. 그리고 본 어구에서는 둘 중에 하나인 '이를'이란 말이 강조되고 있다. 만약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여 섬기게 된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재물(맘모나) - 이는 나쁜 의미로서의 재물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서 특정한 부(富)나 재산을 뜻하는 아람어 '마노나'에서 유래하였다. 유대 문학에는 재물과 돈을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서 이 재물은 하나님과 병기(倂記)되어 의인화되고 있으며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이 재물 역시 종의 주인으로 묘사되었다.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여기서 '겸하여'(카이)란 원어상 '대등하다'라는 뜻의 접속사로서 친지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그분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물질과 동등한 위치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전적인 헌신을 받으시거나 또는 아예 섬김을 받지 않으시거나 둘 중에 하나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물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며 양자 모두에 헌신하고자 하는 것은 주를 따르는 제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며, 또한 이러한 행위는 부분적 죄악이 아니라 근본(根本)적인 죄악으로서 그 원인은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여기서 재산 소유를 정죄한 것은 분명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역시 세상에서 살아갈 때 재산을 모을 수 있으나 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거나 그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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